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궂은 한자말 덜기 (52) 불문

[우리 말에 마음쓰기 455] '시대를 불문', '남녀불문' 다듬기

등록 2008.10.21 12:09수정 2008.10.21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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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시대를 불문하고

 

.. 여기서 농민 전쟁 시대의 고문이 훨씬 원시적이며 야만적이고 나치 체제의 탄압 쪽은 훨씬 문명적(?)이라고 해 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요는 시대를 불문하고, 한계 상황 안에서 예술가가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행동했는가 하는 점일 텐데 이 점에서 도이치 르네상스와 표현주의는 확실히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듯 싶다 ..  《사까자끼 오쯔로오/이철수 옮김-반예술》(합동기획,1983) 11쪽

 

요즘에도 ‘요(要)’라는 말을 쓰는 분들이 퍽 됩니다. 으레 나이든 분들입니다. 그렇지만 ‘요는’이라고 하는 말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어요. 이 말이 우리 말이 아니며 우리가 쓸 만한 말이 아닌데다가, 일본사람이나 쓰는 말임을 차츰차츰 느끼고 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 말투 ‘요는’은 뿌리뽑히지 않습니다. 일본책을 우리 말로 옮기는 분들이 생각없이 일본글을 한글로만 바꾸면서 나타나고, 일본말을 어설피 배운 분들이 한국사람한테 일본말을 가르치면서 얼떨결에 내뱉곤 합니다.

 

아무튼, “농민 전쟁 시대의 고문”은 “농민 전쟁 시대에 했던 고문”으로 손봅니다. “원시적(原始的)이고 야만적(野蠻的)이고”는 “덜 떨어지고 무시무시했고”나 “케케묵고 끔찍했고”로 다듬고, “나치 체제의 탄압(彈壓) 쪽은”은 “나치가 했던 탄압은”이나 “나치가 짓밟고 괴롭힌 일은”으로 다듬습니다. “무슨 소용(所用)이겠는가”는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로 손질하고, “한계(限界) 상황(狀況) 안에서”는 “막다른 골목에서”나 “벼랑 끝에서”로 손질하며, “한 인간(人間)”은 “한 사람”으로 손질합니다. “행동(行動)했는가 하는 점일 텐데”는 “움직였는가 하는 대목일 텐데”나 “했는가 하는 대목일 텐데”로 고쳐쓰고, “이 점(點)”은 “이 대목”으로 고쳐쓰며, “확실(確實)히 공통점(共通點)을 가지고 있는 듯 싶다”는 “크게 비슷한 듯 싶다”나 “틀림없이 비슷한 곳이 많다”로 고쳐씁니다.

 

 ┌ 불문(不問)

 │  (1) 묻지 않음

 │   - 과거 불문 / 불문에 부치다 / 임이네는 불문의 존재였다

 │  (2) 가리지 않음

 │   - 노소 불문 /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 장소를 불문하고

 │

 ├ 시대를 불문하고

 │→ 시대를 묻지 않고

 │→ 때를 가리지 않고

 │→ 때를 따지지 않고

 │→ 시대를 넘어

 │→ 어느 때이든

 │→ 어느 때가 되었든

 │→ 어느 때가 되어도

 │→ 어느 때라 해도

 │→ 어느 때나

 │→ 때가 어떠해도

 └ …

 

묻지 말라고 하는 말을 ‘不問’으로 적는다면, 물으라고 하는 말은 어떻게 적어야 할까요. 가리지 않는다는 말도 ‘不問’으로 적으면, 가린다고 하는 말은 어떻게 적어야 할는지요.

 

물으니 ‘물음’입니다. 안 물으니 ‘안 물음’입니다. 따지니 ‘따짐’입니다. 안 따지니 ‘안 따짐’입니다. 가리니 ‘가림’이요, 안 가리니 ‘안 가림’입니다.

