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지매, 그 향기에 풍덩 빠지다

광양 다압의 청매실 농원을 다녀와서

등록 2009.03.16 09:14수정 2009.03.16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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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개한 매화 만개한 매화가 마음을 향그럽게한다 ⓒ 박옥경


요즘 어느 TV에서 "돌아온 일지매"를 방영하고 있다. 일지매야 누구나 아는 이야기지만 탐관오리를 묵사발 만들 때는 영화 "공공의 적 1-1 강철중"처럼 통쾌하다. 공공의 적은 어느 시대나 있기 마련이어서 일지매 같은 인물을 우리는 기다리고 사는지 모른다.


겉으로는 도덕적이고 고고하기 이를 데 없지만 명성과 명예 이면에 도사린 부정부패와 음습한 야성의 검은 덩어리라는 양면성을 가진 인물은 소설과 드라마의 훌륭한 소재가 된다. 이런 인물들은 늘 법을 잘도 피하고 약한 자를 밟고 일어서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돈과 권력과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교만을 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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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매 포스터 드라마 촬영이 있다고 일지매 포스터를 초가 방문 앞에 붙여 놓았다. 정의에 불타면서도 온화한 눈매가 마음에 든다. 초가 앞에 고목으로 꽃을 피운 매화는 일지매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 박옥경


그래서 법으로 다가가기에는 너무 멀기에 일지매 같은 정의의 칼이 법보다 먼저 심판의 칼을 휘두를 때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통쾌한 것이다. 거기다 눈 속에서 피는 매화 한 가지를 던져놓는 낭만이라니….

매화 한 가지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행위는 부패한 관리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억울한 백성에게는 위안이 되는 일종의 표식이겠지만 왜 하필이면 매화인가? 눈보라에도 굴하지 않고 피어나는 의지와 기개가 선구자적 이미지, 혹은 군자의 성품을 닮았기 때문이라는 통속적인 설명은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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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근한 연기 연기는 추운 마음을 녹여주는 구들장을 생각나게한다 ⓒ 박옥경


말하자면 나는 매화의 향기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것은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스며나오는 과거로부터의 향기라고 할 수 있겠다. 비로소 자기의 얼굴을 책임질 나이가 되면 후회든, 만족이든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이 때 사람마다 독특한 빛깔의 향기가 난다고 생각한다. 과거를 지나 현재의 옷깃을 스치며 앞서가는 향이 매화향이라면 얼마나 그 사람의 삶이 괜찮을지,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할지, 내 주위에 그런 사람 하나 있다면 나는 얼마나 위안이 될지 생각만 해도 푸근해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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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공원 시비 문학동산에 세운 주동후 작가 시비, 윤동주 시인 시비, 매천 황현 시비 *김영랑의 시비는 문학동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데 여러 시인들의 시비가 매실 농원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 박옥경


지난 일요일(3월 8일)에 광양 다압에 있는 청매실 농원에 다녀왔다. 매화 축제가 14일에 열릴 계획이었으므로 광양문인협회에서 청매실 농원 안에 있는 문학공원의 개막과 함께 시낭송회를 준비하고 있어서 답사 겸 다녀온 것이다.

양지 바른 도로변에는 만개한 매화가 향기를 아낌없이 퍼 주어 비염으로 고생하는 내 코가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아직 피지 않은 매화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축제와 개화시기가 잘 맞아 14일 쯤에는 온 천지가 매화로 뒤덮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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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공원 시비 고 정채봉 작가의 오세암 속의 소년과 소녀-소년은 철없는 귀염둥이고 소녀는 걱정 많은 표정이다 ⓒ 박옥경


영화와 드라마 촬영으로 이름난 초가 앞에 상설 무대를 만들고 돌에 시비를 새겨 광양출신의 문인들을 기리자는 의미로 조성한 문학동산은 어떤 면에서는 너무 인공적인 냄새가 짙어 별로 바람직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상설무대 아래쪽으로 깊이 판 인공 연못이나 초가 입구로 들어가는 길목의 망루는 섬진강과 매화의 자연스러운 어울림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매실 농원은 문학과 음악과 운치와 또 노동이라는 예술의 총체적인 현실 속으로 "매실 명가"라는 이름에 걸맞게 발전해 나가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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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실농원의 장독대 홍매화와 어우러진 장독대가 너무 예쁘다.출렁거리는 대나무를 살짝 밟고 지붕을 가볍게 넘어 일지매가 매화 한 가지 갖다 줄것만 같다. ⓒ 박옥경


대충의 리허설을 마치고 초가에 가보니 문 앞에 "돌아온 일지매"를 내일 촬영한다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촬영 현장을 볼 수 없는 아쉬움과 더불어 반가운 마음에 셔터를 눌렀다. 오른쪽에 있는 부엌을 들여다보니 아궁이에서 군불이 타고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아주 정겨운 풍경이었다.

