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무기의 눈물

[조선왕조실록 감성으로 읽기]

등록 2008.11.03 10:32수정 2008.11.03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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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경복궁 경회루

경복궁 경회루 ⓒ 이윤우

경복궁 경회루 ⓒ 이윤우

개의 새끼는 강아지, 소의 새끼는 송아지, 말의 새끼는 망아지다. 그렇다면 용의 새끼는 뭐라고 할까? 송아지가 자라면 소가 되고 강아지가 자라면 개가 되고 망아지가 자라면 말이

되는데, 용도 과연 그러할까?

 

서양의 용인 드래곤은 알을 낳는 것으로 여겨지는 모양이라서 용이 알을 깨고 나오는 모습이 영화속에서 종종 보이지만 우리가 사는 동양은 좀 다르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용에게도 새끼가 있다고 한다. 본 적이 없으니 그런가보다 할 수밖에는 없지만 용의 새끼가 자라 용이 된다니 좀 의외다.

 

용은 자라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느닷없이 나타나고 변신하는 건줄 알았는데. 눈동자를 찍어주면 그림 속에서 솟아나고 세기도 힘든 세월을 웅크리고 기다리면 될 수도 있을 그것이 용인줄 알았더니.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얘기들처럼 용에게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나고 자라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는 듯 보였다. 이 때문에 어쩌면 용이 되기 위해 지난하고 처절한 과정을 거치는

이무기가 용의 새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갖은 애를 써도 용이 되지 못하는 이무기 얘기가 더 많은 것 같으니 또 그런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과연 용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 같은 인간들의 도전을 받거나 올바른 삶(?)을 살고 있는있는 자에게 여의주를 가져다 주거나 누군가의 꿈에 태몽으로 나타나 크게 될 아이를 점지해주는 것 같은 일들이 그것일까?

 

용은 하늘에 산다고 한다. 그리고 물에도. 그런데 그들은 땅위에도 그들과 비슷한 용이 산다는걸 알까? 용이 되기 위해 길고 핏기어린 삶을 선택한 이무기가 살았다는 것도? 이무기는 용이 되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장담컨데 이무기는 용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줄 모르는게 분명하다.

 

저 소 같은 위인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

 

"정안공이 군사를 거두어 마전 갈림길의 냇가 언덕 위에 말을 멈추고, 소리를 놓아 크게 우니, 대소 군사가 모두 울었다." -정종  2년(1400년) 1월 28일

 

정종 2년인 1400 1월 28일, 실록에는 회안공 이방간을 토산으로 추방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방간은 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이다. 정종 이방과의 동생이자, 태종 이방원의 형이었고, 정도전 등을 제거한 1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과 함께 한 동지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1차 왕자의 난 이후 세제 자리를 꿰찬 이방원을 겨냥해 칼을 들고 나선 사건이 벌어진 것이 이방간을 토산으로 내몬 이유였던 것인데, 바로 이 사건을 가리켜 2차 왕자의 난이라 부른다.

 

이방간도 충분히 예상했겠지만 그가 군사를 일으키자마자 그는 그를 아는 이들의 분노와 놀라움을 한몸에 떠안아야만 했는데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태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태조는 "네가 정안(이방원)과 아비가 다르냐? 어미가 다르냐? 저 소 같은 위인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라며 또 다시 아들에 의해 아들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며 한탄했다.

 

이방간은 물론 실패보다야 성공쪽에 더 무게를 두고 싸움에 나섰겠지만 당시 이방원을 꺾을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방간은 형을 죽이지 말라는 이방원의 거듭된 명 덕분에 목숨을 구하고 도망했지만 결국 갑옷을 벗고 활과 화살을 버린채 누워버리는 것으로 항복했다.

 

방간을 잡고 싸움이 종료되자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는 길에 방원은 말을 멈추고 크게 울었다. 2차 왕자의 난은 이방원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더 이상 그에게 적수는 없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준 것이다. 그런 사건을 겪고 난 방원의 행동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그의 모습과는 상반된다. 그는 승리를 축하하고 군사들을 격려한 것이 아니라 목을 놓아 울었다.

