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제3동 개미마을에 봄은 올까?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용도 변경

등록 2009.03.10 11:56수정 2009.03.10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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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홍제3동 개미마을은 1960년대 서울로 상경한 지방 이주민들에 의해 무허가 촌으로 형성됐다

홍제3동 개미마을은 1960년대 서울로 상경한 지방 이주민들에 의해 무허가 촌으로 형성됐다 ⓒ 곽진성


서울 지하철 3호선 홍제역에서 마을버스 7번을 타고 종점에서 내리면 인왕산 자락에 자리 잡은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개미마을'(이하 개미마을)로 불린다. '개미처럼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였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개미마을은 1960년대 말, 지방 이주민들이 홍제3동에 몰려들면서 형성됐다. 무허가촌이었기에 박정희 정권 시절 대규모로 집이 철거되는 사태도 겪었지만 1985년 토지불하를 받고 자기 땅을 소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주민들의 생활은 열악했다. 이 일대가 1972년부터 개발제한구역에 묶여 있어서 건축은 물론 보수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미마을 주민들의 오랜 숙원이 해결됐다. 홍제3동 9-81(3만4611㎡)의 개발제한구역이 해제(2006년 3월 16일)되고 4층 이하 건물을 자유롭게 지을 수 있도록 자연녹지지역에서 제1종 일반주거지역으로 용도가 변경된 것이다(2008년 12월 24일). 지금 주민들의 기대감은 어느 때보다 높다. 하지만 투기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존재했다.

홍제3동 9-81, 개미마을의 과거

a  다닥다닥 붙은 집들. 낡아 헐거워진 옹벽. 18일 찾아간 개미마을은 낯선 이국의 풍경을 연상케했다

다닥다닥 붙은 집들. 낡아 헐거워진 옹벽. 18일 찾아간 개미마을은 낯선 이국의 풍경을 연상케했다 ⓒ 곽진성

따뜻했던 서울에 다시금 겨울 한파가 매섭게 불어 닥친 지난달 18일, 개미마을을 찾아갔다. 홍제동의 꼭대기,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개미마을은 낯선 이국의 풍경을 연상케 했다.

다닥다닥 붙은 작은 집들, 낡은 옹벽과 가파른 계단은 오늘날 최첨단을 달리는 서울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개미마을에서 40년 넘게 거주하고 있는 유순숙(56)씨가 마을에 얽힌 사연을 들려줬다.

"당시 개미마을 주택들은 대부분 무허가로 지어졌어…. 생활은 열악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지. 화장실이 없어 외진 곳에서 똥·오줌을 해결했는가 하면 수도 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공동 수도에서 몇 시간씩 기다려 물을 떠야 했어."


못살던 시절의 아픈 추억이라고 유씨는 쓴웃음을 지었다. 유씨의 말은 계속됐다.

"공동 수도를 사용하던 시절에는 서로 사용하려고 매일 싸움판이 벌어졌지. 마을 사람들 간의 분위기도 험악해서 공무원들은 개미마을을 인디언촌이라고 얕잡아 불렀어."


당시 철거 공무원들의 횡포는 개미마을 주민들에게 뼛속 깊은 시련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철거 공무원들에게 항의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대들었다간 그날로 무허가 집이 철거되었기 때문이다. 오송헌(75)씨는 당시 철거 상황에 대해 생생하게 묘사해줬다.

"당시엔 하루가 멀다 하고 집이 철거당했어. 주민들이 천막 비슷하게 무허가 집을 지으면 그 다음날 철거 공무원들이 바로 철거해 버린 거지. 그런데 (쓴웃음) 뒷돈을 주면 무허가 집 짓는 것을 봐줬어. 돈이 뭔지, 무허가 촌에서도 돈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야."

박정희 정권 시절, 대규모 철거 맞은 개미마을

a  박정희 정권 시절 3차례 큰 철거를 겪었던 개미마을 주민들은 이후, 전두환 정권때인 85년 토지불하를 받고 자기 소유 땅을 가질 수 있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3차례 큰 철거를 겪었던 개미마을 주민들은 이후, 전두환 정권때인 85년 토지불하를 받고 자기 소유 땅을 가질 수 있었다 ⓒ 곽진성

뒷돈으로 해결 안 되는 일도 있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싸늘한 시선 앞에서는 뒷돈은 물론 개미마을에 살아도 된다는 합법적인 허가증도 소용이 없었다. 양기녀(68)씨가 당시 상황에 대해 증언했다.

"그때 생각만 하면 아직도 내 가슴이 떨려…. 우리 개미마을은 박 대통령 시절에만 3번의 큰 철거를 맞았어. 그중 첫 번째 철거는 남북공동성명 즈음(1972년)에 일어났지. 그런데 철거 이유란 게 참 우스워…. 남한 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북한에 보여줘야 하는데 이곳이 눈엣가시였던 모양이야. 당시 서울시장이던 양택식이 개미마을 일부 지역(산1-166번지. 인왕중학교 신축자리)를 말끔히 정리해 버린 거지. 허가증이 있어도 소용없었어. 권력 눈밖에 났으니까, 쫓겨난 주민들은 날벼락을 맞은 게야."

