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59주년이라고 한다. 허나 '주년'이란 단어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이쪽과 저쪽'이 요즘 주고받는 말은 살벌하다. 한국전쟁이 여전히 진행형임을 요즘처럼 실감한 적이 최근 없다. 이제 민족적 비극이란 말은 그저 상투적인 수식어에 불과한 것일까.
'민족적'이란 수식어도 10년 후면 바뀔지 모른다. 다문화가정 자녀 숫자만 6만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2020년에는 다섯 가구 중 한 가정이 다문화가정이 될 것이란 통계도 나오고 있다. 이렇듯 '민족적'이란 말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시대에 살고 있건만, 최근 남북 관계의 '역주행' 속도는 무섭다.
그래서 25일 임진각을 찾았다. 경기 아이누리 체험여행 참가자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경기도, 경기관광공사,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함께 주관하는 경기 아이누리는 전국 다문화가정 어린이를 경기도로 초청해서 체험여행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번 체험여행 코스에는 한국전쟁 59년을 맞아 임진각, 도라전망대, 도라산 평화공원이 포함됐다. 참가자들의 견학 소감이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하리라 생각했다. 또 최근 그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어느 정도일까도 궁금했다. 그들에게서 민족적 비극의 '평범한' 교훈을 다시 얻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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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라산 전망대에서 안내를 마친 이등병의 '경례' 그리고 박수 ⓒ 김진석
▲ 도라산 전망대에서 안내를 마친 이등병의 '경례' 그리고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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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산 이등병 안내에 심각해진 얼굴들
일단 우울했다. 임진각에 도착해서 통일을 염원하는 수많은 리본을 보고 나니 더욱 그랬다. "내일이라도 통일이 됐으면 좋겠다"는 어느 어린이의 바람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외국인 관광객이 오늘따라 참 '얄미웠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라산으로 이동하는 버스 안은 시끌벅적했다. "오늘이 한국 전쟁 59주년"이라며 견학 장소를 소개하는 말에도 별 관심이 없는 듯 했다. 그저 아이들은 잔뜩 들떠 있는 듯 했다. 얼굴들이 그렇게 해맑을 수 없다.
이런 '얼굴'들을 딱딱하게 굳게 만든 것은 병사의 일성이었다. 도라산 전망대에서 "지금부터 안내 말씀드리겠다"는 이등병 특유의 '군기'가 아이들에게도 전파된 듯 했다.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아이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심각한 얼굴이 됐다.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다. 지금, 저 병사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 병사에게 여행에 동행한 자원봉사자들이 환호를 보내며 박수를 보냈다. 그런 어른들을 따라하는 어린이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한 엄마는 자신의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무서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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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메라를 보고 웃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규정 위반' 아닙니다 ⓒ 김진석
▲ 카메라를 보고 웃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규정 위반' 아닙니다
ⓒ 김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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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어린이는 어린이, 도라산역 상병 아저씨 인기 최고
허나 역시 아이들은 '쿨'했다. '이등병'에게서 벗어나자마자 예의 쾌활함을 다시 찾았다. 잠시 후 도라산역에 내리자마자 아이들은 이곳저곳 참 분주하게도 돌아다녔다. 그렇게 고요하던 도라산역이 아이들 덕분에 그 본모습을 되찾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평양으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학생들로 붐비는 도라산역이었으면 했다.
특히 도라산역 평양방면 '타는 곳'에 서 있는 '상병' 아저씨 인기가 최고였다. 누구 말대로 "너무 딱 서 계셔" 있기만 한 대도, 사진을 찍을 때는 심각한 얼굴로 변하는데도, 함께 사진을 찍으려는 아이들이 길게 늘어섰다. 병사는 "오늘 특히 인기가 많은 것 같다"면서 "규정상 사진을 찍을 때는 웃을 수 없다"고 했다.
도라산 역에 전시된 철도 침목 앞을 좀처럼 떠나지 않는 아이도 눈에 띄었다. "이게 뭐야"라며 관심을 보이자, 곧바로 동행한 자원봉사 청년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 경의선 철도 기공식을 축하하는 의미로 서명한 것이란 내용으로 설명했다.
