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위한 국가, 국가를 위한 국민

[리뷰] 스기타 사토시 <일본이 선진국이라는 거짓말>

등록 2008.12.30 10:22수정 2008.12.30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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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포스터. ⓒ 서울엠피필름㈜

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포스터. ⓒ 서울엠피필름㈜

최근 국내에도 개봉한 수오 마사유키 감독의 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에서는 일본인도 미처 몰랐던 일본 사법제도의 폐해를 그대로 고발한다.

 

형사사건으로 기소되면 99% 이상이 무조건적으로 유죄를 선고받는 일본의 사법제도 시스템은 자칫 무고한 이가 재판을 받지않고도 자신을 고발한 이들의 증언만으로 죄인으로 몰릴 수도 있는 치명적인 오류를 안고 있다.

 

영화가 충격적인 것은 법정으로 대표되는 공권력과 평범한 국민의 관계를 통하여, 한 힘없는 시민이 관료주의의 일방성과 폭력성에 얼마나 순식간에, 그리고 조직적으로 유린당할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이다.

 

작게 보면 진실을 왜곡하려는 법제도의 허점에 관련된 이야기지만, 단지 법이라는 테두리를 떠나 대상을 현재 '일본'이라는 국가와 그 국가주의의 폭력성에 투쟁하는 한 인권의 충돌로 대입해서 보면 이야기는 좀 더 심각해진다.

 

뜻하지 않게 치한으로 몰린 영화 속 주인공이 죄가 없다는 사실을 당사자와 관객은 알고 있지만, 정작 죄를 입증해야 할 경찰과 검찰, 판사와 변호사는 정작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 편의적으로 사건을 마무리짓고 싶어하는 공권력 앞에 힘없는 개인의 인권은 무력하다. 법정은 그들이 원하는 '가정'을 편의적으로 구체화시켜주는 곳이며, 힘없는 개인이 잘못된 진실 앞에 저항하려고 때 그가 맞서 싸워야 하는 상대는 어느새 개인이 넘보기 힘든 '국가'라는 거대한 장벽이 되어버린다.

 

수오 마사유키 감독은 우리가 흔히 '선진국'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일본 사회의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는 제도적 후진성과 비인간성의 실태를, 법질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법정을 통해 고발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선진국의 조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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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일본이 선진국이라는 거짓말 : 일본인이 파헤친 일본의 진짜 얼굴> 겉표지. ⓒ 말글빛냄

책 <일본이 선진국이라는 거짓말 : 일본인이 파헤친 일본의 진짜 얼굴> 겉표지. ⓒ 말글빛냄

스기타 사토시의 <일본이 선진국이라는 거짓말>도 현대 일본사회에 대한 '일본인의 자기 고발'이라는 점에서 수오 감독의 영화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홋카이도 축산대학 교수인 저자 스기타 사토시는 서문에서부터 "일본은 선진국이라기보다 개발도상국에 가까우며, 분야에 따라서는 오히려 후진국에 가깝다"고 단언하고 있다.

 

선진국의 기준은 무엇일까. 1인당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 혹은 군사력이 막강한 나라일까. 그러나 경제지표나 각종 눈에 보이는 수치만 높다는 것이 국가의 '수준'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일까. 저자는 단언코 NO라고 대답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선진국의 조건은 국민이 국가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얼마나 국민을 잘 섬기는가'에 달려있다.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과 복종을 요구하는 왕조나 봉건 사회와 가장 다른 부분이기도 하다. 여기서  국민을 잘 섬기는 데 있어서 판단 기준은 내적으로는 국민들의 공통된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복지'의 수준, 외적으로는 국민들의 삶과 재산을 보호하고 국가간 공통의 공존과 번영을 위한 '평화'에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일본의 정치·교육·남녀 평등·노동·환경 등의 이슈를 넘나들며 저자가 고발하는 일본 사회의 현실은 자못 냉소적이다. 여기서 모든 문제의 근본이자 저자 역시 가장 심각하게 비판하는 부분은 바로 후진적인 정치현실에 있다. 부정부패와 정경유착이 만연하고 관료주의가 지배하는 일본의 정치적 타락은, 바로 '법치주의'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행정에 있어서 법 규정보다 관료의 재량권이 우선하는 '행정지도'는 법치주의를 무너뜨린 일본 관료주의의 대표적인 악질 관행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말은 정치와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과도한 중앙집권으로 인한 권력의 집중과 부패. 무늬만 남은 남녀평등, 과도한 경쟁제일주의 교육 시스템으로 인한 폐해, 열악한 노동환경, 거꾸로 가는 환경정책 등은, 모두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뿌리에서 파생된 문제에 다름 아니다. 한국과도 연관된 과거사 반성의 문제나 국제 사회에서의 역할 역시 거론하며 일본이 자기 반성과 개혁에 소극적인 태도를 꼬집기도 한다.