개미마을 주민들은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에 큰 철거를 겪었다. 500여 세대에 이르던 개미마을 가구 수도 철거를 겪으며 220여 세대로 줄어들었다. 권력의 따가운 눈총 속 철거의 공포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이후, 자기 소유의 땅을 갖고자 하는 노력을 펼쳐 나갔다. 결국 노력은 결실을 맺어 전두환 정권 때인 1985년 산림청으로부터 홍제동9-81 일대의 토지비용을 5년간 분납하면 토지 불하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992년까지 개미마을에 거주하는 179가구 2000여 명이 토지 불하의 혜택을 받았다. 멸시의 의미가 가득 담긴 인디언촌이라는 이름도 이때 마을 주민들의 논의를 통해 개미마을로 바뀌었다. 당시 토지 불하를 추진했던 김정하(가명)씨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무허가 설움을 벗어나기 위해 개미마을 주민들은 오랫동안 노력을 했고 다행히 좋은 결과가 낼 수 있었지. 1985년 정부로부터 5년 분납으로 (실질적 자기 소유의) 토지세를 내면 토지 불하를 받을 수 있게 된 거야. 그때부터 개미마을의 분위기가 긍정적으로 변해갔어. 맨날 술 먹고 싸우던 사람들이 변한 거야. 내 땅, 내 집이 생겼으니까,"

토지 불하를 받아 법의 안쪽으로 들어간 개미마을에는 새로운 시설들이 생겨났다. 1985년에 생긴 공중 화장실과 수도 시설이 대표적이다. 마을 주민들은 더 이상 길바닥에 용변을 보지 않아도 되었고 공동 수도를 사용하느라 분쟁이 생기지도 않았다.

개미마을에도 봄은 올까?

a  1985년 토지불하 후, 인디언촌 이라는 이름은 개미 마을로 바뀌었다. 개미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이었다

1985년 토지불하 후, 인디언촌 이라는 이름은 개미 마을로 바뀌었다. 개미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이었다 ⓒ 곽진성


하지만 2009년, 개미마을은 발전이 더뎌 있었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했다. 인왕산 등산을 위해 일주일에도 몇 번 개미마을을 찾는다는 이동민(72)씨가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개미마을을 10년 동안 찾았지만 변한 것 없이 옛 모습 그대로야. 공기 좋고 물 좋고 사람들도 정겹지만 마을이 낙후해서 보기가 정말 딱해, 헐거워진 담에 페인트칠이라도 다시 하면 좀 나으련만 주민들이 돈이 없으니 그렇게도 못하는 모양이야."

개미마을 주민들은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주택과 담 곳곳에는 부서지고 갈라진 곳이 많이 눈에 띄었다. 불량 주택이 많아 재해 위험이 높았다. 주민 유순숙(56)씨가 안타까운 심경을 토로했다.

"우리 집 부엌 축대가 무너져 근처의 방에서는 무서워 잠도 못 자고 있는 실정이야. 보수 공사를 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 고칠 수가 없어. 이 마을 사람들 거의 다 그래. 가난한 게 죄지(한숨). 가난한 게 죄야, 어쩔 때는 개미마을 사는 게 죄 같다니깐…. 사는 곳이 이렇다 보니깐 자식 결혼시키기도 쉽지 않아. 주민들 이야기가 자식들이 배우자를 데려와도 마을이 후진 걸 보고 다 도망가 버린대."

a  마을과 마을은 연결하는 계단은 가파
랐다. 한눈에 보기에도 아찔한 계단이었다

마을과 마을은 연결하는 계단은 가파 랐다. 한눈에 보기에도 아찔한 계단이었다 ⓒ 곽진성

축대가 무너져도 제대로 고칠 수 없는 마을, 결혼 상대자가 와서는 도망간다는 마을. 이렇게 개미마을은 오명 속에서 존재했다. 안타까운 마음을 누르며 개미마을의 가파른 길을 올라갔다.

개미마을은 개미굴처럼 오밀조밀 연결되어 있었다. 마을 사이사이를 잇는 것은 가파른 계단이었다. 그런데 한눈에 보기에도 아찔한 계단을 노인들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급경사 계단을 살펴보니 곳곳에 금이 가거나 헐어 있어서 제대로 걷기가 힘든 지경이었다. 눈이라도 오는 날에는 안전사고가 우려됐다.

