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 유학산에 내린 평화의 흰눈

자연이 가르쳐주는 인간다운 삶

등록 2008.01.14 09:03수정 2008.01.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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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산에 눈이 내렸다. 유학산은 안동, 대구, 왜관으로 가는 삼거리에 있다. 유학산에서 왜관과 대구까지 가는 데에는 자동차로 대략 20분 걸린다. 안동까지는 멀지만 대구와 왜관, 즉 낙동강과는 너무나 가깝다. 

 

위치가 그런 까닭에 유학산은 1950년 당시 3년에 걸친 전쟁 전체로 쳐도 1-2위를 다툴 만큼 치열한 격전지가 되었다. 누가 유학산을 점령하느냐에 따라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학산 바로 아래에 있는 다부동 전적 기념관에서 방문객들에게 나눠주는 리플릿을 읽어본다.   

 

1950년 8월 5일, 낙동강을 도하한 북한군은 주력인 제13사단, 3사단, 1사단, 15사단 등 군단 병력(2만1천여 명)을 다부동 일대에 투입해 호시탐탐 대구 점령을 노렸고, 백선엽 장군의 국군 제1사단과 미 제27연대가 적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8천2백여 명의 병력으로 맞섰다. (중략) 8월 13일부터는 12일간 정상 주인이 15번이나 바뀌는 328고지(포남리) 전투와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내었던 837고지(학산리) 탈환전 등 55일간 전투가 계속된 다부동 전투는 6·25 전쟁 중에서 최대의 격전지였으며, 이 전투에서 적은 1만7천5백여 명의 사상자가 났고 아군도 1만여 명 희생되었다. (하략) -전적기념관 리플릿 중―

 

a 유학산에 눈이 내렸다. 산비탈을 타고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학산리에 닿는다. 그러나 그것은 사진으로만 가능할 뿐 실제로 그렇게 등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경사가 너무나 심해 길이 없다. 사진으로 저 멀리 대구로 가는 고개가 보인다. 유학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이 산이 어째서 한국전쟁 다시 최대의 격전지가 되었는지 대뜸 짐작할 수 있다.

유학산에 눈이 내렸다. 산비탈을 타고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학산리에 닿는다. 그러나 그것은 사진으로만 가능할 뿐 실제로 그렇게 등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경사가 너무나 심해 길이 없다. 사진으로 저 멀리 대구로 가는 고개가 보인다. 유학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이 산이 어째서 한국전쟁 다시 최대의 격전지가 되었는지 대뜸 짐작할 수 있다. ⓒ 정만진

▲ 유학산에 눈이 내렸다. 산비탈을 타고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학산리에 닿는다. 그러나 그것은 사진으로만 가능할 뿐 실제로 그렇게 등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경사가 너무나 심해 길이 없다. 사진으로 저 멀리 대구로 가는 고개가 보인다. 유학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이 산이 어째서 한국전쟁 다시 최대의 격전지가 되었는지 대뜸 짐작할 수 있다. ⓒ 정만진
a 유학산 오른쪽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유학산에 올라 왼쪽으로 보면 대구로 가는 고개가 보이고, 오른쪽으로 보면 왜관과 낙동강이 보인다. 낙동강을 넘어 대구로 진격하려던 북한군은 어떻게든 유학산을 점령하려 했지만, 기필코 방어선을 지켜야 하는 국군으로서는 유학산은 결코 빼앗겨서는 안 되는 절체절명의 요충지였다.

