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불의 심판 - 71회

조국의 부름 - 6

등록 2008.01.04 13:41수정 2008.01.04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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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장이 인질의 안전에 최선을 다하라고 몇 번을 되새기며 말한 건 뭐죠?”

“그건 말 뿐이야. 그리고 우리 대원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도 다 알아듣고.”

“…….”

“워싱턴에서 우리에게 작전을 걸었다는 건 인질의 생사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겠단 뜻이야. 정치인들은 말이지, 공개적으로야 인질들의 안전에 최우선을 둔다고 떠벌리지만 사실은 인질범에 대한 응징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야. 그들에겐 몇 사람의 목숨보다는 대의명분이 더 중요하거든. 인질범이나 테러범과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타협하지 않고 단호하게 대처한다, 뭐 그런 거.”

 

문득 원용철의 가슴이 분노로 뜨겁게 타올랐다. 터무니없이 무책임하기만 한 정치인들의 명분 타령에 치가 떨리는 것이었다. 그는 어금니를 힘껏 깨물었다.

 

“오로지 인질의 안전에만 신경을 쓰다간 작전을 망치는 건 둘째 치고 오히려 대원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어. 인질의 안전이란 건 작전에서 필수 사항은 아냐. 그러니까 너무 깊게 생각하지는 마. 인질을 위해 우리 목숨을 버릴 순 없잖아?”

 

보리에스가 원용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하지만 그의 뇌리엔 인질범에게 금발을 잡힌 채 권총으로 머리를 맞아가며 부들부들 떨고 있던 백인 여성의 얼굴이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어느덧 훈련과 작전의 쳇바퀴를 돌아 5년의 계약기간이 종료되었다. 둘은 주저하지 않고 재계약서에 사인했다. 어차피 한국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고, 그렇다고 미국 사회에서 생활한다는 것도 못내 저어되었다.

 

둘은 일상을 벗어난다는 데 대하여 일말의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이미 밀항할 당시의 비장했던 각오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오히려 남들에겐 특별하게 여겨질 버뮤다의 생활이 일상처럼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로부터도 다시 3년이란 세월이 쏜살처럼 지나갔다. 둘은 이제 내로라하는 버뮤다의 베테랑이 되어 있었다. 그동안 참가한 작전만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미합중국이 적성국가에 선전포고를 한 후 대대적인 폭격을 가하고 나면 최초의 지상군으로 투입되기도 했고, 또한 비밀리에 다른 나라의 내전에 개입하여 반군을 지원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저격수의 임무를 띠고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가 요인을 암살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정의와 평화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거기엔 언제나 미합중국의 이익이 도사리고 있었다. 곧, '미국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정의와 평화다'라는 공식이 자연스럽게 도출되었다. 그러자 우스꽝스럽게도 ‘역전파’ 보스의 말이 원용철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한다. 그리고 여러분도 평화를 사랑할 것이다.” T시에 새로 들어선 극장에서 사장과 종업원들을 불러놓고 보스가 한 말이었다. 그 다음부터 안전관리비란 명목의 세금이 꼬박꼬박 들어왔다.

 

‘그러므로 미합중국은 깡패 국가다. 그리고 버뮤다는 행동대원이다’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원용철이 가지고 있던 미국에 대한 환상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자유의 여신상을 앞장세우고는 추잡스럽게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삥이나 터는 꼴이라니, 쯧쯧.’ 그는 보리에스가 걸핏하면 스스로를 미국의 개라고 말하던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한종국을 보게 된 것은 그 즈음이었다. 당시 한국에선 북한 특수부대인 124군 요원들의 무장 남파 사건이 있었다. 강원도 산간지대로 침투해 온 그들은 결국 철원쯤에서 전원 사살되었는데 시신에서 청와대에 이르는 지도가 발견된 것이었다. 이에 분개한 대통령은 북한의 124군을 능가하는 특수부대를 만들라고 전격 지시했다. 그래서 국방부와 정보기관은 3138군의 창설을 서둘렀고, 그 일환이 유능한 현역 장교들을 세계의 유수한 특수부대에 위탁교육 보낸 것이었다.