 

그의 눈물은 거짓일 수도 있고, 기록 자체가 그럴 수도 있다. 게다가 그는 이후 왕이 되어서도 신하들 앞에서조차 눈물을 감추지 않는 사람이었던데다가 눈물을 이용한다는 인상을 주기까지 할 정도였으니 거짓 눈물이었을거라는 추측이 지나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이복동생들이었지만 동생들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형제와 칼을 겨눌 수밖에 없었던 이방원의 상황이 충분히 이해가 되는터라 거짓이라고 생각하기가 무척 힘이 든다.

 

이방원은 이무기였다. 용이 되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던 이무기. 그는 용이 되기 위한 세월을 웅크리고 기다리고 있기보다 떨치고 나서는 쪽을 택했다. 그렇게 차지한 용의 자리가, 그 용의 삶이란 것이 과연 그가 기대하던 것과 부합하는 것이었을까 하는 것이야 논외로 밀어두더라도 그 자신 때문에 다치고 죽어야 했던 사람들을 그가 평생동안 잠시라도 잊을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나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태종은 1411년,  그가 왕위에 오른 지 10여 년을 넘긴 시점에서 1차 왕자의 난에서 동생들이 죽었던 일에 대해 '지금까지 하늘에 고하고 뉘우친다'라고 털어놓는다. 그는 다른 이들을 죽여야만 했던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하거나 당연했다고 여기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라는 게, 솔직히 얄팍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긴 해도 태종은 늘 어쩔 수 없었지만 뉘우치고 있다는 말로 결코 떳떳하지는 못했음에 대해 털어놓곤 했다.

 

왕자의 난이라는 이름으로 칼을 겨눴던 형제 이방간을 태종은 죽이지 않았다. 안타까움이었는지 죄책감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형제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태종은 이방간을 죄주고, 혹은 죽이라고까지 하는 신하들의 수없는 청을 들어주지 않았고,

 

이방간은 태종이 죽기 1년 전, 병으로 죽는다. 안타깝게도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바라보는 태종의 모습은 잔혹한 카리스마를 지닌 왕의 그것이다. 그 역시 다른이의 목숨을 빼앗는 일이 절대 쉽지 않았을거라는 것에 쉽게 공감하지 못할 만큼. 하지만 만약 그가 그저 죽이기만 즐기는 잔혹한 왕이었다면 그의 이름 곁에서 당연히 그의 몫인양 붙어있는 카리스마. 라는 말 같은 것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저 미쳤다. 라는 소리나 들으면 그나마 다행일까.

 

그는 능력있는 왕이었다. 그가 똑똑했고 강했다거나 하는 사실을 빼더라도 세종을 왕위에 올려놓고 건국한 지 불과 30 여년만에 찬란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게 한 기적의 배경에서 태종을 끌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 때문에 그에 대해, 그가 가지게 된 평판에 대해 부당한 일이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저 가만히 앉아 거저 얻어지는 평판이란게 어디에 있겠는가. 잘못을 했으면 욕을 먹는게 당연한거고, 잘한 일이 있다면 칭찬을 받는 것도 그렇다. 태종 역시 역사란 풍랑속에서 한때 살았던 자로서 그 당연함을 피해갈 수 없다. 하지만 이무기의 눈물이라고 해서 동정 받을 가치조차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발목을 잡는다.

 

이무기의 눈물... 따지고 보면 그토록 이기적인 눈물이 없을 듯도 한데, 용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이타적인 것으로 보여지리란 기대는 태종 자신조차 한적이 없었을것 같은데.

