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모자라다고 빵 줬는데, 그마저도 못 받았어"

경제 한파에 노숙인들 덜덜... 지원단체 관계자 "내년 급증 우려"

등록 2008.10.31 14:42수정 2008.10.31 14:42
0
원고료로 응원
a  지하도 안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노숙인

지하도 안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노숙인 ⓒ 이경태


"새로운 얼굴들이 많이 보여. 오래 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안 보이고. 하기야 이야기를 들어보면 여기가 무슨 '집합소' 같아. 어디 지방에서 폭삭 망해 온 사람, 공장 다니다가 잘린 사람…. 요새 젊은 사람들도 많지만 70대 이상 노인들도 많지."

10월 27일 오후 3시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 입구역 지하 1층에서 만난 김아무개(43)씨는 원형 쉼터에 몸을 뉜 노숙인 5~6명을 쓰윽 훑어본 뒤 기자에게 조용하게 말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김씨 주변의 노숙인들은 박스와 신문지, 얇은 모포 등을 덮은 채 잠을 청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구겨진 휴지와 종이컵, 그리고 소주병들이 있었다.

김씨가 을지로 입구역 '원형 쉼터'로 흘러들어온 지 1년 6개월이 지났다. 그에겐 3년 전 노숙 이후 다시 시작된 거리의 삶이다.

"무거운 걸 져 나르다가 어깨를 다쳐서 일을 못했어. 그래서 예전에 있던 쪽방에서 나와 여기 있는 거야. 그나마 이제 좀 나아서 이번 달에 일거리를 알아보려고. 날 더 추워지기 전에 들어가야 하는데 요새 일거리가 없어서 걱정이야."

같은 날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만난 이아무개(47)씨도 "요즘에는 지방에서 올라와서 얼굴을 잘 모르는 애들이 많다"고 말했다.

"오늘(27일) 점심 무료급식 때 밥이 모자라 빵을 나눠줬는데 그마저도 못 받았어. 영등포역에서 2년, 서울역에서 2년 가까이 있었는데 요새는 지방에서 올라온 애들이 너무 많아졌어."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현재 서울시 전체 노숙인 가운데 40% 정도는 지방에서 올라왔다. 지방에 비해 서울의 노숙인 지원 시설이 더 좋고 무료 급식 제공 기회가 더 많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폭삭 망해 온 사람, 공장에서 잘린 사람... 새 얼굴 많아"

a  서울역 인근에서 생활하는 노숙자들이 서울역 광장에서 한 선교단체가 제공하는 무료급식으로 점심을 들고 있다(자료사진).

서울역 인근에서 생활하는 노숙자들이 서울역 광장에서 한 선교단체가 제공하는 무료급식으로 점심을 들고 있다(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남소연


29일 밤 서울역과 용산역에는 줄잡아 100여 명이 넘는 노숙인들이 있었다. 


용산역 대합실에서 지팡이를 잡고 TV를 보고 있던 한 50대 노숙인은 "반쯤 죽은 몸이다, 빨리 죽어야지"라고 여러 번 되뇌었다. 용산역 지하철 출구 앞 벤치에 홀로 앉아 있던 노숙인은 끈도 없는 신발을 걸치고 있었다.

밤 9시가 넘어가자 용산역과 전자상가를 잇는 통로, 용산역사 앞 공원 등지에는 '관'처럼 생긴 박스 20개 정도가 오밀조밀하게 자리를 잡았다. 한밤을 지낼 노숙인들의 취침 공간이다.

