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세연정 거닐며 무슨 생각 하였을까

[보길도 가는 길 ②] 보길도 세연정

등록 2008.12.31 18:30수정 2009.01.02 09:56
0
원고료로 응원
a

세연정 세연정은 회수암을 배경으로 늙은 소나무에 에워싸여 있다. ⓒ 박종국


“여긴 보길도가 아니죠?‘
  “네, 방금 손님들이 내리신 곳은 노화읍 동천 항입니다. 어때요? 실망했습니까? 한 십분 정도만 가면 보길 대교를 지나고 나면 보길돕니다. 보길도는 크게 세 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지금 차를 타고 가는 섬이 노화도고, 세연정이 있는 섬이 보길도, 그리고 소안도지요. 배에서 내리자마자 육지로 접어드니까 섬에 왔다는 기분이 안 들죠? 그럴 겁니다. 고작 스물 명이 정원인 이 차에 근래 이렇게 많은 손님을 한꺼번에 모시기는 처음입니다. 정원초괍니다. 그래도 어쩝니까. 불편해도 보길도까지는 가야죠.”

“생각보다는 섬이 꽤 넓네요. 들판도 있고 산비탈에 밭도 많습니다.”
“누구나 처음 오시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코딱지만한 섬이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와 보니까 여기도 사람 사는 데라 싶대요. 지난번 왔던 어떤 분이 그럽디다. 보길도에서 공을 뻥 차면 바다에 빠진다고. 허허, 그렇게 말씀하신 분은 분명 보길도에 와 보지 않았을 겁니다. 박지성이가 롱슛을 해도 괜찮습니다.”
“그렇군요. 이제 막 지나온 노화 읍은 육지의 어느 읍내나 비슷하네요. 잠깐 스쳐보아도 없는 게 없는 것 같더라고요.”


완도-노화-보길을 잇는 다리품 구실을 하는 마을버스 기사의 입심 걸쭉한 설명이다. 그랬다. 보길도는 우리가 평소 미뤄 짐작했던 것과는 달랐다. 이윽고 버스는 보길 대교 위를 지난다. 예전에 왔을 때는 도선을 타고 건넜는데, 삼사년만에 장대한 대교가 섰다. 덕분에 거뜬하게 보길도에 다다랐다.

보길 대교가 개통 되다

a

보길도 토박이 안내꾼 김연웅씨 김연웅씨는 보길도 토박이로, 고산 유적지에 대한 세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 박종국

보길도 주차장에 도착하니 완도에서 미리 예약해 두었던 보길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대절버스는 대형이다. 일행은 잠시 기사와 수인사를 건네고 차에 올랐다.

보길 여객, 이곳 토박이 김연웅(35, 보길면)씨가 운전을 도맡았다. 그의 인상이 특출 나다. 텁석부리 수염에도 모자하나 눌러썼는데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수염이 참 인상적입니다. 마치 수염 기른 장동건 같네요. 멋집니다.”
  “다들 그러죠. 하지만 무슨 목적으로 수염을 기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깎기가 싫어서 기르고 있을 뿐입니다. 다른 의미 부여를 하지 마십시오. 자, 그럼 제 본연에 충실하겠습니다. 부탁하신 대로 오늘 일정은 세연정과 동천석실, 그리고 예송리 해수욕장과 상록수림으로 출발합니다. 보길도 전체를 그냥 눈으로만 보지 말고 마음에 담아가세요.”


그의 안내는 귓속을 꼭꼭 헤집고 들었다. 달변이었다. 예서 나고 자란 까닭도 있겠지만, 그는 고향 보길도에 대한 남다른 애향심을 가지고 있는 게 역력했다. 거치는 곳마다 세세한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이번 답사여행의 백미인 보길도, 그와 만난 게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a

세연정 세연정 현판 ⓒ 박종국


a

세연정 전경 회수담에서 본 세연정 전경 ⓒ 박종국


a

옥소암에서 바라다 본 세연정 옥소암에서 내려다 본 세연정, 연못에 떠 있는 모습이 고고하다. ⓒ 박종국


그에 말은 ‘보길도는 그냥 눈요기만 하고 가는 곳이 아니다’는 것을 애써 꼬집는 듯했다. 평소 길손은 보길도하면 고산 윤선도 선생이 생각나고, 고산 윤선도 선생하면 ‘어부사시사’와 ‘오우가’를 떠올렸다. 어부사시사와 오우가 등으로 잘 알려진 고산가사는 고산유고 6권 하별 집에 수록된 부분을 특별히 지칭한 작품이다.

