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세상에서 가끔 일어나는 해프닝

등록 2009.02.28 19:28수정 2009.02.28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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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이른 봄날 오후의 묵향레슨을 마치고 막 들어왔다. 벨이 울린다. 택배가 왔다. 소리를 못 듣는데 어떻게 아느냐고? 우리집 강아지 도란이가 현관으로 달려나가 짖으니까. 보청견인 셈이다. 

 

 주말의 레슨인 오늘은 아이들이 오기 전에 책상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서실의 공기도 환기를 시켰다. 오늘은 좀 더 맑은 마음과 가라앉은 마음으로 글씨 쓰기에 집중하게끔 지도하여 좋은 작품을 만들어 새학기가 시작되는 대회에 준비하게 하고자 했다.

 

그러나 한창 뛰놀나이인 초딩과 이제 사춘기가 시작되는 아이들이 조용히 입다물고 지필묵에 집중하는 것도 잠깐이지 한 시간, 두 시간 계속 그렇게 집중하기란 어렵다. 레슨 중간 중간에 책상을 돌아다니면서 옛날 서당 훈장모양 조그만 자라도 갖고다니면서 단속을 하지 않으면 서로 수다떨다가 나중에는 서로 삐치다가 급기야 붓을 들고 별 장난을 다한다. 그래서 종이마다 검사를 하고 다시 임서체본을 내주고, 책상마다 돌아다니면서 자세도 바로잡아 주고 때론 등이나 엉덩이도 토닥거리며 칭찬해준다.

 

그러나 오늘은 몸이 안 좋아 병원에 다녀왔고 의사가 가만히 안정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지도를 할 때 책상마다 돌아다니지는 못하고 그냥 가만히 앉아서 아이들보고 내 책상으로 오라고 해서 지도를 했다. 영리하면서 개살맞은 아이들은 선생님이 오늘 몸이 불편해서 자신들을 적극적으로 단속을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내가 자신들의 입모양을 보지 못하면 아무 말도 못알아 듣는다는 것을 잘 아는 아이들이기때문에 붓을 들고 글씨를 쓰면서 계속 수다를 떨었다. 나는 소리의 음색을 분별을 못하지만 그냥 소리가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것은 오감으로 느낀다. 대회에 낼만한 좋은 글씨가 나오지 않는 가운데 계속 아이들이 수다인지 큰 소리가 오감을 너무나 자극해서 불쾌했다. 그래서 책상을 손으로 쾅쾅 두드리며 외쳤다.

 

"제발 좀 조용히 하지 못하니? 이제 새학년으로 올라가는데 대회낼 작품을 좀 잘 만들려고 노력않고 뭐 하자는 거니? 너희들 장난치고 수다 떨려고 이곳에 오는 거니!"

 

아이들은 아주 생뚱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선생님 억울해요!  우리 오늘은 별로  안 떠들었는데요?"

"그러면 시끄러운 소리들은 뭐였는데?

"선생님 아까부타 밖에서 양파하고 무우사라는 채소장사 마이크인데요."

 "저런, 그랬어. 그래도 너희들 조금은 떠들어잖니. 암튼 어서 집중해서 좋은 작품 만들어내자."

 

참 계면쩍고 마음속으로 미안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고 상황을 넘겼다.

 

며칠 전에는 누군가의 집을 방문했는데 돌아갈 때 나에게 물어보았다.

"선생님! 묵 드시지 않겠어요? 시골에서 묵을 가져왔거든요."

"아니에요. 전 잘 안먹어요. 전 알레르기가 있어요" 그랬더니 "그래요?" 이상한 표정으로 갸웃 갸웃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묵이 아니라 무우를 가져가라고 한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연극교육을 추진하면서 연극선생이 소품으로 훌라후프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나는 그 연극선생에게 프라이팬을 가져다 주었다. 소리가 없는 블랙의 세상에서

입모양인 구화만으로 살아가다보면 이렇게  영혼이 함께 울고 웃는 해프닝이 자주 생긴다. 

 

이런 일이 생길 때 내 표정은 아주 천연덕스럽거나 아니면 크게 웃어버린다. 내가 먼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웃어버리니 상대도 웃는다. 청각장애는 생활의 장애가 아니다. 단지 조금 더 느리게 이해되거나 조금 더 불편한 것일뿐.

2009.02.28 19:28ⓒ 2009 OhmyNews
#청각장애 #아이들의 수다 #넌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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