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9.03.20 12:03수정 2009.03.20 12:03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산촌마을에 아침 여명이 열리고 있다.
윤희경
눈을 떠보니 산새들이 지저귀고 있다. 상큼하고 싱그러운 봄날 아침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종달새인가 귀를 기울이면 참새들의 소리가 더 가까이서 들려온다. 이름 모를 뭇 산새들의 지저귐 하나만으로도 살아 있는 오늘 아침이 고맙기 그지없다.
퇴원 일주일째, 지옥 같던 중환자실에서 제대로 기력을 찾지 못하고 어칠비칠하던 순간을 떠올리면, 하루가 열리는 아침의 속삭임은 그냥 환희요 기쁨이다.
아침 숲 속으로 밝아오는 봄날의 여명이 희미하게 숲 속을 파고들어온다. 산 속에 오래 산 경험으로는 이 희미한 뿌연 빛들이 나무들의 우듬지를 잔잔한 몸짓으로 흔들어 날짐승들의 아침잠을 깨우고, 새들은 노랫소리로 기는 짐승들을 일으켜 세운다.
요즘 농촌 새벽녘 곤한 잠을 깨우는 것은 트랙터의 굉음이다. 트랙터 소리가 지축을 울리면 놉꾼들이 하나둘 밭으로 모여든다. 봄이 온 것 같은데 아직도 살얼음으로 땅바닥이 서걱거리고 손발이 저리다. 황덕 불 앞에 한참 손발을 녹여야 몸이 말을 듣는다. 차 한 잔으로 몸을 풀고 나면, 달가닥거리는 돌밭 속에서 감자 심기 두렛일이 시작된다.
고맙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사실이며 진실

▲ 꽃처럼 피어난 씨감자는 농부의 꿈과 희망이다. 오른쪽 사진은 씨감자의 눈.
윤희경
밭 갈고 구덩이 파 씨 놓고 묻으랴, 마구리 정리와 비닐 씌우기에 저마다 바쁘다. 작년까지만 해도 내 차지는 감자 씨알 넣는 일이었는데 오늘은 물심부름과 잔일을 챙기며 밭둑에 앉아 두레패들의 작업광경을 구경하고 있다. 며칠 전까지의 중환자실을 생각하면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난 복을 받은 것이다. '고맙습니다'를 연신 되뇌어 본다. 살아 있다는 것은 사실이며 진실이기 때문이다.
봄은 여러 가지 냄새로 감지된다. 그러나 긴 겨울을 건너와 이제 막 갈아엎어놓은 흙냄새 속에서 뽀얗게 피어나는 '단내'와 '구수'함을 어디에서 맛보랴 싶다. 어머니의 젖 냄새가 난다. 자작나무 속살냄새, 첫날밤의 신부냄새, 어린 아가의 볼 냄새가 난다. 킁킁... 숨쉬기가 편안하고 콧속이 아늑하며 살갗이 따스해오는 자연의 냄새이다.
따사롭고 풍요로운 흙 속 주인공들은 감자 눈이다. 감자 씨눈들은 오늘의 새로운 자리를 맞이하기 위하여 캄캄한 창고 속에서 긴 겨울밤을 견뎌왔다. 어둑하고 음침한 창고 안에서 겨울잠만 자다 보니 햇살이 그립다.
감자는 많은 눈을 가지고 있다. 몸뚱이마다 눈 샘 폭폭 파여 주먹을 불끈 쥐고 보조갤 틀고 있다. 몸통을 빙빙 돌려 엉덩이·앞가슴·허리결 할 것 없이 부실한 곳은 사정없이 도려내고 싱싱하고 튼실한 파란 눈과 싱싱한 안구만 골라 심는다.
농부의 부푼 꿈을 씨감자에 실어 땅속에 묻는다

▲ 봄내음에 취해 숲 속을 박차고 내려온 너구리 한 마리
윤희경
비닐을 씌우면 감자밭은 거대한 바다가 된다. 고랑마다 긴 파도가 일렁이고 달이라도 뜨면 바다 한가운데로 착각할 정도이다.
새참 먹을 시간이다. 아침 맛이 없어 조반을 거르기 일쑤다. 그러다 보니 새참 시간을 기다리게 마련이다. 감자국수다. 멸치국물에 한 그릇 말아 사정없이 배 속에 집어넣으면 온몸이 훈훈해 점심 때까지 땀을 흘려도 힘들지 않을 에너지가 충전된다.
꿈틀대는 봄내음에 취해 숲 속을 박차고 봄볕에 묻어 내려온 너구리 한 마리, 밭 어귀에서 아까부터 두 귀를 쫑긋, 목을 갸웃갸웃, 노란 눈알을 자분자분, 조동일 오물조물 대다 트랙터 굉음에 놀라 산 속으로 줄행랑을 놓는다.
올해도 농부의 부푼 꿈을 씨감자에 실어 땅 속에 묻는다. 어서 하지가 오고 감자농사로 호주머니 불룩해질 뜨거운 여름날을 기다려본다. 아, 이들이들 피어나는 싱그러운 봄.
덧붙이는 글 | 다음카페 '북한강이야기' 윤희경 수필방, 북집 네오넷코리아, 농어촌공사포탈사이즈 전원생활, 정보화마을 인빌뉴스에도 함께합니다. 쪽빛강물이 흐르는 북한강 상류를 방문하면 고향과 농촌을 사랑하는 많은 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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