그리고 매화 축제가 시작된 3월 14일 12시경 매실 농원을 향해 출발했다. 예상대로 매화가 온 천지에 만개하여 그 향기는 온통 나를 통째로 감쌌다. 보리도 더 자라서 초록의 융단을 깔아놓은 듯 눈을 매혹시켰다.

하지만 전날 비가 오고 날씨가 추워져서 누가 이런 날 시낭송을 들으러 오겠냐 싶어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사실 매년 해오던 백일장을 없애고 문인협회 회원만 참석하는 시낭송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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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 매화꽃그늘 아래서 시낭송이 있었다. 하늘은 파랗고 연못은 맑다. ⓒ 박옥경


시낭송할 기회는 만들면 얼마든지 있겠지만 이참에 한 번이라도 아이들이 부모 손잡고  매화꽃그늘 아래서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었다는 것에 대해 아쉬움이 크다. 은근히 매화축제 백일장을 기다려 온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바람이 너무 불고 손끝이 시린 가운데서 시낭송은 시작되었다. 관객은 오다가다 들러본 삼사십 명에 불과했지만 설장구의 양향진 명인이 여는 공연을 신명나게 하고 시 낭송하는 중간 중간에 노래도 하여 흥을 돋우었다.

시린 바람 속에 박수치며 코끝이 얼어 빨갛게 된 모습으로 최선을 다한 시낭송회는 처음이었지만 회원들간에 감동과 감사의 마음이 생기게 했다. 마음과 마음이 어느 한 끝에서 모여 이루어내는 물결은 말 안 해도 넘치고 힘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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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장구의 양향진 명인 가락이 힘차고 흥겨워 문학동산의 개장을 알리며 흥을 돋우었다. 섬진강을 배경으로 너무나 어울리는 풍경이다. ⓒ 박옥경


내려다보이는 섬진강은 언제나 넉넉한 어머니 치마폭 같다. 울음을 토해내지 못하고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속 깊이 멍울을 품은 어머니, 혹은 지난한 백성들의 유구한 삶 같다. 부드러운 모래는 그 멍울을 감싸 안고 대나무 서걱이는 소리도 껴안고 섬진강의 등허리를 쓰다듬는다.

나는 섬진강을 배경으로 흐드러진 매화를 보며 일지매를 잠시 생각했다. 언젠가 홍길동이 의적이냐, 도적이냐를 놓고 아이들과 토론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토론은 별반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만큼은 의적이다 아니다의 이분법적인 발상이 아닌 불의에 분노할 줄 알고 정의의 편에 설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불의에 분노할 줄 안다는 것 외에 내가 일지매를 매력적으로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 중의 하나는 일지매 역의 정일우의 표정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착하고 순한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 심판의 칼을 휘두르는 카리스마는 날카롭고 강직하다기보다는 정스럽고 따뜻한 쪽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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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어머니 치마폭처럼 마냥 푸근하고 여유로운 섬진강. 매화와 어울려 더욱 아름답다. ⓒ 박옥경


말 안 해도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읽을 줄 아는듯하면서 외롭고 힘든 자신의 마음은 금방 눈웃음으로 지워버릴 것만 같다. 아픈 내면을 다스려가면서 사랑의 상처도 깊숙한 곳에 넣어두고 양민을 구하는 일에 전념하는 그 마음에서 매화 향이 솔솔 풍겨 나올 것만 같다.

매화밭과 섬진강은 어우러져 흐른다. 현실과 이상이, 문학과 사상이, 자연과 인간이 이렇게 어우러져 앞으로 더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풍경이 사회에 만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뒷정리를 했다. 너무 추워서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초가 앞에서 차를 팔던 분이 따끈한 식혜를 주셔서 한 컵 마시고 몸이 떨리는 것을 조금 추스릴 수 있었다. 해는 어느새 맞은 편 등성이로 그림자를 옮기고 있었다. 매실 농원은 강 저편 경상남도 하동까지 매화향기를 퍼나르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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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밭 화사한 매화가 눈부시다. 샤방샤방. 저물어가는 매화밭도 샤방샤방... ⓒ 박옥경


#매화 #섬진강 #일지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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