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십자가에 내 흔적을 묻고 오다

[천진난만하게JH, 산티아고 가는 길 29] 라바날 델 카미노에서 리에고 데 암브로스까지

등록 2007.12.31 11:12수정 2007.12.31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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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 마태오복음 6장 31절-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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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하는 길에 부부 순례자들의 아름다운 뒷모습 ⓒ JH


2007년 7월 20일 금요일, 날씨 맑음, 순례 28일째.
라바날 델 카미노에서 리에고 데 암브로스까지, 21km.
오전 6시 출발, 오후 11시 50분 도착.



순례의 중반, 걷기 시작하고 24일째, 그리고 스물 넷의 나. 내딛는 발걸음 발자국 하나하나가 내 삶의 매일, 순례의 하루하루가 나의 1년 같았던 날들이었다.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고 좋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행복했던 날들이 알 수 없는 이질감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혼자가 되어 걷던 길에서 반갑지 않은 경험을 만났다. 잔뜩 경계하고 의심하고 그만두고 싶기까지 했던 움츠려든 날들, 때마침 온 몸을 물어뜯은 침대벼룩들까지….

몸도 마음도 지쳐버려 닿은 곳 ‘라바날 델 카미노(Rabanal del Camino)’. 그 곳에서 4일간, 나는 걷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작년 가을의 한가운데에서 이제 더는 못하겠다고 항복하듯 안겼던 그때의 느낌과… 같고도 다른 감각이었다. 떠나는 것이 너무나 괴로워 울다 지쳐버렸던 마지막 날, 희한하게도 잔뜩 울고 나니 걸을 힘이 생겼다. 그리고 다음 날, 태양마저 잠든 신새벽에 나는 그 곳을 나서 다시 걸음하였다.

등 뒤로 마을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몇 번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돌아갈 수 없었다. 돌아갈 수가 없었어…. 그리고 오늘, ‘크루즈 데 페로(Cruz de Ferro)’, 철 십자가 산을 넘는다. 순례 가운데 가장 영적인 에너지가 강하다는 곳, 순례자들이 사는 곳에서 가져온 돌을 묻어두는 것이 관례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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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즈 데 페로 순례자들의 기도를 지속하는 철십자가 ⓒ JH


십자가 언덕에 나는 한국에서 가져간 분홍 보자기(명절이면 굴비를 싸는 보자기 같은 것)를 걸었고, 피정 집에서 4일을 쉬며 깎은 손발톱과 물집으로 벗겨진 피부조각을 묻었다. 나는 이 언덕을 지나가지만, 나의 몸 일부와 한국에서 온 분홍 보자기는 펄럭이며 이곳에서 나의 기도를 지속하고 있겠지. 그렇게…. 흔적을 묻어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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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화살표들 주요도시까지의 거리와 방향을 일러주는 귀여운 이정표 ⓒ JH


하산하며 만난 체리나무가 그림 같았던 마을, ‘리에고 데 암브로스(Riego de Ambrós)’는 집집마다 아름다운 꽃으로 꾸며놓은 모습이 아기자기했다. 작은 골목에 만국기가 펄럭이던 풍경이 익숙해 물어보니 때마침 오늘이 마을 잔치란다. 그 날의 목적지를 5킬로미터 남겨둔 이 작은 마을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짐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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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고 데 암브로스 흐드러진 체리나무와 그림같은 집들이 아름다웠던 마을 ⓒ JH


숙소 문을 나서자 흐드러진 나무 아래 샘물가에 세 사람이 쉬고 있었다. 두 여자와 한 남자, 그들은 독일어로 대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독일인들의 필수 가이드북, 빨간 책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영어마저 유창했다. 모든 정보를 종합했을 때, 독일 사람들이겠지?

서로의 이름을 소개할 틈도 없이 ‘어디서 시작했니? 언제 시작했니? 오늘은 어디로 가니? 언제쯤 산티아고 갈 예정이니?’ 그저 길 위에서 스쳐갔던 수많은 순례자들처럼 순간의 감상과 가벼운 정보를 나누는 이들이라고 생각했다. 남자는 내가 건네는 자잘한 정보들을 듣더니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한다.

“너, 내 가이드북보다 더 많이 알고 있잖아? 여기 내 가방에 들어와. 같이 걷자.”

웃으며 농담을 건네는 것이 재치 있는 사람이다. 여자 둘은 이미 이 마을에 짐을 풀었고, 남자는 한 시간을 더 걸어 다음 마을인 ‘몰리나세카(Molinaseca)’로 향한다고 한다.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 나는 ‘부엔 카미노’로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는 ‘부엔 카미노’를 대신해 나를 안아 번쩍 들어 올려 정신을 쏙 빼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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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고 데 암브로스에서 순례자 숙소를 알려주는 간판 ⓒ JH


재미있는 사람이었지만 너무 말이 많았고, 또 너무 들뜬 느낌이었다. ‘금세 자기 페이스로 사람을 휘말려들게 하는 사람, 함께 있으면 피곤해질 것 같은 사람’. 나는 몇 마디의 평가를 그에게 붙이고는 신나게 체리를 서리하고, 저녁에는 동네 아주머니들과 어울려 잔치를 쫓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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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마을 꽁치잔치 동네 할아버지들로 구성된 악단 ⓒ JH


늦은 오후 동네사람들 속에 끼어 자글자글 장작에 구워진 ‘사르디나(Sardina, 꽁치)’를 빵 위에 척 얹어서 먹고, 비노 틴토(레드 와인)를 마시고 거나하게 취했다. 그리고 숙소를 지키느라 잔치에 오지 못했을 오스피탈레로 아저씨를 위한 음식과 술을 조금 받아 가져왔다. ‘이거 드세요’하는 작은 노트를 남기고 침대에 쓰러져 그대로 잠들었다. 옷이며 피부에까지 진하게 밴 꽁치냄새가 온 숙소에 진동하는 것 같아 조금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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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마을 꽁치잔치 달구어진 철판에 사르디나를 얹어 구워내는 동네사람들 ⓒ JH


다시 시작된 밤은, 익숙한 달콤함으로 녹아들었다.
#산티아고가는길 #카미노데산티아고 #스페인 #성지순례 #도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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