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 속으로 자전거를 밀어 넣다

[자전거 세계일주 37] 멕시코 티후아나

등록 2008.01.01 23:20수정 2008.01.31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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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녀석을 쉽게 잊지 않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 문종성


여행의 매력은 계획된 일탈에 의해 긍정적 자극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새로운 것을 체험한다는 것은 늘 가슴 설레는 환희의 변주곡이다. 여행이라는 단어에는 낭만이라는 감정이 꼬리를 무는 것이 어쩌면 그래서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멕시코 땅을 밟자마자 마리아치(Mariachi)들이 솜브레로(somvrero)를 쓰고 판쵸의를 입으며 기타론(Guitarron, 멕시코 전통 큰 기타)과 비우엘라(Vihuela, 멕시코 전통 작은 기타), 만돌린, 하프 등을 연주하는 모습을 타코(tacos)를 먹으며 여유롭게 감상하리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부푼 감정을 안고 같은 하늘 아래 눈부신 햇살을 받아들이며 사뿐히 넘어온 국경. 수수료 23달러를 주니 여권에 기분 좋게 180일 체류 스탬프가 찍혔다. 단 몇 걸음을 사이에 두고 윗동네와 아랫 동네의 풍경은 극명하게 대조된다. 마치 20년의 시간을 뒤로 걸어온 듯한 느낌이랄까.

드디어 멕시코, 사뿐히 국경을 넘다

보통 치안이 불안한 지역이라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3대 명제가 있다. 항만 지역, 공단 지역, 그리고 국경지역에 위치할수록 그러하다는 불문율이다. 그런데 티후아나(Tijuana)는 이 모든 것을 두루 갖추고 있는 소위 그랜드 슬램 지역이다. 거기에 발전의 속도에 미치지 못하는 삶의 질의 더딘 향상. 도시 외곽으로 갈수록 빈부격차는 확연해진다.

다 무너져 가는 집에 사는 사람들과 마음까지 무너져 생의 의욕을 상실한 듯한 무리의 영혼들. 워낙 주거가 불분명한 노동자들이 밀려드는 통에 나라에서 복지 혜택도 제대로 받을 것 같지는 않다. 불편한 장면을 애써 외면하려고 해보지만 결코 마음의 눈까지 가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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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후아나 국경 미국-멕시코 국경을 빠져 나오는 사람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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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후아나 풍경 국경도시의 이점을 안고 최근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고 있으나 동시에 내륙지역 노동인구 대량이주 등으로 심각한 빈부격차가 발생하기도 한다. 사진 속에 사는 사람은 그래도 나은 편. 도시 내에서도 폐가와 진배없는 곳에서 사는 사람들도 많다. ⓒ 문종성


국경을 두고 샌디에이고와 마주한 티후아나는 마치 변압기 같은 곳이다. 이곳은 단순히 미국과 멕시코의 경계도시가 아니다. 서로 다른 언어와 화폐가 공존하며 급속한 문화충돌의 완충작용을 해내는 곳이다. 또한 미국인들은 부근 지역을 가격이 저렴한 휴양지로, 남미인들은 이곳을 아메리칸 드림을 향한 관문으로 여기고 있다.


새로운 풍경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역시 그들의 표정이다. 눈빛에 기름기를 쫘악 발라놓았는지 느끼함에 눈을 마주치기조차 부담스럽다. 그런데 조금만 비틀어보면 또 그 눈빛이 상당히 얍삽한 사기꾼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근거없는 확신이 생기기도 한다.

멋드러진 올백 머리에 세심하게 다듬은 듯한 콧수염. 칼주름을 잡아 놓은 바지단과 정갈한 빛깔로 스타일을 마무리 하는 구두. 물론 전혀 외관에 신경쓰지 않는 부류들도 많다. 남산만 하게 부른 배를 보면 임산부가 확실한데 시선을 위로 하면 남자인 경우와 개성 강한 집시문화를 표방하며 길거리를 배회하는 듯한 사람은 알고 보면 진짜 거지인 사람도 적지 않다.

그리고 오히려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의 꾸밈새가 그다지 도드라지게 보이지 않은 것은 먹고 살기 바쁜 일반적 전형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얼기설기 놓인 전깃줄처럼 꼬여진 생활같이 보이지만 이들에게도 가슴 속에 깃든 작은 꿈이 있으리라. 그리고 앞으로 이들과 얼마나 조화를 이루며 지내는가가 멕시코 여행의 관건이 되겠다.

