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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할 것 없는 멋진 하루, 샹그리아처럼"

[인터뷰] 바스키아를 닮고 싶은 남자 하정우

08.09.30 09:57최종업데이트08.09.30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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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제 59회 칸 국제영화제 때의 일이다. 칸의 팔레 데 페스티발 광장에서 연일 스크린쿼터 수호 투쟁이 벌어진 그해 5월, 하루 일정을 마친 한국 영화인들은 저녁이면 한 자리에 모여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다 보니 어수선하고 분분했다.

말 없던 그 남자가 하정우였다

배우 하정우 ⓒ 영화사봄

이런 가운데 재밌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해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대된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2005)를 연출한 윤종빈 감독 일행이 여비를 아끼기 위해 서울-파리 간 직항표를 물러 경유 비행기로 고생 끝에 칸에 도착했다는. 이들은 숙소도 제대로 얻지 못해 한 방에서 새우잠을 잔다는.

소문은 와전된 것이었다. 당시 칸 영화제가 공식 초청한 인물은 윤 감독 하나.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 덕에 두 주연배우 즉, 하정우와 서장원 또한 칸 행 비행기를 탔다. 조감독과 동행하고 싶었던 윤 감독이 자신의 표를 쪼갰을 뿐이니 경유 비행기를 탄 것은 윤 감독과 조감독 단 둘이었다.

칸 현지에서 <용서…>의 일행과 간간이 마주친 바 있으나 슬쩍 목례를 주고받는 수준이었다. 그러다 영화제가 막바지에 이른 어느날, 팔레 데 페스티발 주변의 카페에서 만난 이들은 비교적 들떠 있었다. 쾌활해진 윤 감독은 일행과 갖가지 이야기를 쏟아내며 한껏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유독 한 남자가 시선을 끈 것도 이 즈음이다. 카페 벽에 비스듬히 기댄 남자는 주변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듯했으나 입만은 완강하게 다물고 있었다. 간간이 술잔을 입에 갖다대는 것이 전부였다. 시건방진 눈길도 아니었다. 무심한 표정도 아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남자는 자리를 작파할 때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눈에 띄었을까. 남자가 하정우였다는 사실을 나는 그 때 알지 못했다.

그 하정우를 다시 만났다. 이윤기 감독과 함께 한 이태원의 일본식 선술집에서(관련기사).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하정우는 깜짝쇼처럼 등장했다.

"얘기 들었어요? <멋진 하루>가 <맘마미아(2008, 필리다 로이드)>를 제치고 예매율 1위래요."

술집에 들어서자마자 하정우가 전한 낭보(?)다. 그래서였을까. 숨 돌릴 겨를 없이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하정우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하정우는 얼마 전 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개런티 없는 조연으로 참여했다. 홍 감독과는 영화 <밤과 낮>(2008)을 함께 할 뻔했으나 <추격자(2008, 나홍진)> 촬영과 겹쳐 무산된 바 있다. 지금은 영화 <미녀는 괴로워(2006)>로 이름을 알린 김용화 감독의 차기작 <국가대표> 촬영에 여념이 없다.

"요즘은 서인영이 아니라 하정우가 대세야"

그리고 짬이 날 때마다 <멋진 하루>의 일반 시사를 통해 관객을 만난다. 일반 시사 하루 5회라는 강행군도 마다하지 않는 하정우. 현재 임신 6개월의 '전도연 누나' 몫까지 감당해야하기 때문이란다.

기회다 싶어 물어봤다. 2년 전 칸에 대해서. 즐거운 술자리에서 보여준 고독에 대해서. 원래 불편한 자리에서는 그렇단다. 그래서 오해를 사기도 한다며 하정우는 계면쩍게 웃는다. 한 테이블 건너 앉아있던 방송인 최화정의 목소리가 설핏 건너온다.

"요즘은 서인영이 아니라 하정우가 대세야!"

네거티브 하지 말자. 요즘 이른바 잘 나가는 가수 서인영에 빗대 하정우를 추켜세운 것은 그 자리에 있던 하정우를 부각시키기 위한 최화정의 배려였을 터. 공개한다. '요즘 대세'라는 하정우와 나눈 취기 어린 대화를. 돌발적으로 마련된 자리라 질문들이 어쭙잖다. 하정우는 그러나 시종 엄숙한 태도로 일관했다.