답보길도는 그냥 눈요기만 하고 가는 곳이 아니다

완도 읍에서 서남쪽으로 12㎞쯤 떨어진 보길도는 상록수가 우거지고 물이 맑아 자연경관만으로도 아름다운 곳이다. 그렇지만,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유적으로 더욱 알려진 곳이다. 고산 윤선도는, 그의 나이 51세 때인 조선 인조 15년(1637)에 왕이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시는 세상을 보지 않으리라 다짐을 하고 제주도를 향하던 중, 상록수가 우거진 아름다운 섬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 섬에 터를 잡았는데, 그곳이 바로 보길도이다.

a

보길도 예송리 상록수림 고산이 보길도의 산세가 수려하고 아름답다고 극찬한 예송리 상록수림 ⓒ 박종국


a

보길도에서 본 노화도 노화도는 보길도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상주하고 있는 읍이다. ⓒ 박종국


그 후 두 차례나 귀향을 가고 벼슬을 하여 서울로 가거나 해남의 금쇄동 등 다른 곳에서 지내기도 했으나, 결국 85세로 낙서재에서 삶을 마치기까지 섬 여기저기에 세연정, 무민당, 곡수당, 정성암 등의 건물을 짓고, 바위 등 자연의 경승에 대(臺)의 명칭을 붙였는데, 이 정자와 대가 모두 25여 개소에 이른다고 한다. 고산은 이곳을 자신의 낙원으로 부용동 정원을 가꾸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오우가, 산중신곡 등 많은 가사와 유명한 어부사시사를 비롯하여 자연을 노래한 많은 시를 남겼다.

고산, 세연정에서 어부사시사를 비롯한 많은 가사를 남겨

텁석부리 안내자 김연웅씨의 설명에 따르면, 지금 남아있는 부용동(부용동은 섬 산세가 피어나는 연꽃을 닮았다고 하여 이름 지었다) 정원은 크게 세 구역이다. 우선 거처하는 살림집인 낙서재 주변과 그 맞은편 산 중턱의 휴식공간인 동천석실 주변, 그리고 부용동 입구에 있는 놀이 공간 세연정 주변이다.

a

옥수암에서 본 연못 맑고 깨끗한 연못에는 세상 모든 것이 다 더러앚아 있다. ⓒ 박종국


a

연못안 바위들 연못 상단에서 본 세연정 바위 군락들 ⓒ 박종국


고산은 섬 전체를 구석구석 살펴서 가장 알맞은 곳을 골라 살림집과 정자를 놓고 연못을 파고 정원수를 심는 등 섬 전체를 조경의 범위로 삼았다. 그러나 그 스케일과 상상력의 크기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지만, 이 정원을 조성하기 위해 동원되었을 노동력이나 당시 섬 주민들에게 그가 어떤 존재였을까를 생각해 보면 찬탄과 질시의 감정이 함께 일었다.

물론 고산의 조부이며 해남윤씨의 중시조인 어초은 윤효정 이래 축적되어 온 해남윤씨 집안의 재력이 이 정원을 꾸미는데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세연정, 아름답기는 하나 그 당신 얼마나 많은 섬 주변들이 동원됐을까

그러나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정원이었지만 부용동 정원은 고산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서자와 그 후손들에 의해 관리되었다가 점차 퇴락했다. 30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군데군데 건물자리였음을 알리는 주춧돌, 연못, 정원 등의 자취가 흩어져 있을 뿐 당시의 건물은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다행스럽게 최근에 세연정과 동천석실, 낙서재가 복원되었다고 한다.

a

세연정 연못쪽에서 본 세연정 ⓒ 박종국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보길도의 백미는 세연정에서 보는 인공정원의 풍경과 동천석실에서 내려다보는 전망, 그리고 어부사시사의 현장인 예송리 해안에서 보는 바다 풍경들이 대단히 아름다운 섬이라고 했다. 한껏 답사의 구미가 당기는 얘기였다.

