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장 밑에서도 미나리 싹은 자란다

김유정 탄생 100주년기념 '봄 ? 봄 스토리페스티발' 선포식

등록 2008.02.13 09:54수정 2008.02.13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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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춘천 어린이들이 김유정 탄생 축시를 낭독하고 있다.

춘천 어린이들이 김유정 탄생 축시를 낭독하고 있다. ⓒ 박도

춘천 어린이들이 김유정 탄생 축시를 낭독하고 있다. ⓒ 박도

 

김유정탄생 100주년

 

a  전상국 추진위원장이 개식 선언을 하고 있다.

전상국 추진위원장이 개식 선언을 하고 있다. ⓒ 박도

전상국 추진위원장이 개식 선언을 하고 있다. ⓒ 박도

지난 10일, 숭례문이 불탄 이후 여태 글 한 줄 못 쓰고 있다. 지난해 섣달 이후 날로 달로 더욱 명백하게 천박해지는 세태에 대한 기우가 마침내 현실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화의 길이요, 선진화의 길인지, 어느 한두 사람을 원망하기에는 많은 내 이웃들의 잘못 된 판단같아 분노를 속으로 삭이려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내 처지를 알기나 한 듯, 이른 아침에 집배원이 깜빡 배달을 잊었다고 하면서 며칠 지난 우편물을 전해 주고 갔다.

 

봉투를 뜯자 김유정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에서 보낸 우편물로 '김유정탄생 100주년 선포식' 초대장이었다. 행사 일시가 바로 오후 2시로 다행히 날짜를 넘기지는 않았다.

 

나는 행사에 참석하느냐 마느냐로 잠깐 갈등을 하다가, 이럴 때는 바람을 쐬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아 참석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아침밥을 먹은 뒤 서둘러 준비하여 아내 차를 타고는 춘천으로 달렸다. 춘천에 이른 뒤 낯선 길도 물어볼 겸 막국수 집에서 요기를 하고, 곧장 행사장에 달려가자 전상국 추진위원장이 매우 반겨 맞아 주셨다.

 

해학과 향토성이 물씬한 김유정 문학세계

 

a  소설가 오정희씨

소설가 오정희씨 ⓒ 박도

소설가 오정희씨 ⓒ 박도

“요담부터 또 그래 봐라. 내 자꾸 못살게 굴 테니.”

“그래 그래. 이젠 안 그럴 테야!”

“닭 죽은 건 염려 마라. 내 안 이를 테니.”

 

그리고 뭣에 떠다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너 말 마라!”

“그래!”

 

조금 있더니 요 아래서

“점순아! 점순아! 이년이 바느질을 하다 말구 어딜 갔어?”

하고 어딜 갔다 온 듯싶은 그 어머니가 역정이 대단히 났다.

 

점순이가 겁을 잔득 집어먹고 꽃 밑을 살금살금 기어서 산 아래로 내려간 다음, 나는 바위를 끼고 엉금엉금 기어서 산 위로 치빼지 않을 수 없었다.

- <동백꽃>

 

문향(文香) 가득한 문학의 본고장 춘천

 

나는 이 부분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얼마나 그들의 애간장을 태웠던가. 이 작품은 강원 산골마을을 배경으로 한 사춘기 소년 소녀의 풋풋한 사랑이야기다. 이 작품을 비롯한 김유정 문학세계는 탁월한 언어감각으로 빚어낸 해학과 향토성이 물씬하다.

 

a  이어령 명예대회장

이어령 명예대회장 ⓒ 박도

이어령 명예대회장 ⓒ 박도

춘천 의암호 언저리 한 호텔 강당에서 열린 ‘봄 ‧ 봄 스토리페스티발’ 선포식은 전상국 추진위원장이 ‘산골마을의 슬픈 이야기들을 아름답고 익살스럽게 그린’ 김유정 봄 ‧ 봄 스토리페스티발 개식 선언과 이광준 춘천시장의 ‘향토문학의 세계화, 삶의 질 향상, 작가정신의 재평가를 위한’ 기념식 선포, 그리고 춘천 어린이들의 축시 낭독이 있었다.