아니, 설명은 채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아이의 관심이 곧바로 기념사진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열차를 보고 "지하철 멋있다"고 하더니 곧 자리를 떴다. 역시 어린이는 어린이였다. 부천에 살고 있는 어린이라고 했다. "지하철"이란 말이 단순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어른은 어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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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일 경기 아이누리 체험여행 참가자들. 다음날 참가자들은 에버랜드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 김진석
▲ 25일 경기 아이누리 체험여행 참가자들. 다음날 참가자들은 에버랜드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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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들 "요즘 너무 불안" "힘을 합하면 1등 나라 될텐데"
물론 어른들도 "좋다"고 했다. 여행 소감을 묻는 질문에 한결같이 환한 얼굴이었다. 남편이 파키스탄 사람이라는 김은미(36)씨는 "이런 기회를 가는 것이 쉽지 않다. 외국인과 한국인이 함께 여행하기가 힘든 것은 사실"이라며 남편이 일 때문에 함께 오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요즘 '남북 이야기'를 꺼내자 말도 말라는 표정으로 변했다. 김씨는 "요즘 남편이 TV만 보면 전쟁 날 것 같다고 난리"라면서 "그럼 비행기 타고 너희 나라 가면 되지 않겠냐고 하면, 요즘 파키스탄도 전쟁 아니냐. 오도 가도 못할 것이라고 한다며 걱정한다"고 전했다.
다른 엄마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조선족 용혜광(34)씨는 "요즘 너무 불안하다. 전쟁 날까 너무 무섭다"면서 "참 작은 땅에서 서로 갈라져 이렇게 서로 싸우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 중국 출신 김동선(35)씨도 "이러다 전쟁 나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지 걱정"이라고 했다.
역시 "많이 불안하다"는 몽골 출신 바이갈마(39)씨의 이어진 말은 너무 당연해서 더욱 인상적이었다. 그는 "싸우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면서 "양쪽이 힘을 합하면 세상에서 1등 나라가 될 것 같은데"라며 안타까워했다. 어른에게나, 어린이에게나, 이렇듯 언제나 '결론'은 간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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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나영 어린이의 '평화 메시지' ⓒ 김진석
▲ 김지나영 어린이의 '평화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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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나영 어린이 "남한 잘못도 있고, 북한 잘못도 있고"
일행은 도라산 평화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평화의 메시지'란 주제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을 가졌다. 이 곳에서 어린이의 '결론'도 확인하고 싶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평화란 너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아직 나이 어린 그들 그림은 대부분 '추상화'였다.
그러다 알아 볼 수 있는 그림을 그리는 어린이들이 눈에 띄었다. 남한과 북한이 축구하는 모습이라고 했다. 기대와는 달리 어린이는 '기어코' 스코어를 적었다. 1:0. 물론 '이쪽'의 승리였다. 기어코 새벽에 일어나 '남북 대결'을 아까 도라산 전망대에서처럼 심각하게 바라보던 어린이,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 때나 지금이나 북한은 '우리나라'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저 어린이에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리고 국민의 4대 의무를 기꺼이 짊어질 것이다. 근로의 의무,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 그리고 국방의 의무 … 갑자기 미군 흑인 병사의 사회적 위치가 떠올랐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사회였다. '다문화가정'은 이제 정말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렇듯 풀어나가야 할 일이 늘어나고 있는데, '역주행'이라니, 전쟁이라니 … 다시 평범한 '교훈'으로 돌아올 차례였다. 초등학교 5학년인 김지나영(11) 어린이가 그린 그림이 그랬다.
"오늘, 신기하고, 슬프고, 무서웠어요. 요즘 뉴스를 보면 남북이 서로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아요. 한쪽에서만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남한 잘못도 있고, 북한 잘못도 있을 거예요. 전쟁이 나면 좋을 사람이 있나요? 누가 좋겠어요? 나는 평화를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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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일 기념식을 통해 공개된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 ⓒ 김진석
▲ 25일 기념식을 통해 공개된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
ⓒ 김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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