'잘해내겠지?'
새로운 물결에 대한 설렘과 낯선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함께 공존한다. 10월 30일. 썸머 타임 해제로 이 주부터 시간이 한 시간 늦어졌다. 그래서 아침과 저녁을 평소보다 한 템포 빨리 잡아당긴다. 100달러 환전을 하니 1000페소 조금 넘게 나온다. 도로 지도를 구입하려 했는데 간단한 전국 도로만 표기되어 있는 책자가 170페소나 한다. 할 수 없이 다음 도시인 멕시칼리에서 구해보기로 하고 포기했다.

드디어 첫 숨을 깊게 들이쉬고 다시 내뱉은 후 페달을 밟고서 도로를 밀쳐 나간다. 새롭게 시작하는 여정이 가장 무거운 짐들을 들고 가는 때다. 가방에 소모품들이 잔뜩 들어있는데 그 중 대부분이 물과 음식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6620km 북미 자전거 대륙 횡단을 완주한 기념으로 LA에서 소형 기타를 후원받았다. 긴 여정에서 외로울 때 가끔 기타 연주로 고독을 달래라는 것이다.

근래에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며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멕시코의 도로 여건이 좋은 편이 아니다. 더구나 티후아나와 멕시칼리를 연결하는 유일한 하이웨이인 2번 도로는 왕복 2차선 구간이다. 그래서 트레일러나 버스 등이 지나갈 때마다 50cm안팎의 자리다툼이 치열하다.

대개는 내가 먼저 피하는 게 상책인지라 자전거를 도로 바깥으로 옮기지만 그마저도 허용되지 않는 협소한 도로에서는 새색시마냥 자전거에서 내려와 다소곳이 정지해 있는다. 그러면 차들이 내 옆을 지나갈 때 속도를 줄여 천천히 지나가게 된다. 거칠 것 같았던 멕시코에서 의외의 모습이다. 다만 개들만이 낯선 방랑자의 퀘퀘한 냄새를 맡고는 철조망을 따라 짖어대며 달려올 뿐이다.

트럭이 전세 내다시피한 도로를 자전거로...

이렇듯 트럭이 거의 전세 내다시피 한 도로를 짐 무게에 휘청거리는 자전거로 가니 들소 떼의 대이동에 거북이가 멋모르고 동참하는 격이다. 그래도 간간이 힘내라고 큰 소리로 격려해 주는 사람들의 반응에 입꼬리는 올라가고 힘이 난다.

나에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드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그 손에 내 손을 얹어 반갑게 인사한 후 그들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를 마주하는 시선으로 나누고 싶지만 아직은 내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지 못했다. 국경도시에서만큼은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람들과의 교제는 적응된 후 다음으로 미룬다.

특별한 일 없이 마실 다니듯 천천히 달린다. 하지만 미 중서부 지역부터 유발된 무릎 통증에 미간이 찌푸려진다. 오른쪽 무릎 바깥뼈 쪽에 계속에서 진통이 찾아왔다. 걸어서는 무릎을 굽히기 힘들 정도다. 거기에 귀까지 말썽이다. 오랜 여행 중에 하루에 몇 시간씩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었으니 무리가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당분간 음악은 귀에 대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무릎의 상태는 점점 악화일로로 치닫는 것 같다.

'아프면 안 되잖아, 이제 또 시작인데. 아프지 말자.'
내 몸을 내가 위로하며 바람을 가른다. 하지만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 제대로 페달질을 할 수가 없다. 평소 100km 가야할 거리를 50km도 채 못 갈 정도로. 물론 해가 짧아졌고, 경사가 오르막이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너무 적은 거리였다. 더구나 요즘 식욕이 좋지 않다.

점심도 사과 3알로 간신히 입맛을 달래 배를 채웠다. 자전거 여행이라면 으레 밑빠진 독과 같은 위를 가지는 게 일반적이어서 많이 먹어도 모자랄 판인데. 별로 배도 고프지 않고 그렇다고 쉬 지치지도 않으니, 갈수록 살은 조금씩 빠지고 이 무슨 일인지. 뭔가 화끈한 먹을거리를 찾지 않는 이상 여행이 아닌 고행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오후였다. 어느 길을 지나가는데 화물트럭들이 멈춰 있었다. 전깃줄이 전봇대에서 풀렸는지 도로에 낮게 내려와 차들이 지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전깃줄 하나에 덩치 큰 화물트럭들이 꼼짝을 못하는 장면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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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 축 늘어진 전깃줄이 육중한 트럭들의 질주를 막아버렸다. ⓒ 문종성


그 옆으로 유유히 지나치는 자전거 족. 바로 앞에 수저와 포크 표시가 그려진 표지판이 있어 휴게소인줄 알고 들어갔다. 그런데 그곳은 조그마한 학교다. 레스토랑 주인인 줄 알았던 사람이 선생님이고 학생 수는 62명이란다. 학교가 파했는지 3명의 학생만이 진지하게 수업을 듣고 있었다.

