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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마비 <엘르> 편집장, 눈짓 하나로 희망을 날다

[리뷰] '잠수종과 나비'(The Diving Bell and The Butterfly)

08.02.02 10:43최종업데이트08.02.03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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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잠수종과 나비'(The Diving Bell and The Butterfly)에서 언어치료사 역을 맡은 '마리-조시 크로즈'가 치료를 위해 직접 만든 알파벳을 적은 판을 들어보이고 있다. ⓒ ㈜유레카픽쳐스



유명 잡지 편집장에게 '불현듯' 찾아온 불행

"우(u), 에쓰(s), 아(a), 에(e), 이(i), 엔(n)…" 의사 말을 놓칠새라, 그는 입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원하는 알파벳이 나오면, 커다란 왼쪽 눈을 힘겹게 한번 감았다 떴다. 의사는 그가 고른 알파벳이 맞는지 확인한 뒤 종이에 옮겨적는다. 원하는 알파벳이 아니면 두 번, 다른 말을 하고 싶으면 재빨리 윙크 수십 번 날렸다. 그는 그렇게 대화했다. 단지 왼쪽 눈 하나로 말이다.

장 도미니크 보비(매튜 아말릭·이하 장 도), 불혹을 갓 넘긴 그는 세계적인 프랑스 패션전문지 <엘르(elle)>의 편집장이다. 시쳇말로 명함 한 장 내밀면 모두가 껌뻑 죽었다. 부족하지 않을 정도 재산도 있다. 하지만 불행은 정말 '불현듯' 찾아온다.

장 도는 아들과 함께 새로 뽑은 컨버터블 차를 몰고 드라이브를 하다, 거품을 물고 쓰러진다. 병명은 '감금증후군'(locked-in syndrome). 온 몸은 마비됐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게 됐다. 움직일 수 있는 거라곤, 왼쪽 눈 하나뿐. 생경한 이름만큼, 알려진 치료법도 없다. 마냥 좋아지기를 바라며, 재활치료를 하는 것밖에 없다.

누가 봐도 절망적인 상황,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희망을 발견한다. 어쩌면 그는 육중한 잠수종에 갇혀 물 속을 헤메다, '바닥의 힘'을 발견한 것은 아닐까. 아주 밑바닥까지 내려가본 자만 안다는 바로 그 힘을 말이다. 몸은 비록 굳어있지만, 정신은 이보다 더 자유로울 수 없다. 누에고치를 깨고 화려한 날개를 드러내 하늘을 나는 나비처럼 그의 영혼은 세상 모든 곳을 누빈다.

바닥까지 내려가 본 자는 희망을 볼 수 있다

영화 '잠수종과 나비'(The Diving Bell and The Butterfly)의 한 장면. 거울 사이로 남자 주인공인 '장 도미니크 보비'(매튜 아말릭·이하 장 도) 모습이 보인다. 그는 영화에서 왼쪽 눈 하나로 미묘한 감정을 잘 표현했다는 평을 얻고 있다. ⓒ ㈜유레카픽쳐스

링거를 맞으면서도, 아내와 함께 싱싱한 굴요리를 먹는 상상을 한다. 아름다운 여자의 탐스러운 가슴과 허벅지를 보며,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한 마리 발정난 승냥이가 된다. 영화 제목처럼, 이보다 더 자유로울 순 없다. 그 모습만 보면, "저 사람, 저거 아픈 거 맞어" 싶다. 참 속없어 뵌다.

놀랍게도, 그는 영혼의 발자취를 글로 옮겨낸다. 20만 번 눈을 깜박이면서 말이다. 단어 하나 쓰는데만 3분, A4 반쪽을 채우려고 반나절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이는 출판사 여직원 '끌로드'가 있기에 가능했다. 천사처럼 아리따운 그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보비 옆에서 손이 돼줬다.

1년 3개월 뒤, 그는 <잠수종과 나비(The Diving Bell and The Butterfly)>라는 책을 출판한다. 진심은 통하는 법, 이 책은 수십개 언어로 번역됐고,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줄리앙 슈나벨 감독은 이 모든 얘기를, 철저히 장 도 눈을 통해 보여준다. 영화 초반, 어렵사리 눈을 뜨는 그의 설정에 맞게, 자주 카메라 초점을 일부러 흐린다.

시선 밖에 벗어나면, 그 누구라도 화면에서 볼 수 없다. 이 때문인지 배우들도 너무 잦게 얼굴을 가깝게 들이댄다. 초반 상황 보여주기에 보내는 시간도 상당히 길다.

이 모든 이야기가 실화

이때가 고비다. 허벅지 꼬집어가며 이 위기를 잘 넘기지 않으면, 자칫 '재미 없는 영화'가 될 수 있으니 주의. 게다가 안타깝게도 감동 코드는 영화가 다 끝났을 때 나온다. 아무리 미괄식이 '빵'하고 터지는 맛이 있다지만, 너무 미괄식이다. 그나마 '빵빵' 터지는 장 도의 걸출한 입담이 있기에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마지막으로 놀라운 사실 하나 더. 이 모든 얘기는 실화다. 스토리가 사실에 바탕을 둬서 그랬을까. 영화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쯤 가슴 한 구석이 유독 뭉클해진다. 좌절할 때마다 남의 탓을 하며 툴툴거렸던 자신이 새삼 부끄러진다.

14일 국내 개봉. 관람등급 NR(not rated).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블로그(goster.egloo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잠수종과 나비 개봉영화 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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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내가 밉습니다. 화가 나도 속으로만 삭여야 하는 내가 너무나 바보 같습니다. 돈이, 백이, 직장이 뭔데, 사람을 이리 비참하게 만드는 지 정말 화가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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