 

당시 갓 진급한 공수부대 한종국 대위는 1년간의 교육을 받을 곳으로 버뮤다를 자원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신병과 마찬가지로 4개월간의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측정 결과와는 상관없이 정예요원들만 차출되는 제1중대에 배속되었다. 차운형과 원용철의 소속중대라는 이유로 버뮤다에서 특별 배려를 한 것이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그것도 버뮤다라는 아주 특별한 장소에서 동포를 만난다는 것은 무척 가슴 벅찬 일이었다. 세 사람은 본능적으로 동포애를 느끼고 이내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여섯 살 많은 한종국은 형이 되고 차운형과 원용철은 동생이 되어 서로를 위무(慰撫)해 주었다.

 

일과시간엔 둘이 한종국의 사수 노릇을 자처하며 이제껏 쌓은 노하우를 아낌없이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주말이면 텍사스촌에 내려가 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향수를 달래기도 했다. 이 뿐만 아니라 1년에 한번 주어진 휴가 때는 동부의 플로리다까지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한종국이 위탁교육을 이수하는 동안 다행인지 불행인지 버뮤다 외인부대엔 작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못내 아쉬워하며 귀국길에 올랐다.

 

“군인은 누가 뭐라 해도 실전경험이 풍부해야 하는 건데 말이야. 너무 아쉽군. 여하튼 내 돌아가서 여건만 되면 부를게. 조국은 동생들을 꼭 필요로 할 거야.”

 

그리고 3개월 만에 소식이 왔다. 한종국은 3138군 부대장이 상부의 허가를 득하여 강철민 사건을 종결시켰으니 아무 걱정 말고 귀국하라고 했다. 그러면 별다른 절차를 거치지 않고 곧장 소위로 임관된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그는 미국의 이익에 앞장서는 용병보다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복무하는 국군의 길을 가자고 거듭 당부했다.

 

한종국의 연락을 받고 둘은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원용철은 ‘과연 국가와 민족을 위해 멸사봉공할 자격이나 있는지’ 자괴감에 휩싸여 있었다. 반면 차운형은 연봉의 차이가 현격하고, 아울러 시민권도 포기해야 한다는 것에 마음을 다잡지 못했다. 그러자 괜히 ‘조국이 우리에게 해 준 게 뭐가 있어 멸사봉공하러 간단 말인가?’ 하는 억하심정까지 일었다.

 

“어떡할 거냐?”

원용철이 물었다.

“넌, 어떡할 건데?”

도리어 차운형이 반문했다.

“언제까지 미국 땅에서 살 순 없잖아?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오겠어? 귀국해야지.” 

“야, 소위 봉급하고 우리가 지금 받는 것하고 비교가 되냐? 그리고 시민권은 아예 포기할 거야?”

 

차운형이 억울하다는 듯 원용철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원용철은 말없이 머리만 주억거렸다.

“에이, 씨팔! 그럼 어떡하냐? 나도 가야지.”

 

둘은 재계약 기간이 아직 1년이나 남아 있어 당장 귀국하기는 어렵다고 한종국에게 연락했다. 그러자 한국에서 직접 워싱턴에 협조요청을 했는지 버뮤다 외인부대장이 전격적으로 제대를 허가해 주었다. 둘은 9년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전우들과의 이별을 못내 아쉬워하며 보잉 747기에 몸을 실었다.

 

이윽고 보잉 747기가 고국의 상공에 진입하자 차운형과 원용철은 줄행랑치듯 인천항을 빠져나가던 당시를 회상하며 문득 감회에 젖었다. 금의환향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국의 부름을 받고 돌아왔다는 자긍심이 가슴을 뿌듯하게 했다. 둘은 국제선 청사에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던 한종국과 굳게 포옹하는 것으로 재회의 기쁨을 나타냈다. 그러고는 공항 밖으로 나와 검정색 세단을 타고 서울로 향했다.

2008.01.04 13:41 ⓒ 2008 OhmyNews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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