넌 족발 뜯으러 가니? 난 역사 보러 가는데

[미니벨로 타고 서울골목여행11] 국립극장 경동교회 등 60~70년대 건물 가득한 장충동

등록 2008.01.01 18:19수정 2008.01.31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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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동은 유명 건축물 전시장이다. 앞에 보이는 건물이 대한민국 건축 1세대로 불리는 김수근이 설계한 자유센터. 공산주의에 대항해 '자유'의 위대함을 전파하기 위해 만든 건물이다. 건너 보이는 건물은 국립극장이다.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가 이 곳에서 저격당했다. ⓒ 김대홍



1997년 12월에 서울에 올라와서 광화문 근처에 있는 인쇄업체에서 교정 일을 봤다. 그 때 그 곳에는 큰누나뻘 되는 고참 아르바이트생이 있었다. 일이 여의치 않아 경남 마산에 내려가게 됐는데, 그 때 누나는 나를 데리고 장충동에 있는 피자집에 갔었다. 그 때 피자를 처음 먹었던 것 같다.


1998년 가을에 다시 서울에 올라오면서 종종 장충동을 찾았다. 그 때 먹은 피자집에 가기도 했고, 근처 종이미술박물관을 가기도 했다.

60~70년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장충동이 좋았다. 장충단 공원 안에 있는 롤러 스케이트장이 그러했고, 1963년 문을 연 장충체육관이 그랬다. 1969년 개관한 타워호텔, 1973년 이전 개관한 태극당, 1973년 남산 자락에 문을 연 국립극장 등 그 곳에선 시계추가 거꾸로 도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태극당 문을 열고 들어가 '납세로 국력을 키우자, 계산을 정확히 합시다' '세금은 국력, 영수증을 드립니다. 꼭 받아가세요 영수증을'과 같은 흑백TV 분위기가 나는 문구들을 읽는 재미도 괜찮았고, 나른한 오후 장충단 공원에서 어르신들이 '게이트볼'을 즐기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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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지막 촬영지가 장충리틀야구장이다. 당시 야구장은 맨땅이었다. ⓒ 명필름


올해 3월 재개장하기까지 우리나라 유일의 어린이 전용 '맨땅' 야구장이던 장충리틀야구장 모습도 정겨웠다. 송강호 김혜수가 주연을 맡은 영화 <YMCA 야구단>의 마지막 장면 촬영지가 바로 이 곳이다.(잔디를 깔기 전 장충 리틀야구장을 찍은 사진이 있었지만, 부실한 컴퓨터 덕에 영영 사라져 버렸다.)

지금은 개보수를 하면서 싹 바뀌었지만, 장충동 길을 통해서 만나는 남산 꼭대기 모습도 한적해서 좋았다.


2005년 12월 다시 문을 열기까지 남산 꼭대기 모습은 1969년 만들어질 때 모습 그대로였다. 어르신들이나 중년 남녀가 꼭대기를 찾아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고, 비둘기 모이를 주었다. 그 때 남산 꼭대기는 지금처럼 10-20대들이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우루루 찾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한 때 1000여 가구 월남 1세대들이 살았다고 알려진 장충동은 지금은 고급빌라가 모여 있는 부촌과 족발집 골목으로 유명한 곳이 됐다. 길은 대체로 넓은 편이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은 거의 보기 힘들다. 하지만 길 곳곳에 근현대사가 살아 숨쉰다. 골목길 맛은 적지만 근현대사 체험장소론 제격이다.

12월 어느 날 후배 정래와 함께 장충동 골목길을 누볐다.

평양면옥 주변 옛 길 조금 남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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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동 골목길. 수정약국과 평양면옥 뒤, 동국대학교 옆에 조금 남아 있다. ⓒ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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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블럭길 ⓒ 김대홍


장충동은 남산 자락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뻗은 형태다. 동대지하철역 사거리를 중심에 놓고 크게 네 군데로 갈라진다.

서북 지역엔 서민 주택가와 영세업체들이 많다. 이 동네선 군데군데 낡은 집들이 눈에 띈다. 얼핏 봐도 30년 이상은 족히 됐을 집들이다.

남소영길·고야산길 쪽으로 골목길이 남아있는 편이다. 남소영(南小營)은 조선시대 어영청 분영으로 서울 장충단 남소문 옆에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길 이름이 붙었다. '고야산길'이란 이름에선 일제시대 이 곳에 있었던 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의 흔적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이 곳에서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한 선배는 "이렇게 전선줄이 하늘을 뒤덮은 곳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얼키설키 얽힌 골목길이 아니어서 길 맛은 덜하다. 단, 골목은 단정한 느낌이다. 여느 골목길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화분이 길 곳곳에 놓여 있다. 이파리가 전혀 남아있지 않아 쓸쓸한 느낌이다. 창문엔 말린 야채가 뭉텅이로 걸려 있다.

