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겨울이 온 이후로, 이 뜨끈한 옥장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밥도, 컴퓨터도, 독서도 무조건 이 곳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은 채로 진행된다.
이유하
"안녕하세요. 3층 주인집입니다. 내일 영하 날씨로 인하여 보일러 동파가 예상됩니다. 온수 물을 조금 톡톡 떨어지게 꼭 틀어놓으세요. 오늘 밤부터 내일 외출할 때에도 온수 물로 하고 외출하세요. 만약 보일러 동파되면 주인집 책임 없음. 꼭 온수로 틀어 놓으세요."그 사이에 이런 문자가 왔다. 아주머니는 나의 추위보다는 보일러가 더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내가 보일러가 조금 이상하다고 하자 주인집은 부랴부랴 빌라 전체 사람들에게 단체 문자를 보냈다.
이어서 옥탑으로 올라오는 아주머니의 발소리가 들렸다. 아주머니는 문이 열리는 동시에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아고, 이래 추워서 원"을 연발했다. (여기 살고 있는 나는… 쩝) 괜히 버름했다. 그러곤 속사포 같이 나를 다그쳤다.
"보일러는 안 틀고 살아요?"그건 물음보다도 어이없음에 더 가까운 말투였다.
"이렇게 추운 날엔 보일러를 꼭 틀어야 해요. 그러다가 보일러가 얼기라도 하면 내가 다 책임질 수도 없는 일이고.""아니, 틀어도 별로 따뜻하지 않아서…."나는 목소리는 점점 땅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러더니 아주머니는 내가 꼼꼼하게 덮어놓은 이불을 확 젖히면서 이렇게 말했다.
"보일러는 안 틀고, 자기는 옥장판에서 자는 거예요?"쿠쿵. 내가 애써 덮어놨는데, 굳이 들춰낼 줄이야. 게다가 요즘에 전기장판을 안 쓰는 자취생이 어디 있다고! 아주머니는 날카로운 눈으로 방을 재빠르게 둘러봤다. 그러고는 물도 다 틀어봤다. 어머나! 공교롭게도 추위를 이기지 못한 온수가 그만 얼어버린 게 아닌가. 사실 그날은 서울 기온이 영하 십몇 ℃까지 내려가고, 눈도 휘몰아치던 12월 5일이었다.
[라운드 3 . 때린데 또 때리기] "보일러 고장 나면, 아가씨가 다 물어야 해요!""아니, 언제부터 온수가 안 나온 거예요?""(기어들어가듯) 오늘 아침에는 나왔는데요.""이걸 어쩔 거야. 보일러 수리 부르면 아가씨가 다 물어야 해요."원래 내가 다 무는 건가? 내가 정말 잘못한 건가? 소심한 마음이 땅굴을 파고 들어가 대적할 만한 힘을 가지지도 못했다. 나는 연신 죄지은 사람마냥 안절부절 서 있었을 뿐이다. 아주머니는 3층에서 전기스토브를 들고 와 12시가 다 되어가는 한밤중에 보일러를 녹이네 어쩌네 부산을 떨었다. 그래도 온수는 깜깜 무소식.
춥기도 하거니와 어두워서 당최 앞이 보이질 않자, 일단 주말까지 지켜보자며, 밖에 나가더라도 보일러는 꼭 틀고, 온수가 혹시 나올지도 모르니까 수도꼭지도 열어놓고 나가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나는 채 30분이 되지 않는 시간에 받은 연속 공격에 힘이 쭉 빠져서 주저앉았다. 괜히 억울했다. 뜨끈하게 방이 데워졌으면 왜 보일러를 안 틀었겠냐고! 돈은 돈대로 나가고, 따뜻하지도 않고, 억울함에 방바닥을 박박 긁었다.