어부사시사의 현장 예송리 해안, 바다 풍경들이 대단히 아름다운 섬

길손은 왜 보길도를 찾았는가. 단지 그 섬의 아름다움과 고산 윤선도의 유적지를 휘돌아보기 위해서. 아니다. 왜 보길도가 아름다우며, 왜 유적지로서 지정되었으며, 왜 그곳을 찾는지의 가치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세연정은 보길도주차장(보길 대교 세워지기 전에는 선착장 자리다)에서 오른쪽 길로 오 분여 차를 타고 가면 부용동 입구에 이르는데, 이곳 보길 초등학교 옆에 세연정이 있다. 그 기능으로 보면 세연정은 놀이의 장소다. ‘세연’(洗然)이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라는 뜻이다.

a

회수담 세연정 앞 회수담 ⓒ 박종국


a

회수담 이곳에 배를 띄웠다고 한다. ⓒ 박종국


세연정은 부용동 정원 중에서도 가장 공들여 꾸며진 정원이며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이다. 자연적인 계류를 돌둑으로 막아 연못(세연지)으로 만들고 다시 그 물을 끌어들여 네모진 인공 연못(회수담)을 만든 후 두 연못 사이의 인공 섬에 정자(세연정)를 놓아 주변의 다양한 누릴 수 있게 했는데, 크고 작은 바위들이 점점이 드러난 세연지의 자연적인 곡선미와 축대로 돌린 회수담의 인공미가 서로 대비되면서도 잘 어울린다.

세연정은 부용동 정원 중에서도 가장 공들여 꾸며진 정원

회수담 안에는 네모진 섬이 하나 있으며, 넓적한 바위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 있고, 또 세연정 동쪽에는 각각 동대와 서대로 불리는 네모진 단이 두 개 있다. 이 회수담 안의 너럭바위와 동․서대는 무희가 춤을 추고 악사가 풍악을 우리던 곳으로 쓰였다고 한다.

a

동대 악사들이 악기를 연주하던 곳이다 ⓒ 박종국


a

서대 동대와 서대는 악사들이 악기를 연주하는 대이다. ⓒ 박종국


연못 주변에는 늙은 소나무들이 기울어 있고, 차나무, 녹나무, 동백나무 등 상록수가 우거져 있으며, 연못 안에는 여름철에서 늦가을까지 귀여운 노란 꽃이 피는 개구리연이 퍼져 있다. 그러나 길손이 간 이즈막에는 그러한 것들을 볼 수 없었다.

윤선도의 5대손인 윤위가 보길도를 방문한 후 쓴 기행문 <보길도지>에는 고산이 세연정에서 지내던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일기가 청화(淸和)하면 반드시 세연정으로 향하되 학관(고산의 서자)의 어머니는 오찬을 갖추어 그 뒤를 따랐다. 정자에 당도하면 자제들은 시립(侍立)을 하고 기희(妓姬)들이 모시는 가운데 못 중앙에 작은 배를 띄웠다. 그리고 남자아이에게 채색 옷을 입혀 배를 일렁이며 돌게 하고 공이 지은 어부사시사 등의 가사로 완만한 음절에 따라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당 위에서는 관현악을 연주하게 하였으며 여러 명에게 동․서대에서 춤을 추게 하고, 혹은 옥소암(玉簫岩)에서 춤을 추게도 했다. 이렇게 너울너울 춤추는 것은 음절에 맞았거나와 그 몸놀림을 못 속에 비친 그림자를 통해서도 바라볼 수 있었다. 또한 칠암(七岩, 세연지에 잠긴 바위들)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기도 하고 동․서도(양쪽 연못 안에 있는 섬)에서 연밥을 따기도 하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무민당에 돌아왔다.

