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덮개가 날아가버린 '흉측한' 보일러의 모습이다.
이유하
서울에 올라온 지 9개월째 접어들지만, 한 번도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름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결국에는 웃으면서 넘길 수 있는 일들이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릴 거라고 혈혈단신 서울에 올라와서, 춥디추운 옥탑방 옥상에 덩그러니 서서 보일러에게 뺨 맞고 입술에 피를 흘리면서 서 있는 걸까? 급속도로 우울해졌다.
돈 없어서 옥탑에 사는 게 서럽고, 칠칠치 못한 내 성격이 서럽고, 고장 난 보일러가 서럽고, 매서운 바람도 서러웠다.
나는 보일러고 뭐고, 당장이라도 부산으로 내려가고 싶은 극적인 기분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일은 점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 나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
추운 방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몇 시간을 기다린 끝에 도착한 보일러 아저씨는 이 한 마디만을 남긴 채 유유히 사라졌다.
"보일러가 터져서 새 걸로 교체를 해야 합니다. 아래 파이프까지 다 얼어버렸으니, 오늘 못하겠어요. 내일 합시다."그리고 보일러 견적으로 55만원을 제시했다. 55만원! 55만원! 55만원! 이라니!
"네? 55만원요?""보일러 가격이 50만원이고, 파이프까지 하면 5만원 추가 됩니다.""그걸 제가 다 내야하나요?"눈앞이 캄캄해졌다. 난 억울했다. 10년도 더 넘은 보일러를 내가 새 걸로 교체해야 하다니! 그 순간은 내 과실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우리 집도 아니고, 단 몇 달을 살았을 뿐인데, 내 잘못도 있지만 밖에 보일러를 설치한 탓인데, 날씨가 너무 추웠던 탓인데, 내가 돈을 다 주고 보일러를 바꿔야 한다니!
그냥 보일러를 안 고치고 살고 싶었다. 계약이 끝나고 나갈 때 보일러를 떼어 가겠다고 '빡빡' 우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중고 보일러로 바꾸고도 싶었다. 하지만 난 결국 아무 말도 못했다. 시무룩하게 멀찍이 서서 또다시 나의 부주의를 저주했다.
'보일러만 안 끄고 나갔더라면…, 얼었더라도 괜히 해본다고 이것저것 눌러보지만 않았더라도 터지지는 않았을 텐데… 이 바보, 이 바보.'
도착한 '신상' 보일러, 30만원 꿀꺽다음 날(13일), 오전 9시 반에 찾아온 보일러 아저씨는 장장 4시간이 넘게 씨름한 끝에 보기에도 훨씬 고급스런 '신상' 보일러를 옥탑방에 장착했다. 하지만 그 덕에 어제 막 들어온 한 달 치 '알바'비 29만482원에 만원을 더 해서 총 30만원을 몽땅 날렸다.
원래는 55만원이지만 주인집에서 반을 부담해주기로 한 탓이었다. 보일러 아저씨는 지나가는 말로, 보통 이런 경우에는 세를 든 사람의 과실로 주인집에선 신경도 안 쓰는 경우가 많다고 좋은 주인을 만난 거라며 거들었다.
어차피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 그나마 30만원을 내고 고치는 것이 고맙게 생각되었다. 더군다나 주인집은 추위에 떠는 내 안위를 걱정하면서, 집으로 초대해 맛있는 점심을 차려주기도 했다. 물론, 주인집과의 오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고마웠다.

▲ 왼쪽에 있는 파란선이 동파 방지를 위해 제작한 열선이다. 오른쪽은 보일러 아저씨의 007가방! 보일러를 설치하는 김에 열선도 감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제 절대 동파되는 일은 없겠지?
이유하
일을 끝내고 다시 나는 몇 푼의 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러가야 했다. 한 시간에 5000원짜리 알바를 하러 가면서, 택시를 타는 '사치'를 누린 나는 (몸이 급속도로 안 좋아, 살짝 열까지 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만난 택시 아저씨에게 내 이야기를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았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보일러가 추워서 동파된 것, 그래서 견적이 55만원이 나온 것, 부산에서 올라온 이야기, 옥탑에 사는 이야기까지 늘어놓았다. 하다 보니 다시 살짝 서러워졌다. 아저씨는 내 이야기를 듣고는 정말로 딱하다는 얼굴로 뒤를 돌아서는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 조금만 고생하면 될 거야. 힘내라고!"그래 돈이 무어 그리 대수냐. 이만한 일로 좌절하지 말자. 이까짓 돈 30만원 안 벌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결국엔 다 좋게 끝나지 않았나. 그 순간 나의 불만과 불평과 울음 섞인 자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처음으로 주인집의 따뜻한 진짜 정도 느꼈고, 보일러 아저씨는 친절하고 꼼꼼하게 일을 처리해주고 갔으며, 새로 설치한 보일러는 온수도 더 잘 나오고, 바닥도 뜨끈하게 쌩쌩 돌아가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보일러 덮개에 정통으로 맞았으면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었던 경우였다. 다행히 멍든 내 입술은 많이 가라앉았다. 그러면 된 거다.
매 순간순간들은 후회해도 결코 돌아올 수없는 시간들이다. 그러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주위에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루는 사람들에게 위로받고, 또 하루는 좌절하면서, 나는 내일도 이 옥탑방에서 좀 더 열심히 하루를 시작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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