 

욕심을 동정하다

 

태종은 56살에 죽었다. 거의 한평생을 전장에서 살았다 해도 모자람이 없는 아버지 이성계는 74살에 죽었고, 형인 정종은 63살에 죽었으며 태종과 마찬가지로 사냥과 술, 여자를 좋아했던 그의 아들 양녕대군이 69살에, 둘째아들인 효령대군은 자그마치 91살에 죽었는데도 태종은 56살에 죽었다.

 

56살이라는 나이는 종합병원이라 불릴만큼 많은 병을 안고 살았던 세종보다 고작 2살이 더 많은 나이다. 수명에는 어느정도의 유전과 가족력이 작용한다. 아버지와 아들들의 수명을 보면 태종은 충분히 오래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았고 사냥을 좋아하고 활발히 움직이는 삶을 살았던 그는 비교적 건강한 편이기도 했다.

 

창병, 즉 종기가 자신의 나이 서른 여섯에 열번이나 났다며 온천행을 말리는 신하들에게 투정을 하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지만 그 외에 태종에게 이렇다하게 눈에 띄는 병은 없었다. 그런데 태종은 갑작스레 몸져 누운지 20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불과 일주일쯤전에 세종과 사냥을 하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으니 앓고있던 지병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몸져눕기 넉달전쯤에는 두명의 여자를 맞아들이기까지 했으니 분명 건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체 무엇이 그를 그렇게 일찍, 병명도 남기지 않은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몰고 간것일까. 그것이 그가 차마 털어놓지 못했던 막대한 스트레스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가는 일일까? 결국 그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변명하던 그 일이 그의 마음 깊은 곳에 그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할만큼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고는 시간을 따라 조금씩 그 상처를 벌리고 있었을 거라고 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그의 욕심을 동정한다. 진심이든 거짓이었든 자신의 남은 세월을, 자기 자신에게조차 변명하며 살게 만든 그 욕심을. 살아서도 죽은자들의 차가운 숨결 사이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을, 그 욕심을.

 

태종우

 

태종우라는 말이 있다. 태종이 죽은 음력 5월 10일에 내리는 비를 말하는데, 태종이 죽은 후 거의 300여년이나 지난 경종 3년의 기록에서 태종우라는 말을 찾아 볼 수가 있고, 그 후 영조 40년, 1764년에 또 한번 태종우가 등장한다.

 

이날 약간의 비가 내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선조께서 주신 것이다" 하였다. 매년 이날이면 문득 비가 내리니, 사람들이 '태종우'라고 불렀기 때문에 임금이 언급한 것이다.

 

대체 언제부터 태종우라는 비(?)가 생긴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후부터 태종우는 기정사실화 되는데, 영조의 손자인 순조 때 홍석모가 지었다는 세시풍속서인 <동국세시기>에 모습을 드러내더니 고종 때에도 이유원의 문집인 임하필기에는 '날씨가 이와 같이 가무니 백성들이 장차 어떻게 산단 말인가. 내가 마땅히 하늘에 올라가서 이를 고하여 즉시 단비를 내리게 하겠다' 라고 했다는 태종의 말까지 인용된다.

 

태종우의 전설속에서 태종은 백성을 걱정하는 좋은 왕이다. 하지만 어째, 바다의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고 유언했다던  문무왕과는 풍기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뭐랄까, 죄책감 혹은 회한의 느낌이랄까? 사람들을 죽여가면서까지 가져야 했던 조선이라는 나라, 용이 앉는 자리 용상. 태종은 아마도 더 잘하지 않으면 안될 거라며 자신을 채찍질 했을지도 모른다. 더 잘하지 못하면 역사는 자신을 폭군으로, 욕심만 많았던 살인자로 기억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용서받았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를 알고, 그의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태종우를 맞으며 그를 이해했던 것 같다. 이무기의 눈물, 그 소름끼치게 짜고 뜨거운 것이 태종의 얼굴위를 가르고 내려올 때 그가 느꼈을 법한 그 끔찍했을 기분에 대하여.

2008.11.03 10:32ⓒ 2008 OhmyNews
#실록 #태종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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