그렇게 온수가 나오지 않는 이틀 동안, 따뜻한 물 대신 꽁꽁 얼어붙은 '냉수'에 주전자로 끓인 물을 더해, 세수도 하고 머리도 감고 그랬다. 아, 없으면 그 소중함을 안다고 물 한 방울이 어찌나 아쉽던지.
다행히 이틀이 지나자 비너스의 샘이 터지듯(영화 <맘마미아> 마지막 장면에 나온다) 갑자기 '구릉구릉 푸콰'하는 소리가 나면서 온수물이 터져 나왔다. 심봤다! 나는 만세를 외치면서 온수를 부여잡고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이 녀석 기특하게도 혼자 녹았구나!
따뜻한 물을 쓸 수 있다는 안도감보다도, '아! 보일러가 고장 나지는 않았구나. 물어내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나를 더 기쁘게 만들었다.
그날 이후 주인아주머니는 몇 번이고, 물은 잘 나오는지, 보일러는 잘 돌아가는지 물어보곤 했지만, 이미 마음이 단단해진 나는 퉁명하면서도 '쿨'하게 "잘 나와요"라고 한마디 던진 후 멋있게 뒤돌아서서 걸어가는 배짱을 부렸다.
이제까진 혼자 산다는 기쁨에 미처 몰랐던 '집 없는 설움'을 처음 느끼면서, 많이 화가 나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바보 같아서 서럽기도 했다. 하지만 일이 모두 해결되고 보니, 주인집 ·아주머니 역시 자기 집을 아끼는 마음에서 그렇게 수선을 떤 것이고, 나로서는 추운 날에는 보일러를 틀어놔야지 얼지 않는다는 '진리'를 몸소 배운 셈이었다.
"그래, 처음 자취를 해봐서 몰랐으니까 당연한 거야." 애써 상처난 가슴에 '후시딘' 대신, 맥주 한 캔을 마시며 쓰린 마음을 위로했다.
[라운드 4. 덧붙이는 말] 옥탑방의 비밀

▲ 정말 정직하게 생겼다. 이 예민한 녀석은 난방을 '강'으로 해놓은 거보다 '외출'로 해놓았을 때 더 따뜻하다.
이유하
온수가 얼어버린 사건 이후, 옥탑방의 엄청난 비밀이 밝혀졌다. 방이 뜨끈하려면 보일러 온도를 '강'으로 해놓으면 안 되고 '외출'로 해놓아야 한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뜨거운 물을 쓰기 위해선 물을 '콸콸' 틀면 안 되고, '졸졸' 틀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이건 뭐, 청개구리도 아니고).
이 비밀은 아주머니가 지나가듯이 말한 내용이 나의 레이더망이 걸리면서 밝혀졌는데, 진짜 아주머니 말대로 물을 '졸졸' 틀어놓으니 100도가 넘을 듯한 용광로 같은 온수가 나오는 게 아닌가! (이때까진 겨우 참고 씻을 만큼의 온도였다.)
"나 그럼 이때까지 보일러는 보일러대로 틀고, 뜨거운 물은 뜨거운 물대로 못 쓰고 산 거야? 인공지능 보일러 같으니라고! 나 놀리려고 그런 거지?"
살다보면 세상엔 아이러니한 일들이 많다. 우리 집 보일러에겐 '외출'이 곧 온도 '강'이고 나는 뜨끈해지지 않는 집이지만 '보일러를 위해' 보일러를 틀고 오늘도 밖으로 나간다. 이 모든 아이러니를 알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하긴 나는 아직 이번 달 가스비가 얼마나 나올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최근 주요기사]☞ 교육청 나온 최혜원 교사 "같은 상황 와도 같은 결정"☞ 가스통 시위꾼에 돈줄 터주기 나선 정부☞ [현장] 사천시민들 "강기갑 지켜 달라"☞ 서랍 속에서 발견한 어머님 사생활☞ [엄지뉴스] 92세 할아버지가 연 크리스마스 파티☞ [E노트] 부시, 기자가 던진 신발에 맞을 뻔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