그 후에는 촛불을 밝히고 밤놀이를 했다. 이러한 일과는 고산이 아프거나 걱정할 일이 없으면 거른 적이 없었다. 이는 ‘하루도 음악이 없으면 성정을 수양하며 세간의 걱정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윤위의 기행문을 통해볼 때 옥서암(세연지 남쪽 산 중턱에 올려다 보이는 흰 바위)에 사람을 올려 보내 춤을 추게 하면서 연못에 내리비치는 그림자를 즐겼다니, 옥에 티라고 할까. 고산의 감각적인 호사가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산의 감각적인 호사가 대단

세연정을 돌아보며 많은 생각을 하였다. 곳곳에 스며있는 고산의 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세연정에 걸터앉아 고산과 질문화답도 하여보고, 세 차례에 걸쳐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지난했던 그의 삶과 유배와 출사, 은둔에 따른 소회도 들어보았다. 전란과 당쟁이 소용돌이치는 격랑의 사회현실 속에서도 강직한 성품의 선비로서, 조선시대의 자존심 있는 지성인으로서 고산을 우러러보았다.

그는, 정치의 중심에서 나랏일을 맡았을 때는 정성을 다하여 국가 경영의 대도를 역설하였고, 의롭지 못한 일을 보면 결코 용납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을 가졌다. 고고한 섬 보길도, 그 섬 한 곳인 세연정을 거닐며 그는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그 결과 그는, 세 차례나 유배생활을 겪게 되었지만, 그의 삶의 근본은 오로지 나라를 위하는 정신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뿐이었다. 뿐만 아니다. 고산은 조선중기에 낳은 대시인이며, 시조문학을 마지막으로 장식한 대가다. 고산은 학문뿐만 아니라 철학을 위시해서 경사서, 제자백가에 통달하여 정치, 학문, 예술 전반에 걸쳐 조예가 깊었다.

또한 천문, 음양지리, 복서 등 다방면에 혜안을 가졌었다. 특히 원림 경영과 간척사업을 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렇지만 고산하면 역시 시조문학을 으뜸으로 꼽는다.

a

너럭바위 세연정 연못에는 여러 모양의 바위가 있으나 이바위는 유독 커다랗다. ⓒ 박종국


a

연못 세연정에서 내려다 본 연못이다. ⓒ 박종국


세연정을 거니는데 끊이지 않고 어부사시사가 낭송되고 있다. 찾는 이들을 위하여 유적지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배려한 마음씀씀이가 더 없이 고왔다. 이제 우리나라도 어느 정도 살만하니까 자연환경에 관심을 갖게 되고,  우리 문화유산을 발굴 보존하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동안 고산의 유적지 발굴과 복원에 소홀함이 없지 않았으나, 오늘 세연정을 답사하고 나니 그간 ‘고산선생을 사랑하는 학자들’과 후손들의 노력으로 이만큼 유적지가 단장되었으니 늦은 감은 있지만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길손은 왜 보길도를 찾았을까

아름다운 섬, 청정 해역과 수려한 자연경관이 빼어난 보길도, 고산의 숨결이 아직도 살아있는 세연정, 그곳에서 그의 학문적 가치를 찾아 이곳저것으로 걸음을 재촉하는 길손의 마음은 흡족했다.

때이른 아침으로 시장기가 촐촐했는데 세연정을 벗어나 보길도 포구에서 맛 본 전복죽과 매운탕은 보길도만이 내놓을 수 있는 맛이었다. 때문에 보길도는 고산의 유적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자랑 삼을만했다.
   
a

보길대교 올해 준공된 보길대교, 그러나 이로 인해 보길도 주민들은 장사가 안 된단다. ⓒ 박종국

#세연정 #보길도 #회수암 #부용동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박종국기자는 2000년 <경남작가>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한국작가회의회원, 수필가, 칼럼니스트로, 수필집 <제 빛깔 제 모습으로>과 <하심>을 펴냈으며, 다음블로그 '박종국의 일상이야기'를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 김해 진영중앙초등학교 교감으로, 아이들과 함께하고 생활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100만 해병전우회 "군 통수권" 언급하며 윤 대통령 압박
  3. 3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4. 4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5. 5 "일본정치가 큰 위험에 빠질 것 우려해..." 역대급 내부고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