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소통을 말하다

[리뷰] 전북독립영화제 개막초청작 <궤도>

등록 2008.10.29 19:48수정 2008.10.29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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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궤도>의 한 장면.

<궤도>의 한 장면. ⓒ 전북독립영화제

<궤도>의 한 장면. ⓒ 전북독립영화제

 

영화는 한 사람이 발가락을 이용해 담배를 말아 피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손을 대신해 발로 종이를 말고 불을 붙이는 일은 쉽지 않지만 화면 속 남자는 능숙하게 이를 해낸다. 팔이 없는 남자에게 이는 하나의 일상에 지나지 않았다.

 

남자가 담배 한 대를 말아 피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3~5분 정도. 팔이 있는 사람이라면 손을 이용해 단 몇 초 만에 담배를 피울 테지만, 이 남자에겐 그 몇 배, 몇 십 배에 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카메라는 남자의 시선 위치에서 머무르며 남자가 담배를 피기까지의 과정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오픈 신을 통해 감독은 질문을 던진다.

 

'영화의 속도는 철저히 장애인들의 삶의 속도에 맞춰져 있다. 느리다. 그럼에도 당신은 영화를 계속 볼 준비가 되어있는가?'

 

28일 막을 올린 전북독립영화제의 개막초청작으로 상영된 김광호 감독의 <궤도>는 그렇게 초반부터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양팔이 없는 최금호씨를 실제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모든 영화스태프를 길림성 동포들로 구성한 것은 철저한 감독의 의도이다. 지금껏 빠른 영화, 전문적인 촬영기법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영화는 참으로 느리고 어색하게 다가온다.

 

듣지 못하는 여자와 양팔 없는 남자의 만남

 

a  영화의 한 장면.

영화의 한 장면. ⓒ 전북독립영화제

영화의 한 장면. ⓒ 전북독립영화제

 

양팔이 없는 남자 주인공에게 어느 날 말 못하는 여자가 찾아온다. 파출부로 일하던 여자는 주인집 남자의 겁탈을 피해 그를 칼로 찌르고 산속으로 숨어 들어온다. 오갈 데 없는 그녀는 양팔이 없는 남자 주인공 집에서 신세를 지며 결국 그 집에서 살게 된다.

 

듣지 못하는 여자와 팔이 없는 남자. 영화는 이 둘이 점차 교감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특별한 갈등도 액션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화 역시 없다. 눈빛으로 교감하는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선 관객 역시 이들의 시선에 눈을 고정해야 한다. 소통이란 그런 법이다.

 

여자와 남자의 시선에 눈을 고정하면 보이는 게 하나 있다. 서로 눈을 마주치며 어색하고 민망해 하던 이들의 눈빛이 영화 종반부로 갈수록 부드러워진다는 것이다. 만지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지만 이들은 어느덧 서로를 이해하고 보살피는 사이가 된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에게서 어릴 적 듣지 못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린다. 듣지 못하는 어머니가 기차가 오는 철길에서 석탄을 줍는 걸 보면서도 남자는 내버려 두고 결국 어머니는 죽는다. 그 죄책감과 애절함, 그리움 속에서 몸부림치던 남자는 결국 듣지 못하는 여자의 눈앞에서 기차에 몸을 던진다.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될수록 장애를 되물림 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남자를 지배하고, 결국 영화 내내 등장했던 철길처럼 두 남녀의 사랑은 평행선을 달린 채 끝나고 만다. 결말에 대해선 관객의 해석에 맡기겠다는 제작진의 부연 설명이 있었지만, 영화 제목의 '궤도'가 결국은 답이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건 우리사회 '소통'문제

 

a  영화의 한 장면.

영화의 한 장면. ⓒ 전북독립영화제

영화의 한 장면. ⓒ 전북독립영화제

 

영화에선 관객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멀어져 가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가까이 있는 것처럼 크게 들린다거나 카메라가 인물을 늦게 따라가는 점 등이다. 이는 바로 실제 주인공인 최금호씨가 느끼고 보는 것을 카메라에 담아낸 것이라고 한다. 으레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 다름에 대한 관용과 이해. 바로 소통의 시작점이다.  

 

두 팔 없이 살아가는 주인공이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 그가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여자와 교감하는 모습. 그리고 그들을 정면에 내세운 감독이 관객과 호흡하는 방식은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난 후에도 여전히 완전한 이해가 힘들다.

 

하지만 듣지 못하는 여자를 이해하기 위해 귀를 막고 기타를 연주하는 남자의 모습은 관객에게 우리사회에 필요한 '소통'의 방식을 생각하게 만든다.

 

상대의 입장에서, 눈을 맞추고 이야기 하는 것. 굳이 '말'이라는 형식을 빌리지 않아도 전해질 수 있는 그 무언가.

 

'소통'이란 말을 넘쳐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소통의 부재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 모두에게 <궤도>는 불편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편하게 다가온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선샤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8.10.29 19:48ⓒ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선샤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궤도 #독립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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