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불의 심판 - 74회

불의 심판 - 3

등록 2008.01.09 09:27수정 2008.01.09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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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은 박만규의 구형 소나타를 타고 무영산으로 출발했다. 무영산은 T시에서 남쪽으로 30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구형 소나타는 천안까지 경부고속도로를 달리고 이후엔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한참을 내려갔다. 가는 도중에 오르막이라도 만나면 여름 막바지 더위가 아무리 맹렬하다 해도 구형 소나타는 에어컨을 끄고 차창을 열어야만 했다. 그렇잖으면 늙은 망아지마냥 금방이라도 퍼질 것처럼 헥헥거렸다.

 

이윽고 무영산 초입에 다다르자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장관이었다. 노을이 마치 용광로에서 금방 토해진 쇳물처럼 무척 붉었다. 더욱이 노을에 등을 기댄 웅장하고도 수려한 산세는 가히 압권이었다. 직접 무영산을 목격하고 나서야 수많은 종교인들과 무속인들이 왜 영산(靈山)으로 받들며 끊임없이 입산하는지를 알 것 같았다.

 

박만규가 ‘무영초막’이라고 상호를 걸어놓은 조그마한 가게 앞에 차를 세웠다. 상호 바로 밑엔 ‘창세교 도량 전방 1.5㎞’라는 푯말이 붙어있었다. 차에서 내린 박만규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고, 김성호와 차운형은 나무그늘 아래 평상에 걸터앉았다.

 

“어서 오세요.”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팬 노인이 선풍기를 틀어 놓은 채 러닝셔츠 바람으로 앉아있었다. 박만규는 좁은 가게 안을 휘 둘러본 다음 얼음과자와 캔 맥주, 그리고 안주거리를 집어 들고 셈을 치렀다.

 

“이거 완전히 피서 온 기분이구만?”

김성호가 트림을 꺽 하고는 유쾌하게 말했다. 차운형과 박만규는 아직도 캔 맥주 하나를 잡고 있는데 김성호는 벌써 세 개나 먹어치운 상태였다. 그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더니 이번에는 소주를 사가지고 나왔다.

 

“맥주는 싱거워서 못 마시겠어.”

“아니, 출장 나와서 이렇게 마시면 어떡하려구요?”

박만규가 차운형의 눈치를 살피며 핀잔했다. 그러자 김성호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가게 노인이 양은냄비를 들고서 바로 뒤따라 나오고 있었다.

 

“어휴, 손님. 소주 안주로 할 만한 게 없어요. 집에서 먹던 김치찌갠데 입에 맞으려나 몰라?”

“어이쿠, 이 정도면 소주 한 박스도 마시겠는걸요? 어르신, 고맙습니다. 이리 앉으시죠? 제가 술 한 잔 드리겠습니다.”

 

노인은 심심하던 차였는지 김성호의 말에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평상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김성호가 부어주는 술을 아주 감칠맛 나게 마셨다.

 

어느덧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자 바람이 제법 서늘하게 불어왔다. 그리고 인적이 끊긴 고즈넉함을 달래 듯 매미 울음소리가 힘차게 들렸다. 술자리의 운치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 손님들은 어디서 온 양반들이요?”

노인은 이제 술자리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서울에서 출장 왔는데요. 시간이 난 김에 무영산 경치나 구경하려고요.”

“이쪽으로는 사람들이 잘 안 오고 반대편 서갑사 쪽으로 사람들이 많이 가는데?”

 

김성호가 둘러대는 말을 곧이듣고 노인이 무영산의 등반 코스는 따로 있다며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덧붙여 이쪽 길은 주말이나 휴일에 창세교 성도들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이 찾는다고 말해 주었다.

 

“어휴, 몰랐네요? 그냥 길 따라 오다보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오늘은 그냥 술이나 마시고 다음에 출장 다시 오면 서갑사 쪽으로 가봐야겠네요. 쩝.”

김성호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할머니는 안 계신가요?”

차운형도 이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가 노인에게 술을 권하며 물었다.

“할망구는 저기 위에 있어요.”

“위라뇨?”

 

“창세교 도량에 가 있다니까?”

“거기서 뭐하시는데요?”

“뭐하긴? 성도지요.”

“근데 어르신은 거기 안 가세요?”

“나는 그런 거 안 좋아해.”

노인이 소주 한 잔을 마시고는 계속 말했다.

 

“처음엔 할망구도 다니지 못하게 다리몽둥이를 몇 번 분질렀지. 그래도 악착같이 다니는 거예요. 종교란 게 그렇게 쉽게 단념되지 않잖아요? 그래서 할망구 얼굴이나 자주 보려고 여기로 이사를 온 게죠.”

“창세교가 뭐 믿는 덴가요?”

“하나님 믿는 데지.”

 

“창세교라는 건 처음 들어보는 종교인데요?”

“창세교가 뭐하는 덴가 하면 말이죠.”

김성호가 어수룩하게 물어보며 말문을 유도하자 노인이 천천히 담배를 피워 물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 키부츠 같은 공동체예요. 성도들은 출가를 한 채로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기다린다는데 내가 보기엔 그게 종말론이지 무슨….”

 

“종말론 같은 거 내세우는 종교는 사이비 아닌가요?”

“사이비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교인들 돈 뜯어내고 감금하고 하는 데는 아니더구먼요. 작년에 도량 안으로 들어가 봤는데 분위기도 좋고 그래요.”

 

작년 늦가을이었다. 추수를 끝낸 유휴기를 맞아 창세교 교수가 성도들의 가족을 도량으로 초대한 적이 있었다. 천주교나 불교처럼 출가를 하는 종교라 가족들의 걱정이 없지 않을 거라는 배려 차원이었다.

 

그 얘기를 부인에게 처음 들었을 때 노인은 시큰둥했었다.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지,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초입에 살고 있으면서도 막상 도량에는 단 한 번도 올라가 본 적이 없었다. 노인은 할멈이 어떻게 생활하나 궁금하기도 해서 못이기는 척하며 초대에 응했다.

 

검정색 사제복(司祭服)을 입은 남자가 도량에서 용달차를 몰고 내려왔다. 그는 가게 안으로 들어와 노인을 보고 “창세!”하며 합장 인사를 했다. 노인 역시 “창세!”로 화답하고는 가게 문을 잠그고 차에 올랐다. 도량까지의 1.5㎞ 진입로는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있어 차량 출입이 수월했다.

 

도량 정문은 마치 중세 수도원의 철문을 연상시킬 만큼 육중했고, 안으로 제법 너른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군데군데 철봉, 평행봉 따위가 설치되어 있고 양옆으로 골대가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운동장인 것 같았다. 그리고 정면으로는 울창한 삼림을 병풍처럼 두르고 붉은 벽돌건물 세 동이 나지막이 앉아 있었는데 우측 동은 여자 성도 숙소, 좌측 동은 남자 성도 숙소, 중앙은 본관이라고 남자가 설명해 주었다.

 

2008.01.09 09:27 ⓒ 2008 OhmyNews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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