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도 방학 때 보충수업을 한다고요?

학교자율화계획이 몰고온 중학교 방학 풍경

등록 2008.07.08 17:17수정 2008.07.08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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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시험을 치르고 있는 중학생들의 모습.

시험을 치르고 있는 중학생들의 모습. ⓒ 서부원

시험을 치르고 있는 중학생들의 모습. ⓒ 서부원

 

새 아침 출근 길, 버스 안에서 만나는 아이들의 눈은 피곤에 찌든 듯 늘 퀭하고, 아침을 거른 듯 어깨는 힘없이 축 늘어져 있습니다. 무엇이 발랄한 생기가 넘쳐야 할 그들의 몸과 마음을 일그러지게 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학교를 향해 터벅터벅 걷는 아이들의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학교를 빛낸' 명문대 합격 경축 현수막이 보란듯 펄럭이는 교문을 지나 교실에 닿았지만 태반은 이내 엎드려 잠을 청합니다. 비몽사몽의 혼미한 꿈결 속에서 등교를 하는 셈입니다.

 

아침 방송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 음악 소리에 선잠을 깹니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며 땀 흘려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류의 '뻔한' 얘기가 레코드판 튀듯 어김없이 반복됩니다. 매일 아침 그 '좋은' 말씀은 해가 가고 강산이 변해도 바뀔 줄을 모릅니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는 경쾌하지만, 1교시부터 교실은 '고요합니다'. 수업이 시작되기도 전인데도 세상모르고 잠든 아이들이 눈에 띕니다. 더러 코를 고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침부터 기지개를 켜게 하고 산만한 분위기를 추슬러 주의를 집중시키는 데만 10분 가까운 시간이 흘러버립니다. 어수선한 그들이 밉지 않습니다. 외려 가여울 따름입니다.

 

지칠 대로 지친 아이들에게 여름은 '시련의 계절'

 

학교에서 학원으로, 학원에서 독서실로 옮겨 다니며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식의 공부에 지칠 대로 지친 아이들에게 후텁지근한 초여름은 그야말로 '시련의 계절'입니다. 요즘 같을 때에는 찬물에 발 담근 채 수업을 받게 하고 싶고, 점심 먹고 한 시간 정도는 푹 쉬거나 낮잠을 자게 하는 여유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언감생심, 그것이 한낱 허황된 푸념이라는 것을 이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어진 교무회의 시간, 새 정부의 교육 개혁 방안에 부응이라도 하듯 아이들의 '학력 신장을 통한 교육 경쟁력 제고 방안'이 안건으로 올라왔습니다.

 

교장 이하 보직 교사들이 심사숙고 끝에 대안을 마련했다며 내놓은 것이 고작 상위권 학생들을 위한 여름방학 중 영어, 수학 특별수업 계획입니다. 비록 중학생들이라 지나친 감이 없진 않지만 인근의 학교들도 비슷한 고민과 생각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경제적 빈곤층과 맞벌이 가정 등 방학 중 사실상 방치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좀더 확충하는 게 교육적으로 옳지만, 학교의 CEO인 그들의 그런 소신과 결정을 바꾸도록 설득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엘리트 한 사람이 백 명을 먹여 살린다'거나 '명문대 합격자 수로 학교의 품질이 결정 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닌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소신에 날개를 달아주는 공문도 때맞춰 하달되었습니다. 수요자 중심의 방과 후 학교 프로그램을 활성화하라는 취지의 내용입니다. 전국 단위의 일제 고사 실시와 학교별 성적 공개 방침이 일찌감치 정해진데다 여름 방학을 코앞에 둔 시기이니 아예 방학 중 보충 수업을 하라며 종용하는 꼴입니다.

 

'감금' 교육방식은, 교육의 퇴행

 

중학교에서조차 방학 동안 보충 수업을 실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며, 벌써부터 수업 대상과 반편성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상위권 학생들을 우선 대상으로 하는 만큼 선행 학습 위주로 진행될 게 뻔하지만, 그 구태의연함을 탓할 수 없는 건 학교자율화 계획에 대응하는 일선 학교 나름대로의 '자구책'이기 때문입니다.

 

학기 중이든 방학 때든 방과 후 학교 프로그램이 활성화되는 데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지만, 책상 앞에 오래 앉혀두면 어쨌든 공부를 더 하게 된다는 논리로 아이들을 학교에 '감금'해두는 방식은 분명 교육의 퇴행입니다. 학생의 건강을 위해 너무 늦은 시간까지는 운영하지 말라는 공문 내용이 외려 고맙게 느껴질 지경입니다.

 

퇴근 무렵, 우연히 초등학생 자녀가 있거나 취학을 앞둔 자녀를 둔 교사 몇몇이 모여 앉았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초등학교의 영어 수업 시수가 늘어난다는 정부의 최근 발표에 당혹스러워 하며 맞장구치는 자리가 돼버렸습니다. 당장 용한 과외 자리를 알아봐야겠다거나, 영어 학원을 보내야겠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습니다.

 

하나 같이 영어 수업 시수를 무작정 늘린다고 영어 실력이 향상되느냐며 반문하는 교사들이지만, 영어에 대한 불안감을 떨칠 수 없는 모양입니다. 어쨌든 자녀가 영어에 주눅 들지 않도록 하려면 어찌 됐건 미리 손 쓸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아이들은 더 이상 방학을 기다리지 않는다

 

입시에 종속된 교육 환경과 수업 방법 등 '질'에 대한 고민과 반성 없이 무조건 '양'으로 승부하는 교육 현실은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질 못했습니다. 무작정 도덕 수업 오래한다고 도덕적 인간이 되고, 역사 수업 시수 늘린다고 올바른 역사의식이 갖춰지지는 않을 터인데. 아무튼 그런 낡디 낡은 '19세기 버전'으로 개혁을 운운한다는 게 우습기까지 합니다.

 

얼마 전 촛불 문화제에서 중학생쯤 돼 보이는 아이들로부터 '선생님이 촛불보다 못하고, 교실이 광장보다 못하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그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교육의 '질'을 본능적으로 깨닫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기성세대의 '교육 개혁'이 먹혀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방학 때 상위권 아이들 모아놓고 보충 수업을 하고, 초등학생의 영어 수업 시간을 늘리는 것이 교육 개혁인지 교사들조차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하물며 아이들에게 무작정 따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보다 똑똑한 사람들이 다 알아서 만든 것일 테니 받아들이자'고 체념하는 교사들은 넘쳐나도, '모두 우리들을 위한 것'이라며 수긍하는 아이들은 이젠 더 이상 없습니다. 교육관료들과 학교의 뒷걸음질이 아이들의 지적 성장에 외려 도움을 주고 있는 셈입니다.

 

예상대로 새 정부의 학교자율화 계획은, 빠른 속도로 중학교를 고등학교화시키고, 초등학교를 중학교처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얼마 안 있어 여름 방학이지만, 더 이상 아이들은 설레 하지 않습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2008.07.08 17:17ⓒ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학교자율화계획 #보충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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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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