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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관객은 '어두운 영웅'을 원하지 않는다

<왓치맨>이 한국에서 잠잠했던 이유

09.07.25 14:37최종업데이트09.07.25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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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는 '수작' 정도가 아니라 '걸작'이라 불리는, 그것도 같은 만화책뿐 아니라 소설책이나 인문 서적과 견주어도 '걸작'이라 부르는 만화가 앨런 무어의 <왓치맨>입니다. <300>의 잭 스나이더 감독이 이 만화를 영화로 만든다고 했으니 반응이 장난이 아니었겠죠. 하지만 그건 미국 이야기일 뿐입니다.

원작 만화책은 있는지도 몰랐던 한국 관객들에게 영화 <왓치맨>은 생소할 뿐더러 당혹스럽기까지 한 작품이었습니다. 100만은 넘어야 흥행을 말할 수 있는 한국 극장가에서 <왓치맨>은 '고작' 60~70만 관객밖에 모으지 못했습니다. 평론가와 몇몇 관객만 칭찬했을 뿐, 극장 출구와 인터넷에선 '어이없는 영화'라는 혹평이 더 힘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질'이란 기준만으로 <왓치맨>의 실패를 분석하긴 어렵습니다. 그것보다는 한국과 미국 관객이 슈퍼 영웅물에서 각각 무엇을 보았는지, 또 무엇을 기대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왓치맨>은 슈퍼영웅 이야기를 과격하게 비틀고 있습니다. 영화 속 영웅들은 단 한 사람 '닥터 맨해튼'을 빼고는 진짜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특히 로어셰크는 이 작품의 얼굴이라고 할 정도로 인상깊은 캐릭터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슈퍼 영웅의 요소(멋진 갑옷이나 잘생긴 외모, 첨단 무기 등)는 하나도 없는, 오히려 악당이라고 하면 더 어울릴 이상한 캐릭터입니다.

'낚시'란 소리까지 들었던 예고편의 화끈한 격투 장면은 영화 속에선 밋밋하기만 할 뿐입니다. <다크 나이트>처럼 클라이맥스에서 뻥 터트려주는 액션도 없습니다. 물론 닥터 맨해튼이 초능력을 발휘하는 장면이 많이 있지만, 분명히 거대한 액션 장면인데도 재미있다기보다는 뭔가 차분하고, 심지어 우울하기까지 합니다. 카타르시스 같은 건 일부러 지워버린 듯한 영화가 <왓치맨>입니다.

<왓치맨>과 <다크 나이트>는 오랜 시간 다양한 시도를 하며 발전한 미국 슈퍼영웅물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 줍니다. 한 문화가 발전하다 보면 결국 '패러디'와 '뒤집기'로 흘러가게 됩니다. 미국 슈퍼영웅물도 점점 그런 모습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프랭크 밀러의 만화 <다크나이트 리턴즈>에선 다 늙은 브루스 웨인이 다시 배트맨이 되어 싸웁니다.

하지만 '딸리는' 체력 때문에 옛 영웅이 악당들에게 두들겨 맞는 모습까지 보여줍니다. 프랭크 밀러는 슈퍼맨까지 불러내서 배트맨과 싸우는데, 슈퍼맨을 '정부의 앞잡이'라고 야유하는 과격한 모습까지 보여줍니다. 이 만화가 없었다면 <다크 나이트>는 나오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슈퍼영웅물이 이렇게 변한 것은, 강대국 미국이 자기를 돌아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이미 강한 힘을 손에 넣었고, 그걸 마음껏 써본 자는 곧 그 한계, 부작용, 악한 면도 깨닫게 됩니다. <다크 나이트>가 조커의 입을 통해 배트맨의 위선과 위험함을 까발린다면, <왓치맨>은 한발짝 더 나갑니다. 영웅 '코메디언'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죽지만, 그가 죽으면서 읊조린 말은 왓치맨의 주제라고 느껴질 정도로 강렬합니다. "모두 다 농담일 뿐이야..."

그러나 이런 허무주의에 가까운 영웅물은 한국 관객들이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국 관객들은 짜증나는 현실을 잊게 해줄 재미있는 오락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강대국이 되보지 못한 한국 사회에서 '강자의 딜레마', '힘과 책임' 같은 건 피부에 와닿지 않는 주제입니다.

그래도 중간중간 적절한 액션을 넣어줘 지루함을 덜었고, 인기 배우들이 매력을 뿜어냈던 <다크 나이트>는 괜찮은 성적을 올렸지만, 배우들도 인상이 희미한 데다 액션도 웬지 맥빠지고, 상영 시간 내내 이마에 주름살만 잡히게 한 <왓치맨>은 도저히 한국에서 성공할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미국 관객이나 한국 관객 중 누구는 옳고 누구는 틀렸다, 누가 더 수준이 높다 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미국과는 달리 '영웅'이나 '슈퍼 파워'를 손에 넣어 본 적이 없고, 그래서 아직 그것을 비판한다기보단 염원한다는 사실, 이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왓치맨 슈퍼히어로 한국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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