- 감회가 궁금하다. <멋진 하루>로 관객과 만나는.
"시사회에서 관객을 만나는 시간이 제일 흥미롭다. 과거 연극하던 시절 커튼콜 하던 때와 같이 벅찬 희열이 느껴진다. <멋진 하루>는 편하고 재밌게 찍었다. <추격자>와 <비스티 보이즈>(2008, 윤종빈)를 끝낸 뒤 후유증이 있을 거라고 주변에서 우려를 많이 했는데 <멋진 하루>를 찍으면서 원기를 회복했다고 생각한다.

<멋진 하루>는 시나리오가 너무 재밌고 병운 캐릭터에 호기심이 많이 들었는데 막상 만나본 감독이 좋았던 것은 덤이요, 선물이었다. 배우 전도연과 함께 해서 더욱 좋았을 것이다."

- 전도연과 호흡은 어땠나.
"전도연을 만났을 때 '잘 모셔야겠다'고 다짐했다. 송강호 선배가 '도연이 누나 잘 모셔라'라고 당부한 일도 있다. '우리는 (전도연을) 모셔야 돼'라는 말이 재밌었다. 누나여서 편했던 것 같다."

- <멋진 하루> 속 병운의 캐릭터에 <비스티 보이즈>에서 연기한 재현이 겹쳐진다면 과장일까.
"병운과 재현이 오버랩되는 지점은 분명 있을 거라 생각한다. 몇몇 제스처들이 재현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겠지만 재현을 염두에 두고 병운을 연기하지는 않았다."

"연기파 배우? 관객들이 실망할까봐 다작을 한다"

-배우 하정우는 <추격자>를 통해 비로소 대중에 다가섰는지 모르나 하정우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 것은 기실 <용서받지 못한 자>라 생각한다.
"그래서 윤종빈 감독에게 고맙다. 비록 졸업 작품이긴 했으나 학생 신분을 벗어나 사회인으로서 처음 찍은 영화가 <용서…>다. 이 때문에 '이것으로 뭔가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시나리오를 보고 윤 감독과 대화하면서 반드시 이 영화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인물과 내 자신과의 밀착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비롯해 윤 감독까지 풋풋한 열정으로 만들어낸 영화였다. 오랜 기간 촬영을 했다. 한 장면을 위해 3개월 동안 리허설을 하기도 했다.

모텔·여관방 빌릴 돈도 없어서 배우 6명이 한 모텔 방에서 잤다. 매지니먼트사도 없었다.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아마추어들에게는 냉혹했던 현실을 이 작품이 잊게 해줬다. 꿈을 심어줬달까. 매번 촬영을 하고 모니터를 하면서 1년 가까이 완벽하게 준비했다.

스태프들을 태우고 내가 운전해 지방을 돌아다니며 촬영했는데 연기를 하면서 처음으로 희열을 느꼈다. 집에서는 '대체 뭐 하고 돌아다니냐'는 성화도 많았지만 그런 현실을 잊게 해 준 영화다."

- 윤 감독이 학교 후배라는 말을 들었다.
"둘이 만날 당시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 내 연극을 보러온 윤 감독이 내게 <용서…> 시나리오를 내밀었다. 신인 감독이 내 저력을 믿어준 거다. 촬영 중 의견 대립도 물론 있었다. 윤 감독은 자신의 제안과 내 제안을 포함해 서너 가지 방식으로 장면을 찍어본 뒤 '정우씨가 옳았다, 더 이상 (연기를) 지도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제작자가 뭐라 해도 듣지 않던 감독이 배우를 존중해준 것이다. <추격자> 촬영할 때도 투자사들이 원하는 연기가 분명 있었을 거다. '티켓파워'도 없는 내가 감독 말만 듣도록 한 것도 바로 <용서…>의 기억 때문이다."

- '티켓파워'라면 이제 한 번 해볼 만 하지 않나. 수사도 'TV 탤런트 김용건의 아들'에서 이제는 '배우 하정우의 아버지'로 바뀌었으니.
"<추격자>이후 배우로서 지명도가 올랐다는 말을 듣기도 했으나 끊임없이 다른 작품에 임했던 까닭에 실질적인 변화를 느끼지는 못했다. 어쨌거나 아버지가 좋아하시니 행복하다."

- 젊은 나이에 '연기파 배우'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과분하다. 쉼 없이 다작을 하는 이유도 어쩌면 그렇게 평가해주는 이들에게 실망을 주고 싶지 않아서다. 내 현 주소를 자각하면서 많은 경험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다작을 하면서도 고민은 많다. 우선 시나리오를 검토할 때 관객의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재밌고 설득력이 있을까를 연구한다. 시나리오를 봤을 때 '말이 된다, 이 인물은 이해가 된다'는 생각이 들면 영화를 한다. 영화의 짜임새가 먼저다. 김기덕 감독과도 두 작품을 했는데 재밌었다."

