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웠던 몰리나세카에서, 외롭고 그리운 하루를 보내며

[천진난만하게JH, 산티아고 가는 길 30] 리에고 데 암브로스에서 몰리나세카까지

등록 2008.01.01 19:35수정 2008.01.02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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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나세카 옛 다리 아래로 흐르는 강물 ⓒ JH


2007년 7월 21일 토요일, 날씨 구름 그리고 맑음, 순례 29일째.
리에고 데 암브로스에서 몰리나세카까지, 겨우 5km.
오전 8시 출발, 오전 9시 도착.


체리마을을 떠나 한 시간을 채 걷지 못하고 닿은 마을은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길 왼편으로 강물이 흐르고, 그 위로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다리가 놓인 마을. 검은 지붕을 얹은 돌집들이 인상적이었다. 때마침 물가에는 말을 타고 순례하는 이들이 그들의 말을 쉬게 하고 있었다.


흐르는 강물, 옛 다리 아래에서 물을 마시는 말들이 그려낸 한 폭의 풍경에 두 다리는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적어도 아침은 먹고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찾아낸 바에서 일주일만에 집에 전화를 했다. 그리고 강가의 풍경이 좋은 노천 테이블에 짐을 풀고 카페 콘 레체와 크로와상을 시켜 들고 왔다. 여행 30여일, 드디어 빵에 버터를 잔뜩 발라먹기 시작한 것을 보니 적응이 되었나보다.

아침을 거의 마쳤을 무렵, 어제 묵은 마을에서 만난 두 여자를 다시 만났다. 테이블을 합석하여 그녀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세나와 인드라는 독일의 치과병원에서 일하는 친구였다. 전부터 친구였던 두 사람은 함께 순례를 시작했다.

“어제 지내기엔 어땠니?”
“우리가 묵은 펜션 바로 앞에서 잔치를 하느라고 너무 시끄러워서 혼났어!”


내가 신나게 꽁치를 해치우고 있던 사이, 그녀들은 그 근처의 펜션에서 괴로운 밤을 보내고 있었나보다. 몇 가지 정보를 얻고, 또 오늘 걸을 길을 함께 짚어보며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짐을 챙겨 함께 걸으려는데, 발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떠나는 것이 아쉬웠다.

“미안한데, 나 저 위의 성당 갔다가 가려고 하거든. 먼저 가. 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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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나세카에서 마을 성당의 외관 ⓒ JH


그리고 도착한 마을 위의 성당은 혼배미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방문자들을 맞이하는 아주머니는 걸레로 성당 바닥을 청소하느라 바쁘다. 통로에는 붉은 양탄자가 깔리고, 의자에는 예쁜 꽃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잠시 앉아서 성호를 긋고 기도를 한다.

‘오늘 어떻게 해야 할까요? 5km는 좀 심하죠? 그동안 많이 쉬었는데.’

걷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아주머니가 순례자 여권에 찍어주신 도장을 받고 광주리에 든 사탕 하나를 집었다. ‘이제 걸으려면 단 것이 필요해’, 꿀 사탕 껍질을 벗겨 입에 쏙 넣고 걷기 시작했다. 길게 이어진 좁은 골목을 따라 탄성을 내지르며 걸어 내려갔다. 어쩜 이렇게 예쁘지? 그리고 좁은 골목이 끝나고 큰 길과 이어지는 한 가운데의 순례자 동상을 비켜가는 순간 누군가 나를 불렀다.

“너 어제 앞마을에서 묵었던 애 아냐?”

어제 예상치 못한 작별인사로 나를 아연실색케 한 이였다. 아니, 이상하다? 지금은 오전 10시를 넘긴 시간, 분명 어제 이곳에서 묵었다면 벌써 출발하고도 남는 시간인데….

“너 어떻게 된 거야? 어제 여기서 묵는다고 했잖아?”
“맞아. 어제 여기서 하루 지냈어. 근데 이 마을이 너무 좋아서 일일 오스피탈레로 되기로 하고 하루 더 묵기로 했지.”
“진짜? 나 이제 겨우 한 시간 걸었는데 여기 너무 예뻐서, 계속 걸을지 아님 여기서 쉴지 고민하고 있는데…. 어쩜 좋지.”
“아직 못 정했어? 그럼 우리 여기서 차 마실 생각인데 같이 차 마시면서 생각해 봐.”
“어…. 이럼 안 되는데….”