서울역도 마찬가지였다. 공사가 막 끝난 서울역 6~9번 출구 통로에는 박스를 이불 삼아 20명이 넘는 노숙인들이 줄지어 누워 있었다.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이들은 옛 서울역사 앞에서 무릎을 오그린 채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취재에 동행했던 '노숙인 다시 서기 지원센터'의 박민구 활동가는 "이 정도는 9월 초 파악했던 노숙인들의 절반 정도"라며 "날씨가 추워져 바람을 막을 수 있는 곳에 피해 있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또 다른 활동가는 "겨울이 되면 노숙인들이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때문에 통계상 수치와 실제 숫자와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경기 불황 따른 '실직형 노숙인' 증가 가능성 있어"

a  서울역 광장을 바삐 지나는 시민들 사이로 한 노숙자가 배회하고 있다(자료사진).

서울역 광장을 바삐 지나는 시민들 사이로 한 노숙자가 배회하고 있다(자료사진). ⓒ 남소연

노숙인 지원 단체 관계자들은 경기 불황으로 노숙인 숫자가 급격히 늘 가능성을 우려했다. 더구나 서울시의 노숙인 쉼터가 1999년 120곳에서 현재는 42곳으로 줄어 수용 능력이 상당히 떨어졌다.

'노숙인 다시 서기 지원센터'의 이형운 현장지원팀장은 "최근 조짐이 심상치 않다"고 말했다. 이 팀장은 "쉼터·상담보호센터 등에만 노숙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PC방·만화방이나 쪽방 등에 있는 잠재적 노숙인도 있다. 이들이 다시 거리로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는 "경제불황으로 인한 구조조정이 가시화되면, IMF 구제금융 위기 직후 급증했던 '실직형 노숙자'들이 다시 늘어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따라 빈곤층은 가구당 매월 약 80만 원 정도를 받는다. 그러나 일자리가 끊기면 이들이 노숙자로 떨어지는 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는다.

노숙인들은 1개월에 15일간 매일 2시간씩 자활 근로를 하면 약 30만 원 정도를 벌 수 있다. 그러나 여러 사정으로 실제 자활 근로를 하는 노숙인의 숫자는 지난 9월의 경우 1100명 정도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매월 30만 원 정도의 수입으로는 안정된 주거 환경을 갖추기 어렵다.

이 팀장은 "경기 침체가 가속화되면서 차차상위계층에서 차상위계층으로, 차상위계층에서 수급권자로, 수급권자에서 노숙인으로 몰리는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고 전했다.

"우리는 2008년에 살고 있다. 핸드폰·MP3 등을 들고 다니며 사용했던 이들이 한순간에 완전히 다 깨졌다. 동굴에도 못 들어가는 원시적인 상황에 접한 것이다. 이들에게 양말 하나, 속옷 한 장 더 준다고 해서 쉽게 노숙에서 빠져나와 회복되겠나. 이들을 위한 예산과 이들의 자활을 위한 사람들의 '기원'이 있어야 한다."

[최근주요기사]
☞ [가정경제 119] 태초에 부자아빠는 존재하지 않았다?
☞ YTN의 날, 그들의 사랑 고백은 계속됐다
☞ 국정원, 임무 범위 확대 시도... 야당 "5공 회귀"
☞ [단독] "공정택, "국제중 보류" 합의 후 배신했다"
#노숙인 #서울역 #빈곤층 #복지정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7년 5월 입사. 사회부·현안이슈팀·기획취재팀·기동팀·정치부를 거쳤습니다. 지금은 서울시의 소식을 전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추석 때 이 문자 받고 놀라지 않은 사람 없을 겁니다 추석 때 이 문자 받고 놀라지 않은 사람 없을 겁니다
  2. 2 아직도 '4대강 사업' 자화자찬? 이걸 보고도 그 말 나오나 아직도 '4대강 사업' 자화자찬? 이걸 보고도 그 말 나오나
  3. 3 우리 모르게 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는 왜? 우리 모르게 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는 왜?
  4. 4 [단독] "김건희 사기꾼 기사, 한국대사관이 '삭제' 요구했지만 거부" [단독] "김건희 사기꾼 기사, 한국대사관이 '삭제' 요구했지만 거부"
  5. 5 참 순진한 윤석열 대통령 참 순진한 윤석열 대통령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