유학산 오른쪽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유학산에 올라 왼쪽으로 보면 대구로 가는 고개가 보이고, 오른쪽으로 보면 왜관과 낙동강이 보인다. 낙동강을 넘어 대구로 진격하려던 북한군은 어떻게든 유학산을 점령하려 했지만, 기필코 방어선을 지켜야 하는 국군으로서는 유학산은 결코 빼앗겨서는 안 되는 절체절명의 요충지였다. ⓒ 정만진

▲ 유학산 오른쪽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유학산에 올라 왼쪽으로 보면 대구로 가는 고개가 보이고, 오른쪽으로 보면 왜관과 낙동강이 보인다. 낙동강을 넘어 대구로 진격하려던 북한군은 어떻게든 유학산을 점령하려 했지만, 기필코 방어선을 지켜야 하는 국군으로서는 유학산은 결코 빼앗겨서는 안 되는 절체절명의 요충지였다. ⓒ 정만진
 
다부동 전적기념관에서 출발하여 유학산 정상(839m)까지는 대략 4.7km이다. 839고지에서 다부동 전적기념관 반대편인 도봉사를 거쳐 도로까지 내려가는 하산길이 약 1.3km 가량 되니 모두 합하면 전체 거리는 6km 정도 된다. 보통 사람이 걸어서 한 시간에 갈 수 있는 거리가 약 4km이니 다부동 전적기념관에서 유학산 839고지까지 등산한 후 하산을 마치는 데에는 모두 세 시간 걸린다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하지만 실제로 걸어보면 유학산은 그보다도 좀 더 많은 시간을 등산객에게 요구한다. 경사가 상당히 가파른 까닭이다. 게다가 오늘(2008년 1월 13일)은 하얗게 내린 눈이 산등성이에 그대로 쌓여 있었으므로 시간은 훨씬 더 소요되었다. 그뿐인가, 손에 사진기를 들고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을 쏟고 있었으니 유학산 눈길 등반은 이래저래 '세월아 네월아'가 될 수밖에 없었다.
 
a 839고지에서 돌아본 풍경 유학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839고지이다. 그냥 '정상'이라 하지 않고 '고지'라 부르는 것은 유학산이 그냥 등산을 즐기면 되는 보통의 산이 아니라 1950년의 격전지이기 때문이다. 839고지 정상에는 '유학정'이라는 정자가 세워져 있다. 정자에 올라 지금껏 걸어온 등산로를 돌아보면 820고지, 674고지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839고지에서 돌아본 풍경 유학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839고지이다. 그냥 '정상'이라 하지 않고 '고지'라 부르는 것은 유학산이 그냥 등산을 즐기면 되는 보통의 산이 아니라 1950년의 격전지이기 때문이다. 839고지 정상에는 '유학정'이라는 정자가 세워져 있다. 정자에 올라 지금껏 걸어온 등산로를 돌아보면 820고지, 674고지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 정만진

▲ 839고지에서 돌아본 풍경 유학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839고지이다. 그냥 '정상'이라 하지 않고 '고지'라 부르는 것은 유학산이 그냥 등산을 즐기면 되는 보통의 산이 아니라 1950년의 격전지이기 때문이다. 839고지 정상에는 '유학정'이라는 정자가 세워져 있다. 정자에 올라 지금껏 걸어온 등산로를 돌아보면 820고지, 674고지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 정만진
a 839고지 정상의 유학정(정자) 유학산을 오르내리는 길은 총 6.25km, 폭 2m이다. 이 길은 1999.12.20.-2000.9.30. 기간에 연인원 5,200명(1일 40명)의 공공근로자가 동원되어 닦았다. 총 4억1천만원의 예산이 들어간 이 사업은 2000년도 공공근로 우수사업장으로 선정되었다. 이 사업의 명칭은 '6.25 격전지 순례 답사로 개설 사업'이다. 우리는 유학산을 오르며 약 2만7천 명 이상의 남북 젊은이들이 피흘려 죽고, 연인원 5천 명 이상의 공공근로자가 땀흘려 일한 이곳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839고지 정상의 유학정(정자) 유학산을 오르내리는 길은 총 6.25km, 폭 2m이다. 이 길은 1999.12.20.-2000.9.30. 기간에 연인원 5,200명(1일 40명)의 공공근로자가 동원되어 닦았다. 총 4억1천만원의 예산이 들어간 이 사업은 2000년도 공공근로 우수사업장으로 선정되었다. 이 사업의 명칭은 '6.25 격전지 순례 답사로 개설 사업'이다. 우리는 유학산을 오르며 약 2만7천 명 이상의 남북 젊은이들이 피흘려 죽고, 연인원 5천 명 이상의 공공근로자가 땀흘려 일한 이곳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 정만진

