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마산교도소에서 온 편지

등록 2007.12.31 14:26수정 2007.12.31 14:26
0
원고료로 응원

어느 교도소에서. ⓒ 권우성


유월의 지독한 밤꽃 냄새로부터
뜻밖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마산우체국 사서함 7-1013
마치 초식동물처럼 두 눈이 커서
유난히 겁이 많던 불알친구 석이에게서 온 편지였지요.

지리산의 품에 안겨
무심히 10여년을 사는 동안
나의 친구 석이는 마산교도소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7년 째 16척 담장 안에서
참회의 복역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어쩌다 울컥 한 사람의 목숨을 염(殮)하고 이곳에 왔다네' 
이 구절을 읽다가 숨이 턱 막히고 말았습니다.
'목숨을 염하고'의 '염'자가
자꾸 날카로운 송곳처럼 두 눈을 찔러왔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화르르 불타오르는 증오
불륜의 밤꽃 냄새를 지우며, 피 냄새를 지우며
지금은 불법에 귀의하여
참회의 절을 올리며, 망자의 극락왕생을 빌며
'교도소를 절이라 생각하고,
동료 죄수들을 도반으로 삼아 수행 중'이라니
이 얼마나 고맙고도 눈물겨운 일인지요

한 때는
참새 새끼를 잡아다 키워도 보고
친구삼아 지네 새끼를 키우기도 했다지만
이제는 그마저 모두 방생해주고
험한 세상 거칠게 살아온 사람들과 도반이 되었다는
법명이 보설(普說)이라는 나의 친구 석이의 편지를 읽으며
보탈로 읽어야 할지,
보열로 읽어야할지 잠시 고민하다
다시 '한 사람의 목숨을 염하고'의
바로 그 '염'자 송곳이 박힌 두 눈으로
어머니의 산 지리산을 바라봅니다
날마다 함부로 마음의 총구를 겨누며
하루에도 몇 번씩 방아쇠를 당기던 날들을 돌이켜봅니다
아주 가까이 생명평화를 논하면서도
문득 문득 마음의 칼날 번득이는 살기의 순간들을 되새겨봅니다

끝끝내 용서는 인간의 경계를 넘어선
하늘의 몫일지도 모르지만
복수와 보복의 자식은 다시 복수와 보복일 뿐
사형수는 아니지만
나의 불알친구 석이처럼
그 누구도 대신해 죽을 수 없고
그 누군가 대신 죽일 수도 없습니다
그 누구도 참회의 기회를 빼앗을 수 없고
그 누구도 속죄의 기회마저 박탈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리산 칠선계곡의 산토끼는
산토끼답게 살다가
산토끼답게 죽을 권리가 있고
살모사 또한 살모사답게 살다가 자연사할 권리가 있습니다
하물며, 하물며, 하물며,

덧붙이는 글 | 이 시를 쓴 이원규 시인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하고 백화산 만덕사로 들어갔다. 1980년 신군부의 10.27 법난 때 포승줄에 묶여 하산했다. 그 후 홍성광업소 막장 광부, <노동해방문학>과 민족문학작가회의 실무자와 기자로 일했으며 지금은 지리산에 들어가 살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 시를 쓴 이원규 시인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하고 백화산 만덕사로 들어갔다. 1980년 신군부의 10.27 법난 때 포승줄에 묶여 하산했다. 그 후 홍성광업소 막장 광부, <노동해방문학>과 민족문학작가회의 실무자와 기자로 일했으며 지금은 지리산에 들어가 살고 있다.
#사형 #살인 #교도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뉴스 아이디

AD

AD

AD

인기기사

  1. 1 아니, 소파가 왜 강가에... 섬진강 갔다 놀랐습니다
  2. 2 "일본정치가 큰 위험에 빠질 것 우려해..." 역대급 내부고발
  3. 3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4. 4 두 번의 기회 날린 윤 대통령, 독일 총리는 정반대로 했다
  5. 5 '김건희 비선' 의혹, 왜 자꾸 나오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