 

네 소녀가 맑은 목소리로 김유정 작가를 기리는 축시를 낭독할 때는 소름이 끼치도록 가슴 뭉클했다. 누가 저 아이들의 아름다운 모국어를 빼앗으려고 하는가.

 

이어 오정희 작가가 "춘천은 문향(文香) 가득한 문학의 본고장으로, 예향(藝鄕), 문향(文鄕)이다. 영국이 셰익스피어를, 독일이 괴테를, 오스트리아가 모차르트를 기리듯, 김유정은 춘천의 자랑이요, 우리 겨레의 축복"이라는 축하메시지를 낭독하였다.

 

이어령 명예대회장은 “문학은 불에 타지도 않고, 그 누구도 방화할 수도 없는 예술”로 김유정은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를 100년이 지난 오늘에도 전 국민의 마음속에 살아있게 한 작가”로, 강원도의 아름다운 자연과 말을 소설이라는 마법의 거울로 선명하게 보여준 위대한 분이라고 높이 기렸다.

 

이 명예대회장은 "우리의 향토 말을 가장 잘 드러낸 문인은 시로는 서정주요, 소설로는 김유정이지만, 서정주는 친일의 흠으로 그의 시는 훌륭함에도 100주년기념사업을 하는데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으나,  김유정은 29세의 나이로 흠 없이 요절하였기에 오늘 이렇게 성대하게 100주년 기념사업을 열 수 있었다고, 돌아가신 뒤는 오히려 대단히 행복한 사람"이라고도 하였다.

 

"독일의 하이네가 로렐라이 언덕을 세계화하였듯이, 김유정이 고향 춘천을 문화의 고장으로 드높인 인물이다. 그래서 김유정은 고향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작가다. 그를 낳은 고장사람들도 매우 훌륭하다"고, 이 명예대회장은 고향 실레마을사람들을 한껏 추켜세웠다.

 

a  내빈들이 축하 떡을 자르고 있다.

내빈들이 축하 떡을 자르고 있다. ⓒ 박도

내빈들이 축하 떡을 자르고 있다. ⓒ 박도

 

공식 행사에 이어 옆방 의암홀에서 다과회가 있었다. 이날 행사장에는 춘천시 각급 기관장과 문학인, 그리고 김유정 고향 실레마을사람들로 가득 메웠다. “작가는 그를 사랑하는 고향사람이 만든다”는 이야기를 새삼 확인하는 흥겹고도 매우 부러운 잔치였다.

 

“다른 지자제장들이 춘천을 보고 배워야 한다”고, 호반의 도시 춘천을 예찬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말씀에 공감이 갔다. 나라의 지도층이 솔선해서 우리 말을 업신여기는 이 세태에 강원 산골 한 모퉁이에서는 마치 얼음장 밑에서도 파란 미나리 싹이 자라나듯, 내 문화와 언어를 천시하는 무리들을 비웃듯, 매운 추위에도 인동초처럼 푸름을 잃지 않음을 보고, 그동안 움츠렸던 내 마음이 활짝 펴지는 뿌듯한 하루였다.

 

우리는 언제 문화 선진국이 될까? 문화가 없는 부유는 '개 발에 편자'요,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다. 문화가 없는 나라는 천박함이 기승을 부리고, 문화 선진국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그 나라 지도자는 그 나라 백성들의 수준과 같다고 한다.

 

빵 한 조각 못지 않게 소설 한 편도 소중하다. 우리는 언제 이 천박한 문화와 우리 말 경시 풍조에서 벗어날까?

 

a  실레마을 주민 대표(왼쪽)의 건배 제의.

실레마을 주민 대표(왼쪽)의 건배 제의. ⓒ 박도

실레마을 주민 대표(왼쪽)의 건배 제의. ⓒ 박도
2008.02.13 09:54ⓒ 2008 OhmyNews
#김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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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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