- 김기덕 감독과 함께 한 작품, 이를테면 <시간(2006)>에서 지우, <숨(2007)>에서 남편은 다소 불편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 있더라. 판단은 관객의 몫이니까 존중한다. 모든 관객을 아우를 수는 없지 않겠나. 만약 김 감독의 영화 속에서 내가 불편하게 보였다면 아마도 감독의 대사 자체가 구어체보다는 문어체가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감정의 표현에 있어 김 감독은 양식적인 부분을 요구하곤 했다. 그래서 인물들이 아예 비언어적인 경향이 있는데 김 감독의 작품 중에 대사가 가장 많은 역할을 내가 맡았던 것 같다. 그래서 좀 튀지 않았을까. 지금 다시 하라면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모르겠다. <시간>을 찍을 때는 그때의 느낌에 충실했다."

"예술가들의 삶을 연기하고 싶다, 자유롭게"

- 적지 않은 캐릭터를 연기했지만 그래도 한 번 도전해보고 싶은 배역이 있을 것이다.
"예술가들의 삶을 그린 영화가 있다면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바스키아(1996, 줄리앙 슈나벨)>라는 영화를 봤을 때 그랬고 잭슨 폴락을 그린 <폴락(2001, 에드 해리스)>, 앤디 워홀 이야기 <팩토리 걸(2006, 조지 하이켄루퍼)>에서 연기한 배우들을 보면서 영감을 얻곤 했다. 

배우가 연기에서 확신을 얻기가 힘들다. 조심스럽게 접근해도 만족을 얻기 어려운데 바스키아의 낙서 하나가 사람을 움직인다는 것. 이것은 자신감이라 생각한다. 그 점에서 바스키아는 내게 적잖은 영감을 준 작가이다.

<추격자>를 찍을 때는 설치미술가 루이스 부르주아에 빠지기도 했다. 부르주아의 스케치 말이다. 그 영향인지 <추격자> 촬영 중에 낙서를 많이 했다. 지영민이라는 인물도 미술에 심취한 인물이었으니까."

- 그림을 공부한 바 있나.
"어렸을 때, 학교 들어가기 전에 그림을 배운 일이 있다. 그림을 그릴 때는 본능적으로 잘 그리려 하다보니 정밀묘사에 대한 강박관념을 갖기 마련이다. 내가 생각하는 자동차와 사과 들을 내 방식대로 솔직하게 그리기가 어렵다. 감성이 긁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산과 원이 선명하게 떠오르면 연기에 적용이 된다. 없는 걸 있는 척 안 하게 된다. 부족하면 채워나가야 하는데 자꾸 있는 척 하다보니 문제가 되는 거다."

- <멋진 하루>는 어떤 영화?
"이런 색깔의 영화는 한국에서 처음 만나는 것 같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이 있지 않나. 특별할 것도 없는 내러티브로 가슴을 치게 만드는 영화. 엔딩 크레딧이 오르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탈 때 돌연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지 않을까. 여운을 주는 영화 말이다. 설령 킬링 타임용으로 만들어졌다 해도 극장을 나서며 혹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영화들도 무수하니까. <멋진 하루>는 잔향이 있는 영화다. 강요하지 않는 재미가 있다. 관객들이 <멋진 하루>를 여유 있게 봐줬으면 좋겠다.

영화를 봤을 때 한 장면만 맘에 들면 내게는 좋은 영화다. 음악의 한 소절이라도 맘에 들면 되는 것과 같다. 나는 우마 서먼이 주연한 영화 <프라임 러브(2005, 벤 영거)>에서 오프닝 곡이 참 좋았다. 엔딩 곡 또한 기가 막혔다. 그 음악을 들은 뒤에 영화를 만든 감독이 궁금해졌다. 오프닝 곡과 엔딩 곡만으로도 나는 <프라임 러브>가 최근에 본 영화 중에 최고였다고 생각했다. <멋진 하루>에서는 병운이 샹그리아를 시음하는 마지막 장면이 그랬다. 중간 중간 삽입된 음악 또한 놓치지 말기 바란다."

하여 이렇게 가정해보자. 마드리드 한복판에서 막걸리를 팔고 싶었던 병운이 서울 한복판에서 샹그리아를 맛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면 <멋진 하루>는 여러분에게 좋은 영화다. 물론 하정우의 생각에 찬성한다면.

하정우 멋진 하루 용서받지 못한 자 이윤기 전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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