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불의 심판 - 77회

불의 심판 - 6

등록 2008.01.12 11:13수정 2008.01.12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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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는 아예 무대폽니다.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잡아떼던데요? 원용철도 모르고 심지어는 한형우도 모른답니다.”

김성호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게 확실한 증거구만! 이번 일에 교수가 분명 연루되어 있다는 증거야!”

윤명오가 두 눈을 반짝거렸다. 차운형과 요원들이 멍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생각해봐. 뻔히 다 알고 있는 사실까지 발뺌을 한다는 건 바로 이런 거야. 부정의 부정, 즉 아주 강한 부정은 차라리 긍정이다.”

“여기서 그게 통하는 논린가?"

김성호가 머리를 긁적이는 동안 다른 요원들은 윤명오의 입에다 시선을 주고 있었다.

 

“이인철의 입을 열지 못한다면 교무들의 입이라도 열어야 해. 뭔가 숨기는 듯한 천명석을 한번 집중적으로 공략해봐.”

“어떻게요?”

박만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머리를 맞대고 찾아봐야지.”

 

윤명오가 바쁜 일이 있다며 먼저 퇴근하자 요원들은 자장면을 시켜놓고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하지만 천명석의 입을 열게 할 비책이 쉽사리 떠오를 리 만무했다.

“플리바기닝(Plea Bargaining) 어때요?”

 

자장면 한 젓가락을 입에 넣다 말고 서인혁이 말했다. 피의자가 범행을 자백할 경우 형량을 낮춰주는 이른바 유죄협상제도가 바로 플리바기닝(Plea Bargaining)이었다.

“천명석이 범행에 관련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김칫국부터 마시는 거 아닐까? 그리고 우리나라엔 아직 도입되지도 않은 제도인데?”

이영국이 부정적으로 말했다.

 

“천명석이 확실하게 죄가 있다면야 까짓 거 음성거래인들 못하겠어? 문제는 그가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지를 장담할 수 없으니까 탈이지.”

김성호가 소주잔을 기울이며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자 박만규가 입가에 자장을 잔뜩 묻힌 채 좌중을 둘러보았다.

 

“차라리 공갈을 한번 쳐보는 게 어떨까요?”

“공갈?”

“계속 모르쇠로 일관하면 교수와 공범으로 몰릴 가능성이 크다고 말이죠.”

“그거 괜찮겠군.”

김성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음날 김성호와 박만규는 아침 일찍 조사실로 천명석을 불렀다. 깡마른 얼굴에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천명석은 무척 못마땅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박만규가 자리에 앉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

“담배 피우세요?”

김성호가 심기를 건드리는 질문을 하여도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천명석 교무님. 무조건 진술을 거부한다고 해서 불리해지지 않는 건 아닙니다. 그것도 상황에 따라 다른 거죠.”

박만규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천명석은 여전히 불편한 얼굴로 다른 곳에 시선을 던져두고 있었다.

 

“이인철 교수님은 확실하게 원용철과 공범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니까 계속 진술을 거부하시면 교무님도 공범이라는 심증만 더해줄 뿐입니다.”

“헛소리 하지 마시오!”

갑자기 천명석이 눈을 부라리며 민감하게 반응했다.

 

“어제 계속 부인만 하던 교수님이 실수로 그만 결정적인 진술을 하고 말았습니다.”

김성호가 재빨리 부연하자 천명석은 다시 관심 없다는 듯 엉뚱한 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른 교무들은 이번 사건과 무관하다는 것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원용철이고 킬러고 간에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 거짓말 탐지기 조사로 확인되었습니다.”

 

김성호가 내친김에 한술 더 떠 말했다. 하지만 천명석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은 천 교무님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교무들과 달리 천 교무님은 교수의 최측근이기 때문에 이번 사건과 실제 연관이 있든 없든 간에 공범으로 인정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박만규가 말하자 천명석의 얼굴이 잠시 실룩거렸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김성호가 덧붙였다.

“잘 생각해 보세요. 정말 죄가 있다면 억울할 게 없지만, 죄가 없는데도 연쇄살인 공범으로 몰린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김성호와 박만규는 걱정해주는 듯 말하고 먼저 조사실을 나와 버렸다. 천명석이 자발적으로 진술하지 않는 이상 이제 조사는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유치장으로 돌아온 천명석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골치가 아팠다. 그냥 뻗대기만 하면 풀려나겠거니 했는데 상황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하려고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명상에 잠기지는 않고 자꾸만 수사관들의 이야기가 뇌리를 스쳤다. 천명석은 관식(官食)엔 입도 대지 않고 기도를 하며 온종일을 보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다시피 했는데도 여전히 고민은 정리되지 않았다. 다른 교무들은 무죄로 풀려나고 자신은 공범으로 법정에 선다는 수사관의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닌 것 같았다. 물론 다른 교무들과 자신이 똑같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 해도 교수와 공범으로 취급받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억울했다. 수사관의 말처럼 죄를 짓고 벌을 받는다면 덜 억울하겠지만 그가 지은 죄라면 다만 교수의 계략을 알고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천명석은 이제 가부좌를 풀고 유치장 바닥을 뒹굴었다. 아침식사로 나온 관식도 입에 대지 않자 경찰관이 식사를 하다말고 “어디 아프세요? 하고 물어왔다. 꼬박 하루를 굶은 셈이었다. 혹시 단식이라도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단식하는 거 아니니까 괜한 걱정 말아요.”

천명석의 말에 경찰관이 다시 수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다른 유치인들은 책을 보거나 잠을 자면서 시간을 보낼 때 천명석은 바닥을 전전하며 몸을 뒤적였다. 그의 고민은 공범으로 몰린다는 것에서 어느덧 창세교의 교권에 관한 문제로 옮아가 있었다. 이제껏 교수를 보좌하는 데 신경 쓰느라 교권에 대해서는 고민해 본 적도 없었지만, 만약 교수가 구속된다면 누군가가 교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 것이었다.

2008.01.12 11:13 ⓒ 2008 OhmyNews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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