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이 영화에 왜 이리 맥주가 자주 나올까?

<멋진 하루>를 보는 조금은 독특한 시선

08.10.01 10:03최종업데이트08.10.01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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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후반부 서술이 들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실 분은 이 점 고려해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편집자말]

무채색톤과 황폐한 분위기가 마치 동구유럽권의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 영화사봄


영화의 초반은 스산했다. 1년전, 헤어진 옛 애인에게 떼인 돈을 받으러 찾아간다. 만나자마자 다짜고짜하는 말이 "돈 갚아"다. 참 까칠하다.

사실 며칠 전 이 영화의 개봉 소식을 듣고 '가을에 어울리는 로맨틱 영화쯤?'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로맨틱 영화일 수도 있다. 달콤하고 감미로운 로맨틱 코미디까지는 아니어도 그래도 나름대로 낙엽의 우수와 같은 색감의 로맨틱 영화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난 약간은 다른 관점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난 <멋진 하루>가 2008년 현재 대한민국의 한 단면을 아주 잘 보여주는 영화라고 보았다. 물론 이 영화의 원작은 일본 작가 다이라 아츠코의 소설이다. 원작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원작과는 다른 2008년 대한민국, 현재 모습이 이 영화에 잘 투영되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영화의 시작은 경마장에서 출발한다. 어둡고 침침하고 복잡하고 무채색 건물 속에는 경마에 한탕 걸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침부터 어깨를 웅크리고 모여 있다. 좁은 복도를 지나는 행인의 어깨가 자신의 몸에 조금만 스쳐도 눈을 부라리며 금방이라도 욕을 내뱉을 것만 같은 살벌한 분위기다. 그들은 무채색의 얼굴, 무표정의 얼굴로 경마장을 배회한다.

그곳에서 희수(전도연)는 병운(하정우)을 찾아낸다. 병운을 닦달해서 함께 경마장을 나서는데 희수의 자가용 유리에 사채 대출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신경질적으로 스티커를 뜯어내는 희수.

하늘은 온통 잿빛이다. 건물은 온통 회색빛. 스모키 화장으로 덮인 희수의 얼굴 만큼이나 무겁고 어둡다. 신호대기에 멈춰 있던 도중 '떼인 돈 받아줍니다'라는 광고를 본 희수는 한숨처럼 내뱉는다.

"세상, 정말 싫다."

병운은 희수에게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돈을 꾸러다닌다. 그들이 만나는 사람은 외로운 미모의 여사장, 피해의식으로 가득한 고급 호스티스, 애정이 없는 남편과 함께사는 부잣집 며느리 후배…. 가진 것은 많지만 실제로 가슴속은 텅 비어있는 사람들이다.

그 외로움을 물질적인 만족으로 채우려 하지만 그것이 거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남보기에는 화려해 보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욕망과 허상이 만들어낸 거품과 같은 것이다.

앞서, 경마장에 모여든 사람들이 가진 것도 없이 '한탕'이라는 거품을 쫒는 사람들이라면 이 여자들은 남보다 가진 것은 있지만 역시 '욕망'이라는 거품을 쫒는 사람들이다. 마치 콸콸 쏟아부을 때는 잔에 가득찬 것 같지만 조금 지나면 다 날아가버리는 맥주 거품처럼. 원래 맥주가 아니었는데 따를 때는 맥주처럼 보인다. 거품이 날아간 뒤 맥주는 싱겁고 씁쓸하기만 하다.

<멋진 하루>와 맥주와의 관계?

이 영화에서는 맥주 마시는 장면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내가 맥주를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맥주를 마시는 장면들이 유난히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첫째, 병운이가 고급 아파트에 사는 세미를 방문했을 때 세미는 병운에게 자신의 맥주는 특별히 '거품을 많이 낼 것'을 주문한다. 마시지도 않을 맥주를 주문하고 그녀는 네일아트에 공을 들인다. 세미의 집은 굉장히 화려해 보이지만 불면 날아가버릴 것 같은 공중누각과 같다. 불면 사라지는 맥주 거품처럼.