▲ 839고지 정상의 유학정(정자) 유학산을 오르내리는 길은 총 6.25km, 폭 2m이다. 이 길은 1999.12.20.-2000.9.30. 기간에 연인원 5,200명(1일 40명)의 공공근로자가 동원되어 닦았다. 총 4억1천만원의 예산이 들어간 이 사업은 2000년도 공공근로 우수사업장으로 선정되었다. 이 사업의 명칭은 '6.25 격전지 순례 답사로 개설 사업'이다. 우리는 유학산을 오르며 약 2만7천 명 이상의 남북 젊은이들이 피흘려 죽고, 연인원 5천 명 이상의 공공근로자가 땀흘려 일한 이곳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 정만진
 
유학산 등산로는 대부분이 산줄기를 그대로 타고 다녀야 한다. 왼쪽으로 보아도 절벽이고 오른쪽으로 보아도 절벽이다. 하늘이 푸르른 날이라 할지라도 산길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면 오금이 저릴진대 두껍게 눈이 내린데다 그늘진 곳은 곳곳에 빙판이 형성되어 있고, 손을 짚고 엉덩이를 땅에 대지 않고서는 건널 수 없는 낭떠러지 길도 여기저기 있어 나 같은 사진 애호가(등산 애호가가 아니라)는 걷는 것이 가끔은 고통스럽다.
 
그래도 온 길을 되돌아 갈 수는 없다. 오르막은 그런 대로 기어서라도 갈 수 있지만 내리막은 보는 것만으로도 겁에 질리고 실제로도 더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눈길에 겁먹은 나의 생각일 뿐인지 올라오고 내려가는 등산객들로 유학산은 제법 북적대고 있다. 나는 겁먹은 내색을 숨기기 위해서라도 연신 사진을 찍어대는 수밖에 없다. 아니, 실제로도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풍경들이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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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만진
 
 
839고지에서 곧장 하산하기로 마음먹는다. 다부동 전적기념관에서 유학산 최정상인 839고지까지는 약 4.7km이지만, 지금까지 올라온 길과는 반대인 839고지에서 도봉사를 거쳐 도로까지 가는 길은 1.3km 정도 된다. 오늘은 너무 오래 걸었으니 이제는 내려가야겠다. 그런 판단을 하다가 나는 문득 '전쟁 때 이곳은 날마다 점령군이 바뀐 곳이다. 12일 동안 열다섯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고 하지 않던가. 국군만이 아니라 열대여섯 살 학도병들까지도 하루에 몇번씩, 그것도 오늘 나처럼 이렇게 한가롭게 사진기를 들고 낭만적으로가 아니라 총알이 귓가를 스치고 폭탄 파편에 맞아 친구가 옆에서 피를 토하여 죽어가는 속에서 그렇게 오르내린 곳이다. 그런데 나는 오늘 너무 한가롭지 아니한가' 하는 생각에 빠져든다. 그때 입간판이 하나 눈길을 끈다.
 
 유학산(遊鶴山)
‘호국의 고장’ 칠곡의 유학산(해발 839m)은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학산, 학상, 학하리와 석적면 동곡리에 동서로 길게 병풍을 쭉 펼쳐 놓은 것처럼 뻗어 있다. 서남쪽 산중턱에는 깎아지른 듯한 웅대한 바위절벽이 정상까지 솟아 있고, 절벽 밑에서 고개를 들면 까마득히 보이는 정상이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데, 그 높이가 어른 키로 50질이 된다고 하여 “쉰질바위”라 하며, 학이 노닐던 곳이라 하여 “학바위”라 하기도 한다.

쉰질바위 밑에서 산을 오르면 주변과 정상의 빼어난 경치가 저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하며, 정상 북쪽에는 갈대밭이 넓게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그러나 이 유학산은 1950.6.25. 한국전쟁 당시 다부동 전투를 가장 치열하게 치른 곳이 바로 이 곳이다. 8-9월의 폭염 아래 수십여 차례의 피의 탈환전이 이곳 유학산 자락에서 벌어져 피아간에 수만 명을 헤아리는 젊고 고귀한 생명들의 희생을 가져왔고, 저 멀리 908호선 도로와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함께 금무봉 전투, 자고산 전투 및 융단 폭격 등 조국 수호의 최후의 보루지였다.