어느새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탐스러운 해바라기가 꽂혀있는 유리컵이 놓인 노천 테이블에 짐을 비스듬히 두고 앉았다. 그리고 그제야 서로 이름을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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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나세카에서 탐스러운 해바라기와 홍차 한 잔 ⓒ JH



“나는 호르케야.”
“내 이름은 여기 지팡이에 새긴 대로 지형이야. 그렇지만 쉽게 지라고 불러도 좋아.”


그리고 이름을 잊고야 만,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스페인 언니와 함께 세 사람이 마주앉았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그녀와 대화할 때는 스페인어를 쓰는 것 같은데? 독일사람 아니었나?

“우리 스페인 사람이야!”
“너 독일 사람들과 독일어로 대화하고 있었잖아. 게다가 네가 갖고 있던 책, 독일어 가이드북 아냐?”
“맞아. 나 독일어도 할 수 있거든.”


처음으로 만난, 영어가 유창하고 독일어도 할 수 있는 스페인 사람이었다. 신기했다. 지금까지 순례 가운데에서는 스페인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참 어려웠다. 어쩌면 내가 애초에 말이 통하지 않으면 대화를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인지도 모를 테지만, 현실적으로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례 초반에 만난 크리스티나, 그리고 세르지가 전부였다.

그이들은 스페인어로 한참을 이야기했다. 중간중간 호르케가 “교육학과 심리학에 대해 얘기하는 중이야. 그녀가 교사거든”하는 식으로 통역하는 덕에 이야기의 맥락을 잡을 수 있었다. 가끔 익숙한 학자 이름이며 단어가 들렸지만 대화에 끼어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야기가 통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적당히 우러난 ‘떼(Te, 차)’ 주전자를 들어 잔에 따랐다. 붉고 맑은 빛이 도는 홍차의 맛은 수수했다.

한 시간쯤을 노천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그이들은 마을을 둘러보기 위해 움직였고 나는 짐을 풀기 위해 순례자 숙소로 향했다. 괜찮으면 같이 가자고 권하는 것을 무거운 짐과 갑작스러운 피로감에 고사하고 말았다. 도착한 숙소는 새로 지어진 깔끔한 건물로 오래간만의 단층침대였다. 자리를 잡은 침대 위 지붕에 난 작은 사각 창으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대충 짐을 기대놓고 펼쳐놓은 침낭 위에 그대로 누워 네모난 햇빛조각 아래 몸을 웅크리고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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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나세카 순례자 숙소의 모습 ⓒ JH


문득 서늘함에 잠에서 깨었다. 얼굴을 간질이던 햇빛은 먼발치로 달아난 후였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주위는 빈 침대가 더 많았다. 입고 있는 옷소매의 솔기가 다 떨어져, 침대에 앉아 바늘에 실을 꿰어 열심히 바느질을 했다. 시계는 2시를 넘겨 마을은 시에스타에 빠져들고, 무엇을 할까 하다가 걸음을 멈추게 만든 강가로 가 보자고 결정했다. 가방 속에 몇 가지 먹을거리를 넣고 길을 나섰다.

이 마을의 중심에는 강이 흐르고 그 위로 거대한 돌다리가 멋들어지게 놓여 있다. 그리고 다리 아래로 강물을 살짝 가두어 자연 수영장을 만들어놓았다. 여름치고는 너무 추워 쉽게 물로 뛰어들기가 어려웠다. 양편으로는 잔디가 곱게 자라 있어 사람들은 큰 타월을 깔고 수영복 차림으로 누워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많은 식당과 몇 개의 상점들이 모여 있어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이다.