둘째, 세미의 아파트를 나서며 그곳에서 우연히 병운의 대학시절 스키 동아리 후배인 홍주네 부부를 만났을 때다. 차나 한 잔 가볍게 하자며 레스토랑에 간 그들은 그 후배 남편의 강권으로 맥주를 마신다. 네 사람 사이에 아슬아슬하고 미묘한 기류가 흐르는 동안 후배의 남편은 맥주를 연거푸 마신다.

병운의 후배, 홍주는 부잣집 며느리로 남보기엔 성공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녀의 남편에게는 불륜 상대가 따로 있다. 병운과의 관계를 심하게 모독하는 남편의 조롱에도 그녀는 남편에게 반격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부잣집 며느리라는 '거품' 때문이다.

셋째, 바이커족인 병운의 사촌네 집을 방문했을 때다. 환한 대낮인데도 바이커들이 모여서 고기와 술을 먹으며 흥청거리고 있는 그곳은 서울과는 동떨어진 '별천지'다. 여기에서도 역시 맥주가 등장한다. 사촌의 부인은 대낮부터 맥주를 마시고 낮잠을 자고 있다.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남편에게 맥주를 차가운 맥주로 바꿔달라고 부탁한다. 세상의 아웃사이더를 위로하는 맥주라고나 할까.

여기에서 그쳤다면 이 영화는 절대 '멋진 하루'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멋진 하루는 비로소 그 다음부터 시작된다. 

평소 병운을 삼촌처럼 잘 따르는 조카 소연이를 데리러 갔다가 희수는 정학을 받은 벌로 교실바닥에 붙은 껌을 떼고 있는 소연을 아무 말없이 도와준다. 영화에서 계속 끌려다니기만 하던 희수가 가장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장면이기도 하다.

가장 인상깊었던 지하철 장면 ⓒ 영화사봄


희수의 자동차가 견인되는 바람에 견인소까지 가는 길. 지하철에서 둘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지만 희수는 병운의 효도르 꿈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흘린다. 병운이가 측은해서인지 아니면 이런 자신이 한심해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울음을 삼키는 희수에게 병운은 말없이 손수건을 건넨다.

석양빛이 잔잔하게 기울어가고 있는 배경으로 지하철 창문에 비친 두 사람의 실루엣이 아마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병운의 초등학교 동창에게 돈을 꾸러간 두사람. 어느덧 해는 다 졌다. 이제는 지쳤다. 아침에 약속한 대로 그 동창은 돈을 마련해 가지고 올 것인가. 이혼녀에 혼자 아이를 어렵게 키우고 있는 그녀가 과연 약속을 지킬까.

그러나 그녀는 밝은 얼굴로 나타나 돈 40만 원을 희수의 손에 쥐어 준다. 밝은 웃음을 띠며. 돈 가진 사람의 위세도 아니고, 가진 사람의 허풍도 아니다. 이 장면이 있기에 참으로 멋진 하루가 될 수 있다.

희수는 병운의 초등학교 동창으로부터 40만 원을 받는다. ⓒ 영화사봄


영화 초반은 까칠했지만...

멋진 하루는 그렇게 끝이 난다. 병운을 지하철 역에 내려다주고 난 뒤 그녀는 떠난다. 희수는 병운이 희수 몰래 고쳐놓은 자동차 와이퍼를 본다. 아침에 경마장에서 사채 대출 스티커를 신경질적으로 떼다가 망가뜨린 와이퍼다. 병운은 희수에게 소연이를 데리러 가는 길에 "왠지 너만은 변하지 않았을 거 같다"고 말한다.

그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웠던 마음을 희수는 위로받게 된다. 굳이 누구랄 수는 없지만 세상을 향해 뻗어있던 가시를 다시 안으로 거둬들인다. 영화 초반 사납고 날카로웠던 희수의 눈매와 마지막 장면에서의 희수의 눈매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다시 맥주 이야기. 거품만 있는 맥주가 있을 수 있을까. 그런데 요즘은 거품이 진짜 맥주행세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또 그런 거품이 대접받고 잘 살고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거품은 거품일 뿐. 언젠가는 반드시 사라진다. 정말 '변하지 않을' 그 무언가가 더 빛나는 세상이 올까. 화려하지도 고상하지도 않지만 진실한 그 무엇이.

멋진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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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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