‘세상이 평안하더라도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기가 온다’(天下雖安 忘戰必危)라는 격언과 같이 이곳을 지난날 쓰라린 상흔이 점차 잊혀져 가는 유학산과 다부동 전적 기념관에서 한국전쟁의 비극을 상기시키는 안보 현장의 탐사 기회와 호국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 1999년 12월 칠곡군수
 
지금까지 약 네 시간을 걸었다. (슬라이드의 마지막 사진은 지난 봄에 찍은 것인데 그 사진을 찍었을 때인) 봄에 올랐을 때와 비교하면 한 시간 이상을 더 걸었다. 눈이 내린 탓일 게다. 그나저나 다음에는 오늘과 반대편인 이곳에서 유학산을 다시 올라가보아야겠다. 아까 도봉사에서 보았던 등산로 입구가 생각난다.
 
그래, 이곳은 과연 전쟁과 평화의 의미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볼 기회가 되는 곳이야. 저 아래 다부동에 가면 전적기념관도 있으니 학생들이나 자녀들을 데리고 와서 등산도 하고 기념관 관람도 하면 괜찮겠어. 단, 오늘같이 눈 내린 날 말고 아주 쾌청한 봄날이나 가을이라야겠지.
 
a 도봉사에서 839고지로 오르는 등산로 입구 유학산은 다부동 전적기념관에서 올라 839고지를 거쳐 하산하면 도봉사로 내려온다. 도봉사에서 오르면 그 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유학산은 서고동저이기 때문에 도봉사에서 오르면 거의 반쯤 힘이 덜 든다.

도봉사에서 839고지로 오르는 등산로 입구 유학산은 다부동 전적기념관에서 올라 839고지를 거쳐 하산하면 도봉사로 내려온다. 도봉사에서 오르면 그 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유학산은 서고동저이기 때문에 도봉사에서 오르면 거의 반쯤 힘이 덜 든다. ⓒ 정만진

▲ 도봉사에서 839고지로 오르는 등산로 입구 유학산은 다부동 전적기념관에서 올라 839고지를 거쳐 하산하면 도봉사로 내려온다. 도봉사에서 오르면 그 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유학산은 서고동저이기 때문에 도봉사에서 오르면 거의 반쯤 힘이 덜 든다. ⓒ 정만진
 
기념관의 리플릿을 보면 '8월 16일 오전 11시 58분부터 26분 동안 B29 폭격기 98대가 출격해 폭탄 960톤을 왜관 서북방 67.2평방킬로미터 일대에 융단폭격을 가해 적진을 초토화시켰다'는데, 그만하면 교실 한 칸 면적마다 2kg의 폭탄을 투하했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뿐인가. 'This bombing was recorded as the most enormous one since the World War ∐'라고 했으니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융단 폭격을 가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어른들은 리플릿을 보면서 자녀나 학생들에게 다음처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이렇게 나무와 풀들이 자라나 있는 걸 봐. 전쟁은 잠깐이지만 평화는 영원한 거야. 나무와 풀들이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주고 있어. 인간은 끊임없이 전쟁을 도모하지만 자연은 부단히 평화를 구축하고 있잖아. 유학산에서 거의 3만 명이 죽었는데 그렇게 죽은 이들 중 다시 살아난 이가 누가 있어? 아무도 없어. 그러나 풀과 나무들은 다시 살아났잖아. 결국 우리 사람들은 아이 어른 가릴 것 없이 모두 유학산을 오르내리며 자연으로부터 배워야 해. 그래야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어. 인간소외의 최고 주범은 전쟁이라는 말, 한 점 어김없이 진리야."
2008.01.14 09:03ⓒ 2008 OhmyNews
#유학산 #전쟁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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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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