 

'자기 고발'과 자아비판은 평생 신념과 아집을 고수하는 것보다 더욱 용기있는 행동이다.  이것은 조국에 대한 비하라기보다는 냉철한 자기비판에 가까우며, 오히려 '이런 딜레마를 넘을때 일본이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드러내는 글에 가까워보인다.

 

우리가 흔히 아는 '선진국'의 초라한 허상을 보여준 두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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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의 한 장면. ⓒ 서울엠피필름㈜

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의 한 장면. ⓒ 서울엠피필름㈜

대한민국에서도 한때 선진국 담론이 한창이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간 우리가 생각하는 삶의 질은 너무 물질적이거나 보여지는 부분에만 천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영화와 책을 보면서 문득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가 과연 선진국에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보다는, 무엇이 진짜 선진국인가 하는 고민이다.

 

단지 국민에게 신뢰와 희망을 주고 어려운 때일수록 국민을 보호해 주어야 할 국가가 오히려 국민을 볼모로 희생과 착취를 정당화하는 현실은 경제지표나 수치로는 설명할 수 없는, 우리가 흔히 아는 '선진국'의 초라한 허상을 보여준다.

 

여기서 책이나 영화는 그저 문제제기를 하는데 그칠 뿐, 근본적인 대안까지 제시하지는 않는다. 저자나 영화감독은 전지전능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이제 이 문제를 어떻게 개선해 갈 지 고민해가는 것은 독자나 관객의 몫이다.

 

정치 부패와 관료주의, 국가와 개인의 가치가 서로 충돌하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은 사실 일본이나 한국 혹은 미국이건 큰 차이가 없을 것이고 어쩌면 영원히 바뀌지 않을 딜레마인지도 모른다.하지만 정작 문제는 우리가 그 '불편한 진실'을 알면서도 대부분은 애써 외면하거나 어쩔 수 없이 순응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더 많다는 점이다. 

 

변화를 외면하는 것은 국가나 제도, 관료주의만이 아니라 개개인의 한계와도 무관하지 않다. 부조리한 문제를 정면으로 직시하여 바꾸려하기보다는 눈앞의 바람을 피해가려는 무사안일과 냉소주의. '‘좋은 게 좋다는 게' 세상을 잘 살아가는 요령처럼 취급받는 현실 속에서 타성에 익숙해져가는 풍조가 만연할 수록,  변화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이 된다.

 

책과 영화는 국가와 제도의 부조리를 이야기하지만, 어쩌면 정작 그 부조리를 침묵 혹은 방조하는 다수의 관객(독자)이 더 큰 문제라고 일깨워주고 있다. 어쩌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선진국이란, 국민이 국가에게 얼마나 충성하고 희생하느냐가 아니라, 국가라는 이름의 권력이 국민을 위해 쓰여지는지 국민 스스로가 얼마나 잘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개인이 오직 국가나 사회만을 탓하며 선진국 타령을 할 자격이 있는 것도, 그 다음부터일 것이다. "나는 적어도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진실을 알고 있다"는 영화 속 주인공 텟페이의 마지막 독백은, 역설적으로 '진실은 행동하는 자의 몫이다'라는 점에서 많은  여운을 남긴다.

2008.12.30 10:22 ⓒ 2008 OhmyNews

일본이 선진국이라는 거짓말 - 일본인이 파헤친 일본의 진짜 얼굴

스기타 사토시 지음, 양영철 옮김,
말글빛냄, 2008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개봉영화 #일본이 선진국이라는 거짓말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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