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의 어린 흑염소 제주올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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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지난한 찻길을 따라 걷자 마라도 행 유람선 선착장이 나타났어. 첫 날 만나 '시간 되면 마라도에 다녀오세요. 참 좋아요' 하고 조언을 건넸던 도보여행자가 떠올랐지. 그 아저씨는 지금 어디쯤 있을까? 오랜 시간 떠나려는 배를 바라보며 '다녀올까, 말까?' 생각을 재어 보았지. 마라도는 저 앞의 송악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하자. 이왕 시작한 길 끝까지 걸음으로 마무리하고 싶었어.
파란 화살표는 송악산 산책로의 완만한 오르막을 비껴나 곧 붉은 자갈 오르막으로 향했어. '또 시작이구나' 벌거벗은 붉은 흙길을 따라 잡을 것도 하나 없어 아슬아슬 걸어가며 오르막 입구에서 보았던 '주의' 표지판이 자꾸만 머리 위로 떠올랐지. 말똥을 샤샤샥 피하며 정신없이 기어오르자 곧 '송악산(松岳山)' 비석이 보였어.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모자를 꼭 쥐고 수평선을 바라보았지.
넘실거리는 청록 물결, 빼곡하게 자란 소나무 숲, 점점이 박힌 마을, 모두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조심조심 길을 내려왔어. 길 위에 떡하니 서서 풀을 뜯는 기름진 말들을 보자 숨이 턱 막혔지. '발길질 한 번이면 나동그라지겠는 걸, 얘들을 어떻게 지나간다…?' 그저 조심조심 눈도 마주치지 않고 천천히 걷기로 했지. 가까이 가서 갈기를 쓰다듬거나 풀을 뜯어 입가에 대어주는 일은 상상도 할 수가 없었어.

▲말의 길 제주올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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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봐, 저 애. 우리가 무서워서 눈도 못 마주치고 있어.""그냥 두자. 지나가는 애잖아."마치 말들이 나를 비웃으며(!) 비아냥대는 듯했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어? 풀쩍 달려들어 말 등에 올라타는 상상도 해 보았지만 나의 서전트 점프로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잠시 화살표를 잃고 소나무 숲을 방황하다 철조망을 뛰어넘고 갈아엎은 밭 언저리로 푹푹 빠지는 발을 옮겨 도로로 나올 수 있었어.
해안도로를 타고 자전거를 질주하는 여행자들이 반가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전했지. 정말 제주도는 자전거 여행자들의 천국인 것 같아. 나도 다음에는 자전거를 타고 제주도를 한 바퀴 돌아볼까?

▲밭일하는 아주머니들 지금은 감자심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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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살을 지글지글 태우는 태양 아래서 묵묵히 길을 걸으며 이번 여행을 생각했어. 1년만의 긴 걸음, 단 4일의 시간이었지만 많은 일들이 있었어. 무엇보다 특별한 '재발견'들이 있었지. 제주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고독에 대해서, 인연에 대해서, 그리고 그 모든 것과 함께인 어떤 분에 대해서….
하나하나 떠올렸어. 멋진 여행, 멋진 올레, 멋진 사람들이었어. 비록 과도한 모험으로 나를 몰고 가는 화살표를 불신하기도 하고, 난데없는 귀곡산장에서의 공포체험도 있었지. 그렇지만 내 발을 시원하게 식혀준 맑은 물과 까미노를 가뿐히 따라잡는 절경을 만나는 것은 큰 기쁨이었어. 언제나 길 끝에 서 있었던 성당에 도착해 짧은 기도를 바치는 그 시간은 정말 달콤했어.
저 멀리 보이는 하얀 모래사장, 아마도 올레의 종착점 하모해수욕장일 거야. 마지막으로 발을 담글 곳, 기분 좋은 예감으로 다가갈수록 아름다운 모습 치고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아 약간 이상했지.

▲하모해수욕장 휴장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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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휴장'을 걸어놓은 해수욕장은 모든 것이 방치된 채로 해풍에 삭아가는 상태였어. 멋모르고 양말을 벗고 밟은 모래는 발을 지질 정도로 뜨겁게 달구어져 '세족 취소, 취소야!' 그렇게 서둘러 발을 털고 등산화 속에 집어넣었어. 잔잔한 파도를 쳐다보며 세족 대신 일주일 내내 가방에 매달고 걸었던 까미노의 상징인 호리병을 바다에 내던졌어.
"넌, 이제 진짜 안녕. 또 하나의 끝….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지!"
곧 자리를 떠나 모슬포 성당을 방문한 후 제주시의 작은 목욕탕에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때를 밀고, 서울로 오는 비행기를 잡아탔어. 비행기 창밖으로 떨어지는 서편의 와인빛 낙조는 정말로 아름다워서 눈물이 또로록 흐르면 좋았을 텐데, 나는 이상하게 맑은 정신으로 히죽 웃고 있었지.
돌아온 서울은 참 반가웠어.
불안도, 아쉬움도 한 점 남아있지 않았어.
정리:6시 전후 화순해수욕장 - 산방산입구 - 하멜상선전시관 - 마라도 잠수함9시 반 마라도 유람선 - 송악산 - 하모해수욕장 - 1시 모슬포성당오늘의 지출:찐빵 3개, 감귤 2개 / 모슬포시장 / 2,000원대평->제주시 / 대평버스정류장 / 3,000원목욕비+목욕타월 /D사우나/제주시 / 4,000원노형동->공항 이동 / 택시비 / 3,000원해물우동 /중식당/공항 / 5,000원선물(초코/유자차/담배)/공항상점/면세점/ 71,200원제주->김포 /제주항공 / 75,100원합계 / 163,3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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