그리고 한쪽에는 작은 수로에 물을 흘려보내 발목을 담그기 알맞게 만들어져 있었다. ‘수영은 할 수 없더라도 발목은 담궈 봐야지.’ 나는 곧 신발을 벗고 발목을 담갔다. ‘차가워!’ 비명이 절로 나오는 시큰한 기분이었다. 곧 익숙해져 수로를 따라 걸으며 물장난을 하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가방 속 빵을 꺼내 꿀에 찍어먹으며 글을 쓰고, 분주하게 오고가는 순례자들을 쳐다보았다.

“누나, 여기 계시네요?”

며칠 전 라바날에서 만난 현도씨였다. 오늘 아침 일찍 순례자의 집을 출발해 그동안 함께 걸었던 친구들을 다시 만났다고 한다. 한 무리의 순례자들과 악수를 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저요? 수영 방금 했죠.” 이렇게 추운 날씨인데도 현도씨는 친구들과 수영을 하며 즐거웠다고 함박웃음을 짓는다. 그들은 걸음을 이어갈 생각이란다. 기회가 되면 또 만나자고 하고 안녕을 전했다.

곧 자리를 털고 마을구경을 나섰다. 이리저리 골목을 쏘다니다 어느 폐가 지붕에 빼꼼 고개를 내민 고양이를 만났다. 궁금한 마음에 돌벽을 기어올라 철창에 기댄 채로 지붕을 살펴보았더니 새끼고양이 몇 마리가 웅크리고 있었고 어미가 그이들을 지키고 있었다. ‘치치치’, ‘이거 줄게 와서 먹어’ 등 다양한 꾐으로 유혹해도…, 그들은 역시 고양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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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가는 길 몰리나세카 펜션에 붙은 귀여운 약식지도 ⓒ JH



30여분을 그렇게 아이들과 놀다 ‘싫으면 말고, 흥!’하고는 풀쩍 철창을 뛰어 내려왔다. 숙소에 돌아와 책장에 꽂혀 있던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세피아 표지의 남자아이의 눈빛에서 알 수 없는 끌림을 느꼈다. <Angela's Ashes>, 몇 장 들춰보니 흥미가 생겼다. 그렇게 책장 아래의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너, 이 책 읽는구나?”
“책장에서 찾았어. 겨우 이만큼 읽은 걸.”


아침에 만났던 호르케가 소파 옆에 앉으며 이야기를 건넨다. 그는 이 책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를 보았다며 중간쯤 믿을 수 없을 만큼 슬픈 이야기가 나온다고 했다. 아주 감동적이었다고 말하는 그의 눈빛과 표지의 남자아이의 것이 겹쳐졌다. ‘대체 어떤 거길래?’ 호기심이 일었다. 나는 책을 챙겨 방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침대에 엎드려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다 곧 반갑지 않은 생각들이 뭉게뭉게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날 저녁은 고르고 고른 식당 한 군데에서 성의 없는 볼로냐식 파스타와 튀긴 닭 날개 요리, 그리고 디저트로 아로즈 콘 레체를 억지로 부탁해 먹었다. 병째 나온 비노가 반가운 마음에 반 병을 조금 넘기게 마시다 ‘더 이상은 안 돼!’하고 말았다. 점점 술이 늘어간다.

쉼이 과하면 잊었던 불안들이 하나하나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홀로인 것이 더 뼈저리게 느껴진다. 어쩌면 홀로 기울인 술병은 다시 찾아들기 시작한 외로움과 불안을 잊기 위해서인지 모른다. 문득 아침에 무심코 눌렀던 셔터에 맺힌 나의 얼굴이 익숙한 누군가와 퍽 닮았다고 생각하며 소스라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라바날, 떠나온 곳, 모든 것이 그리웠다. 그렇다고 넘어온 산을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떠나기 전날 밤 나를 꼭 안아주셨던 신부님의 모습을 일기장에 엉성하게 그리며 ‘호르케 신부님’하고 이름을 써 보았다. 문득 그 분의 이름과 오늘 만난 남자아이의 이름이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묘한 인연이었다.

아름다웠던 몰리나세카에서의 외롭고 그리운 밤이 잦아든다. 쉬이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며 바라본 침대 위로 난 작은 창에는 드문드문 별들이 명멸하고 있었다.
#산티아고가는길 #도보여행 #스페인 #성지순례 #카미노데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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