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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물 레슬러' 미키 루크, 연기상 받을 만하네

[리뷰] 프로레슬러의 삶을 진솔하게 담은 <더 레슬러>

09.02.28 11:33최종업데이트09.02.28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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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스포츠도 아니고, 연극도 아니야."

비록 철 지난 유행어지만,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표현을 찾지 못해 수 년 전에 히트했던 개그 코너 '같기도'를 인용했다. 여기서 '이것'은 프로레슬링을 뜻한다.

흔히 스포츠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하지만, 프로레슬링에는 엄연히 각본이 존재한다. 경기에 들어가기도 전에 승자와 패자가 미리 결정돼 있고, 심지어 경기 진행 순서까지 미리 '합'을 맞추고 있으니 도저히 스포츠의 한 종목으로 인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프로레슬링을 연극에 포함시켜 볼까? 선수들이 링 안팎에서 정해진 각본에 따라 연기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몸을 던지고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모두 진짜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들처럼 '리얼'과 '가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다.

스포츠 같기도 하고, 연극 같기도 하지만, 그 어떤 범주 안에도 포함될 수 없는 서글픈 프로레슬링. 오는 3월 5일에 개봉하는 영화 <더 레슬러>는 바로 그 프로레슬링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노장 선수의 재기 스토리를 거부한 <더 레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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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디 '더 램' 로빈슨(미키 루크)은 8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레슬러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랜디는 소규모 단체가 주최하는 레슬링 대회에 간간이 출전하는 삼류 레슬러에 불과하다.

생계를 위해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집세를 내지 못해 차에서 새우잠을 자는 신세다. 게다가 유일한 혈육인 딸마저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아버지를 경멸한다.

그런 그에게 주말마다 오르는 프로레슬링의 링은 고단한 삶의 유일한 위안이다.

비록 손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적은 관중이지만, 랜디는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관중들을 위해, 로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상대를 공격하는 자신의 마지막 기술 '램 잼'을 선보인다.

이렇게 한 물간 노장 운동 선수가 등장하는 영화는 쉽게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패배자로 살아가던 주인공은 어떤 계기(주로 여주인공)를 만나 다시 열정과 투지를 되찾고, 피나는 훈련을 통해 멋지게 재기에 성공하며 마무리 된다.

그러나 프로레슬링이 일반적인 스포츠와 다르듯, 프로레슬링을 다룬 영화 <더 레슬러> 역시 일반 스포츠 영화와 다르다. 주인공 랜디는 가뜩이나 고장난 몸에 심장병이라는 옵션이 추가되고, 사이가 좋지 않았던 딸과의 관계도 더 악화된다. 영화 속에서 랜디가 마지막 경기를 치르는 무대도 세계 최고의 프로레슬링 단체인 WWE가 아닌 소규모 단체 ROH(실제 존재하는 곳이다)의 링이다.

이렇듯 <더 레슬러>에 스포츠 영화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승리의 감동'은 없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에서도 열정을 잃지 않고 끝까지 링 위에 서는 우직한 레슬러를 통해 성공과는 다른 '삶의 가치'를 느끼게 해준다.

미키 루크와 '더 램', 닮아도 너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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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많은 제작비가 들어가지도 않은 보잘 것 없는 삼류 레슬러의 이야기가 여느 대작 못지 않게 묵직한 여운을 주는 가장 큰 이유는 랜디를 연기한 배우가 미키 루크이기 때문이다.

<나인 하프 위크>, <와일드 오키드> 등으로 80년대 최고의 섹시 배우로 군림했던 미키 루크는 한창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때 프로 복서 데뷔를 선언하며 홀연히 할리우드를 떠났다.

미키 루크는 공식 경기에서 9승 2무의 좋은 성적을 기록했지만, 다시 영화계로 돌아온 그에게 남은 것은 얼굴의 흉터와 그 흉터를 지우기 위한 성형 수술 부작용뿐이었다. 섹시 스타의 이미지를 완전히 잃어 버린 미키 루크는 날개 없이 추락했다.

그의 빈자리는 이미 톰 크루즈나 브루스 윌리스 같은 배우들이 채웠고, 그가 나설 수 있는 무대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마이너 영화들 밖에 없었다.

그런 미키 루크가 랜디 '더 램' 로빈슨이라는 퇴물 레슬러를 만났다. 미키 루크와 랜디는 신기할 정도로 닮았다. 정상의 자리에 서 있다가 순식간에 몰락한 점도 그렇고, 그럼에도 계속 자신의 무대에서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점도 그렇다.

특히 영화 속에서 랜디가 바에서 맥주를 마시며 "나는 90년대를 증오해" 라고 외치는 장면은 악몽과도 같았던 90년대를 보낸 미키 루크의 자기 고백 같았다.

감정 연기뿐만이 아니다. 미키 루크는 실감나는 경기 장면을 위해 현역 선수를 방불케 하는 트레이닝을 소화했고, 레슬러들에게 기술을 전수받으며 선수 못지 않은 완벽한 동작들을 선보였다. 그 결과, 미키 루크는 제66회 골든 글로브 남우 주연상을 수상하며 '제2의 전성기'를 활짝 열었다.

화려한 레슬러의 일상을 훔쳐보는 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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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레슬러>는 베일에 가려져 있던 프로레슬러의 세계를 자세하게 묘사해 평소 프로레슬링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에게 더욱 많은 흥밋거리를 제공한다. 

철제 의자로 머리를 맞고, 굵은 철사가 옆구리를 찌르고 있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관중들의 환호 소리에 다시 몸을 던지는 레슬러들의 모습은 진지하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하다.

면도날을 몸 속에 숨기고 있다가 경기 중 자신의 이마에 그어 피를 내는 장면이나 경기 중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했을 때 선수들과 심판이 대화를 나누며 동작을 맞추는 모습은 'TV 방영분'에서 볼 수 없는 장면이다. '몰래 카메라'를 보는 듯한 묘한 쾌감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더 레슬러>가 프로레슬링 팬들만을 위한 영화는 결코 아니다. 자신을 향해 환호를 보내는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랜디의 모습에는,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더 레슬러 미키 루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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