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살아남기 위해서는 위폐를 만들어야 한다

[리뷰] <타인의 삶>의 제작진이 선사하는 색다른 감동 <카운터 페이터>

08.07.14 20:39최종업데이트08.07.14 20:39
원고료로 응원

작년 4월의 어느 날 아침, 홀로 조용히 극장을 찾아 영화 한 편을 보았다. 그 영화는 필자가 감히 그해 최고의 영화라 칭할 수 있었던 <타인의 삶>이었다. 바로 그 영화 제작진이 다시 모여 만든 영화 <카운터 페이터>는 <타인의 삶>의 분위기와 톤을 그대로 이어가며 또 다시 독일 영화의 매혹에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감동에 진부함까지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가끔은 그런 감동이 그리울 때가 있다. 마치 우리가 틀에 박힌 공식대로 풀어가는 멜로영화나 TV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때로 이렇게 의심 가득한 눈길로 스크린을 바라보다 예상치 못한 다른 종류의 감동과 새로운 발견에 감사하기도 한다.

 

<카운터 페이터>는 그동안 많은 영화에서 다뤄 왔던 유태인 대학살이란 큰 틀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나치, 아우슈비츠 등 홀로코스트에 관한 이야기라면 이제는 조금 식상한 소재로 느껴지지만, 영화는 실제 사건이었던 베른하트 작전을 영화의 중심부에 놓으면서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그들을 말한다.

 

독일은 영국 경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위폐 생산에 몰두한다. 이를 위해 유태인 수용자들 중 그 분야 기술자들을 선별하고, 이들은 다른 수용자들에 비해 상당한 혜택을 받으며 생활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 속에 놓인 특별한 소수인들의 삶을 통해 인간의 생존 본능과 양심, 갈등, 타협, 그리고 그 속에서도 서로를 위하는 끈끈한 우정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영화 <카운터 페이터>는 종전의 홀로코스트 영화와 같이 전쟁의 잔혹함, 지독한 나치의 대학살보다는 인간 본연의 그 '본질'에 초점을 맞추고, 나약함과 강인함 사이를 오가며 휘청대는 인간을 통해 삶의 의미를 고찰한다. 그래서인지 <카운터 페이터>는 나치의 잔인함만을 고발하여 관객들을 불쾌하게 하거나 유태인들을 보며 측은해 눈을 젖게 하지만은 않는다.

 

"나는 내 삶을 연명해 왔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

 

극 중 최고의 위폐 제조가 소로비치(카알 마르코빅스 분)는 가족의 안부를 걱정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부르거(오거스트 디엘 분)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는 비록 나치를 위해 그림을 그렸고, 그를 위해 자신의 기술을 사용하여 위폐를 만들어냈지만 누구보다 동료를 아끼고 의리를 지킬 줄 아는 남자였다.

 

다수가 몽상가라 칭하는, 끝까지 위폐만들기를 거부했던 부르거를 마지막까지 끌어안은 그의 모습을 보면 단순히 살기 위해 시류에 영합하는 기회주의자로서만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타인의 일부만 보고 그를 규정짓고 비난하듯 말이다. 그 시대 속에서, 소로비치는 무엇보다 '인간'으로서 단 하루라도 더 살기를 희망했고, 그렇게 하기 위해 위폐를 만들어냈다. 우리가 과연 이런 그를 비난할 수 있는 것일까?

 

전쟁이 끝나고 수용소를 나와 이제는 당당한 삶을 살게 된 소로비치지만 그의 팔에 새겨진 지울 수 없는 문신(수인번호)는 그에게 잊지 못할 악몽을 끊임없이 되새김하게 한다. 또 한편으론 카지노에서 배팅한 돈을 다 잃어도, 걱정없는 그(다시 만들어 내면 되니까)의 모습에서는 인생의 허망함까지도 보인다.

 

영화의 시작에서 홀로 바닷가에 앉아있던 그의 모습은 이러한 허망함과 더불어 쓸쓸함까지 느껴지게 하는데 중요한 건, 그 감정을 관객 또한 고스란히 안고 극장을 나오게 한다는 데 있다.

2008.07.14 20:39 ⓒ 2008 OhmyNews
카운터 페이터 타인의 삶 홀로코스트 유태인 카알 마르코빅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