언덕 듬성이에는 버려진 연탄재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아직도 연탄을 때는 집이 많다는 것을 방증했다. 살굿빛으로 변한 연탄재가 흡사 겨울 온기의 배설물처럼 보였다. 언덕 주변에는 공중화장실도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개미마을에는 아직도 화장실 없는 주택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 중간쯤에 위치한 슈퍼마켓 옆에는 개발제한구역을 알리는 표지판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72년 설정된 개발제한구역이었다. 바로 이 개발제한구역으로 인해 개미마을 주민들은 건물 건축은커녕 수리공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땅 권리조차 행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세월이 무려 13년여. 결국 개미마을의 주택들은 낡고 위험한 불량 시설로 전락해 버렸다. 그 긴 세월 동안 개미마을 주민들의 희망은 안전을 위해 '이주'라도 시켜달라는 아픈 절규로 바뀌었다. 주택 담 곳곳에 페인트로 적혀 있는 '구청장님 집이 무너질까봐 불안', '난개발보다 이주를 원해' 문구들은 개미마을 주민들의 쓰라린 절규처럼 보였다.

용도 변경, 기대와 우려 교차하는 개미마을

a  2009년 2월, 개미마을 주민들은 용도 지역 변경에 대해 기대와 우려의 목소리를 함께 냈다

2009년 2월, 개미마을 주민들은 용도 지역 변경에 대해 기대와 우려의 목소리를 함께 냈다 ⓒ 곽진성


가난에 가슴 아파하던 개미마을 주민들. 그런데 2009년 2월, 구청에서 주민들에게 보낸 우편에는 희소식이 담겨 있었다. 개미마을 주민들의 삶을 제약하던 개발제한구역이 해제되고 이 일대가 자연녹지지역에서 제1종 일반 주거지역으로 용도 변경된 것이다. 앞으로 4층 이하 단독주택 건설이 가능해진 것을 의미했다. 개미마을 주민들은 공동 주택 개발 계획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었다.

"10여 년 동안 재개발 소문만 돌았었는데 이번에 용도지역이 변경되어서 너무 좋다. 앞으로 개미마을 사람들에게 유용한 방향으로 개발이 진행되었으면 좋겠다."

양기녀(68)씨의 말이다. 김정헌(가명)씨도 "가난한 사람들의 상황을 감안해서 꼭 개발이 잘 진행되고 주민들에게 적정한 보상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존재했다. 마을 주민 표은진(27)씨는 개발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개발이 되면 막연히 부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주민들이 많다. 참 안타깝다. 자기가 부담해야 하는 주택 개발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많은 주민들이 개미마을을 떠나야 할 것이다. 적은 보상비를 받고 쫓겨날까 걱정된다."

그런 우려처럼 현재 개미마을에 거주하는 220여 세대 중 70% 정도가 세입자로 추정됐다. 이처럼 세입자 비율이 높은 개미마을에서 개발의 광풍이 도리어 주민들을 밖으로 내쫓지는 않을까 우려하는 이도 많았다. 오송헌(75)씨는 그런 생각을 하는 주민 중에 한 명이었다. 그는 "이곳 개미마을에는 영세한 세입자들이 많다. 개발이 되더라도 세입자들이 쫓겨나지 않아야 할 텐데 걱정이다. 용산 철거민 사태처럼 그런 끔찍한 사태가 개미마을에서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지적했다.

또 영세 주민(세입자) 문제와 함께 개발제한구역 해제로 인한 투기 바람도 우려되고 있다. 홍제3동 인근에 위치한 부동산 관계자는 "(개미마을은) 아직 개발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 거라는 확정이 없기 때문에 수요가 많지는 않다. 하지만 투기 목적의 사람들은 이미 2~3년 전쯤부터 거래를 많이 하고 있고 거래도 조금씩 늘고 있는 상태다. 현재 투기 목적으로 현재 이곳 땅 지분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개미마을은 앞으로 어떤 식으로 개발될까? 서대문구청 도시계획과 관계자에게 문의한 결과 "개미마을 일대에 커뮤니티 시설과 공공시설·노인문화복지시설·복지시설을 세우며 공동주택을 짓는 개발을 추진해 나가겠다"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개미마을 일대가 공동 주택으로 개발되면, 앞서 주민들이 우려한 대로 건설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주민들만 마을에 남고 건설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영세한 주민과 세입자들은 보상 비용을 받고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한다. 그렇기에 높은 개발 비용은 개미마을 주민들에게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근 40년 동안 주민들을 옥죄어오던 개발제한구역이 해제되고 용도 지역이 변경됐지만 개미마을의 현 상황은 기대하던 장밋빛만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개미마을 주민의 자조섞인 한마디가 뇌리에 오랫동안 남았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 구청에서 떠나라고 하면 떠날 거고 집을 보수해 준다면 남을 거야. 그런데 후회스런 마음은 들어. 차라리 예전에 터를 잡을 때 이곳 개미마을이 아니라 강남이나 방배에 터를 잡을 걸 하고 말야. 그러면 적어도 이렇게 열악하게 살지는 않았을 텐데. 이렇게 돈이 없어 쫓겨날 위기에 처하는 일도 없었을 테고…."
#개미마을 #홍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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