길은 대부분 고른 시멘트길이었지만, 한 곳엔 시멘트 보도블럭이 깔려 있다. 흙길을 덮을 때 과거 시멘트 보도블럭을 흔히 깔았다.

보도블럭은 쉽게 깔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자주 이용하다 보면 블록 사이에 틈이 생기고, 그곳에 물이 고였다. 걸어가다가 가끔씩 고인 물이 '찍'하면서 올라오면 그렇게 기분 나쁠 수가 없었다. 이 곳 보도블럭길 양 옆엔 시멘트로 튼튼하게 막음을 해서 비가 오더라도 물이 올라올 염려는 없을 것 같다.

재미있는 곳은 평양면옥 골목길이다. 86년 문을 연 이곳엔 '삼대를 이어왔다'는 홍보문구가 붙어 있다. 주인 김대성씨의 조부와 부친이 평양 대동문 옆에서 '대동면옥'을 경영했기 때문이다.

건물 뒤엔 두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만한 좁은 골목길이 있는데, 여기에 '평양면옥'이란 화살표시가 돼 있다. 화살표를 따라 구부러진 길을 한참 따라가다 보면 식당 입구가 나온다. 뒷길을 따라 식당에 들어오게 한 게 재미있다.

평양면옥길 쪽엔 이끼가 잔뜩 핀 담벼락이 보인다. 요즘 벽은 마감처리를 잘 해서 아무리 응달이라도 이끼가 자랄 틈이 없다. 이처럼 이끼가 밭을 이룬 모양을 참 오랜만에 본다.

동국대와 소피텔앰배서더 가운데 언덕 동네 쪽엔 사잇길이 발달한 동네가 조금 남아 있다. 가파란 경사길 사이에 '하숙생 구한다'는 표지판이 많이 붙어 있다. 동국대생이 많이 묵는 하숙촌인 셈이다. 빌라촌이라 전형적인 골목동네와는 거리가 멀다.

김수근 이희태 승효상... 유명 건축가들의 작품 경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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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동 웰콤시티. 2007 문화관광부 문화예술상을 수상한 승효상의 작품이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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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높여 언덕과 높이를 맞춘 집. ⓒ 김대홍


동대지하철역 사거리에서 동북 방향으로 길을 건너면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길은 확 넓어지고, 큰 집이 눈에 많이 띈다. 이 곳 장충동1가 쪽에는 고급 주택단지가 많다. 1999년 당시 가구당 분양가가 55억 원을 넘는 빌라가 지어져 논란이 된 적도 있을 정도다.

'원조 부촌'으로 불리는 장충동 역사는 일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31년 동양척식회사는 장충동 일대에 일본인 부자들을 위한 문화촌을 만들었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인 재벌 창업주들이 이 곳에 대거 정착하기 시작했다. 삼성을 세운 이병철 창업주를 비롯해 정주영 현대 창업주, 유일한 유한양행 회장, 김재섭 영창악기 대표 등이 생전에 이 곳에 살았다.

부촌이란 이름세가 있었지만, 남쪽과 북쪽 분위기는 다소 달랐다. 북쪽 장수길 쪽에는 오래된 집들이 보였다. 흉가처럼 버려진 집이 있는가 하면, 완만한 오르막길에 계단을 만들어 바닥을 높인 뒤 집을 쌓은 곳도 있었다. 이런 방식은 지형을 그대로 남겨둔다는 점에서 오르막을 깎는 방법보다 더 자연친화적이라고 느껴졌다.

플라스틱 패널로 햇빛을 가린 곳도 있고, 육각형 창문집도 있었다. 이렇게 각기 다른 집들이 모여 한 동네를 이루는 게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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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동교회 계단. 나선형처럼 돌면서 하늘로 올라가는 구조다. 김수근 작품으로 1979년 건축가협회상을 받았다. ⓒ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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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교회 별관. 지금 한창 공사중이다. ⓒ 김대홍


장충동1가쪽 대로변에 경동교회가 있는데, 김수근 작품이다. 김수근은 한국건축 1세대로 평가받고 있으며, 일본 유학 중인 1960년 29세 나이로 국회의사당 공모에 1등으로 당선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올림픽 주경기장과 올림픽공원, 서울대 예술관, 워커힐호텔 힐탑바 등을 설계했으며, 경동교회 설계로 1979년 건축가협회상을 받았다.