 

 ┌ 과거 불문 → 지난 일 안 물음

 ├ 불문에 부치다 → 묻지 않다 / 묻지 못하게 하다

 ├ 불문의 존재였다 → 아무도 묻지 않았다 /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 누구나

 └ 장소를 불문하고 → 자리를 가리지 않고

 

‘불문’ 같은 한자말은 사람들에 따라 여러 가지로 쓸 수 있는 말길을 막습니다. 한자말이어서 나쁘다거나 한자이니 쓰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쓸 만한 한자말은 쓰고, 한자든 알파벳이든 우리 삶을 북돋운다면 넉넉히 쓸 일입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 말길을 트고 우리 삶길을 여는 말을 알뜰히 골라서 살려쓰고 북돋워야 합니다. 말길이 막히면 우리 생각도 막힙니다. 글길이 닫히면 우리 넋과 얼도 닫힙니다. 생각을 열고 마음을 열어 이웃을 마주하고 동무들을 껴안듯, 우리가 함께 나눌 말을 헤아리고 우리가 서로 주고받을 글을 짚어야 합니다.

 

삶을 가꾸지 않는 가운데 말을 가꿀 수 없고, 말을 가꾸지 않으면서 삶을 가꾸지 못합니다. 함께 가꾸는 삶과 말이고, 서로 가꾸게 되는 말과 삶입니다.

 

가려 쓸 말은 가려 써야 합니다. 솎아낼 말은 솎아내야 합니다. 널리 쓸 말은 널리 쓰고 북돋울 말은 북돋워야 합니다. 알량하니 덜어냅니다. 넉넉하고 푸지니 넉넉하게 껴안고 살뜰히 돌봅니다.

 

ㄴ. 남녀불문

 

.. 그뿐 아니라 남녀불문하고 많이 먹는 사람은 일을 잘 합니다 .. (전여옥) / 《여성시대》(문화방송) 2003년 10월호 87쪽

 

어느 회사 사장이 한 말이라는데, 이 말은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못합니다. 꼭 어떤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어떻다 하는 생각은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굳은 말이라고 느껴요. 먹기만 즐기는 사람이 많은 요즘 세상이기에, 아무리 잘 먹는다고 해도 일까지 잘하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또한 ‘잘 먹는다’는 잣대가, 얼마나 먹어야 잘 먹는다는 셈인지 모르겠어요. 사람마다 잘 먹는다는 잣대는 다르니까요.

 

 ┌ 남녀불문하고

 │

 │→ 남녀 가리지 않고

 │→ 남자든 여자든

 │→ 남자거나 여자거나

 │→ 누구든지

 └ …

 

‘-불문’을 붙이는 말투는 하루하루 사라지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이 말투를 떼어내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많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 말투를 떼어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어버이가 되어 아이들한테 이런 말투를 물려주는지 모릅니다. 글써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소설이니 시니 수필이니 무어니에 이런 말투를 아무 거리낌없이 쓰기도 하고요.

 

“묻지 않고”를 한자로 옮긴 ‘不問’이에요. 따로 묻지 않는다는 말이니 “가리지 않다”를 가리키는 셈이고, “남녀 가리지 않고”로 적으면 그만인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직업을 가리지 않고”로 써 오던 말이 ‘직업불문’처럼 쓰이기도 합니다. “안 따짐-안 가림-안 봄”으로 적어도 될 텐데, ‘나이불문’ ‘학력불문’ ‘위치불문’처럼 쓰이기도 합니다. ‘-든’이나 ‘-거나’라는 토씨를 붙여서 “많은 나이든 적은 나이든”처럼 적거나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처럼 적어도 잘 어울립니다.

 

예부터 익히 써 온 말투는 너무 오래 써서 낡았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일까요. 누구나 스스럼없이 써 온 손쉬운 말은 이제는 쓸 값어치가 없다고 느끼는 우리들은 아닐까요. 얼마든지 홀가분하게 넉넉한 말과 글에 자꾸만 멍에와 굴레를 씌우면서 깎아내리는 우리들은 아닌가요.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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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1 12:09ⓒ 2008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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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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