레스토랑인 줄 알았더니 학교?

하지만 나를 보자 수업은 잠시 중단되었다. 아이들은 교실 밖으로 뛰어나오고 덩달아 선생님도 호기심에 밖으로 나온다. 음료를 하나 사 먹을 요량으로 영어로 물어보았는데 신기한 건 선생님보다 아이가 더 영어를 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화를 나눌 때마다 아이를 쳐다보아야 했다. Eleazar(12)가 통역역할을 한 것이다. 그는 기특하게도 영어와 스페인어 두 가지 모두를 구사할 수 있는 바이링 규얼(bilingual)이었다. 덕분에 선생님이 꺼내준 시원한 콜라를 마실 수 있었다.

짜릿한 청량감에 취해 잠시 쉬고 있는데 셋 중에 가장 어린 아이가 나와의 작별 인사를 한다. 몇 분이나 봤다고. 그런데 마음이 찡해진다. 녀석의 얼굴을 잊고 싶지 않아 '찰칵' 사진 한 장 남긴다. 너무 오래지 않은 시간에 아이를 잊어버리는 이기적인 감정을 갖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이는 사진기를 들이대자 손을 흔든다. 녀석도 헤어짐이 뭔지 어렴풋이 아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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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로윈 데이 아이들이 손수 제작한 인형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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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 후 수업 맨 뒤에 앉은 녀석이 Eleazar다. ⓒ 문종성


'헤어짐을 알더라도 느끼지는 말아라. 이별을 반추한다는 건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에 대한 잔혹한 축복일지니.'
아이에게 마음으로 하는 말이지만 실은 내 안에 남겨진 말이 된다.

잠시 후 시선을 뒤로 하니 육중한 차들이 다시 지나가기 시작한다.
'어찌된 영문이지? 이렇게 빨리 외진 곳으로 복구차가 오나?'

궁금해서 나가보니 세상에! 전깃줄을 자르고 아무렇지 않게 그냥 가 버린 게 아닌가. 황당하기도 하면서 웃음이 나왔다. 운전으로 밥벌이 해야하는 그들로선 성가신 전깃줄 하나 때문에 밥줄이 끊길 수는 없는 노릇. 분명 운전수들 간의 침묵의 카르텔이 있었으리라. 우리 나라에선 좀처럼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 덕분에 뒷 차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모른 채 제 속도를 내며 달린다. 법보다 앞서는 편의주의에 아무도 토를 다는 사람은 없다. 그게 그들의 생각이자 생활인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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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다 앞선 편의주의 전깃줄은 힘없이 짤렸고, 트럭 운전사들은 다시 운행을 재개했다. 이 장면을 본 어느 누구도 '이것이 잘못되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 문종성


이것이 멕시코에서 마주한 첫 에피소드다. 대쪽 같은 원칙보다 유연한 사고로 헤쳐야겠다는 자세와도 일맥상통하니 어쩌면 멕시코와 나, 궁합이 잘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물론 유연함을 가장한 무계획에 더 가까운 자기 변명이겠지만.

트럭은 오징어 먹물 싸듯 짙은 연무를 내뿜으며 훌쩍 달려가고 그 뒤로 배기가스를 뒤집어 쓴 내가 묵묵히 걸어간다. 그러다 트럭의 이동이 뜸해진 틈을 타 다시 안장 위에 오른다. 그제서야 조금은 맘 편히 얼굴에 묻은 온갖 잡스러운 매연들을 바람에 씻겨낸다.

하지만 다시 안장 위에서 내려온다. 저 뒤 편에서 트럭들이 연이어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트럭이 지나갈 때를 맞춰 숨을 꼭 참아본다. 라틴의 공기를 폐부 깊숙히 머금은 채.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뉴스파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뉴스파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입니다.
#세계일주 #비전노마드 #자전거 #멕시코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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