이 건물부터 남산 방향은 우리나라 유명 건축가들의 야외 작품 전시회장이다. 김수근 작품인 경동교회와 자유센터, 타워호텔을 비롯, 국립극장(이희태 작품), 웰컴시티(승효상 작품), 장충교회(김학철 작품) 등이 '쭉' 이어진다.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한 대가들이라고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딸과 함께 떠나는 건축여행>(이용재 지음)에 잘 나와 있다.

조병옥 20만, 김대중 100만 연설... 단골 집회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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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단공원 안에 있는 유관순상. 장충단공원 안에는 헤이그특사로 유명한 이준 열사를 비롯, 구한 말 목숨을 내던진 이한응 열사, 사명대사 등 수많은 인물의 동상이 있다. ⓒ 김대홍


배호의 '안개낀 장충단공원'으로 유명한 장충단공원은 우리나라 근현대사가 응축된 곳이다. 장충단공원은 이 곳에 장충단(奬忠壇)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장충단은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때 순국한 대신과 장병들을 제사하기 위해 1900년 세운 제단이다. 명성황후 시해 때 주변을 지키다 순국한 시위대상 홍계훈, 영관 염도희 이경호를 비롯, 궁내부대신 이경직 등을 신주로 모셨다.

우리나라를 강제 합병한 일제는 1910년 장충단을 폐사하고, 1920년대 후반부터 벚꽃을 심고 장충단공원으로 바꿔버렸다. 이후 상해사변 당시 일본군인결사대로 전사한 육탄삼용사의 동상과 이토 히로부미의 보리사(菩提寺, 선조 대대 위패를 모신 곳)인 박문사가 세워졌다.

해방 뒤 일제 흔적은 모두 지워졌으나 지리상 이점 때문에 장충단공원은 계속 수난을 겪었다. 1962년 공원 자리에 자유센터와 타워호텔이 들어선 것을 비롯해, 중앙공무원 교육원(1963년), 장충체육관(1963년), 재향군인회 건물(1968년), 국립극장(1973년), 신라호텔(1975년) 등이 들어서면서 1940년 지정 당시 41만8000㎡였던 공원 면적은 1984년 29만7000㎡(약 90만평)로 줄어들었다. 과거 100만 명이 모여 시국강연을 들었다는 위용은 그렇게 과거가 돼 버렸다.

장충단 공원에서는 근현대사를 수놓은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장충단은 시국강연회 단골 장소였다. 1957년 민주당이 주최한 시국강연회에 20만 시민이 모였을 때 김두한과 이정재 패거리가 몸싸움을 벌인 곳이기도 하고, 1971년 당시 신민당 대선후보였던 김대중이 100만 군중 앞에서 연설한 곳이기도 하다.

1990년 백기완 이부영 제정구 등 '민중의 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연합추진위원회가 시국대강연회를 가진 곳 또한 장충단공원이다. 이듬해인 91년에는 '미국쌀 수입저지와 쌀값보장 전량수매 쟁취를 위한 농민대회'가 1만5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이 곳에서 열렸다.

지금은 서울광장과 여의도광장이 단골 집회장소지만, 오랫동안 장충단공원은 한강 백사장과 함께 가장 인기있는 집회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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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표교. 세종 23년에 만들어진 다리로, 청계천 물높이를 재는 수표가 있어 수표교란 이름이 붙었다. 수표는 지금 동대문구 청량리동 세종대왕기념관에 있다. ⓒ 김대홍



장충동엔 조선시대 유적으로 수표교(水標橋)와 숭정전이 있다. 세종 23년(1441) 청계천 물높이를 재기 위해 만든 수표교는 원래 청계천2가에 있었다.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신영동으로 옮겼다가 1965년 지금 자리에 설치했다. 수표교 옆에 있던 수표(水標)는 동대문구 청량리동 세종대왕기념관에 있다.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正殿, 으뜸 전각)으로 광해군 8년(1616)에 세워졌다. 일제 강점기인 1926년 3월 동국대 자리로 옮겼으며, 1976년 9월 동국대학교 정문 옆으로 옮겨진 뒤 '정각원'이란 현판이 달렸다.

장충동 여행이 대략 끝났다. 정래가 밥을 먹자고 보챈다. 장충동에서 유명한 곳은 뭐니뭐니해도 족발집. 허나 족발이 별로 당기지 않는다. 정래에게 조금만 자전거를 타고 가자고 했다. 좋단다. 버스 한 구간 정도 달리면 동대문 풍물시장이다.

여기엔 청계천에 노점을 깔았던 상인들이 모여서 물건을 팔고 있다. 시장 분위기가 물씬 나며, 값도 무척 싸다. 대충 분위기를 이야기하니 정래가 빨리 가고 싶어 하는 눈치다. 남산을 등에 두고 자전거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장충동 #골목 #미니벨로 #자유센터 #김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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