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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위해 이 대통령 만나겠다"

제14회 부산국제영화제 찾은 프랑스 자크 랑 대북 특사

09.10.12 21:50최종업데이트09.10.12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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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계의 싸움은 곧 우리의 싸움입니다. 유럽이 한국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지난 1999년 6월 25일, 당시 프랑스 국회 외교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자크 랑 사회당(PS) 의원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의 일부다. 1998년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투자협정(BIT)에서 미국이 한국에 스크린쿼터 축소를 요구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BIT에 반대하는 영화인 투쟁이 들불처럼 일어나던 시기였다.

한국 영화인들, 자크 랑 의원 만남 요청... 왜?

왼쪽부터 자크 랑 대북 특사, 정지영 감독, MK픽쳐스 이은 대표 ⓒ 박영신


자크 랑 의원이 한국 영화인들을 만났다. 지난 8일 문을 연 제 14회 부산국제영화제가 그 배경이었다. 랑 의원은 앞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대북 특사 자격으로 지난 6일부터 11일까지 엿새 동안의 일정으로 방한, 지난 7일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을 비롯해 국내 정치인들과 회동했다.

영화제 이틀째인 지난 9일 부산으로 달려온 랑 특사는 지난 9월 새로 임명된 조희문 영화진흥위원회(KOFIC) 위원장과 면담 뒤 국내 영화인들을 찾은 것이다. 국내 영화인들의 즉흥적인 요청으로 이뤄진 만남이었다.

9일 저녁 9시, 해운대 그랜드 호텔 로비에서 랑 특사를 기다린 국내 영화인은 정지영 감독, MK픽쳐스 이은 대표, 씨네2000의 이춘연 대표 등 3인. 랑 특사는 프랑스 국립영화센터(CNC) 베로니크 캘라 위원장,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들과 함께 등장했다.

코스타 가브라스는 <실종>(1982), <제트>(Z, 1989), <계엄령>(1993) 등 정치영화로 알려진 그리스 출신의 프랑스 감독. 자신의 신작 <낙원은 서쪽이다>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의 월드시네마 부문에 초청돼 부산에 온 것이다. 자리를 잡느라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코스타 가브라스는 인사를 대신해 이렇게 말했다.

"내 새 영화를 소개하러 부산에 왔는데 이번 방문으로 나는 한국과 부산국제영화제를 발견하게 됐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8일) 부산국제영화제의 프로그램을 찬찬히 훑어봤는데 초청된 영화들이 질적으로 수준이 높아 놀랐다. 부산은 '아시아의 칸'이라고 말하고 싶다."

랑 특사 "스크린쿼터 온전히 지키지 못해 유감"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과 씨네2000 이춘연 대표 ⓒ 박영신


한편, 국내 영화인들과 인사를 나눈 랑 특사는 근황을 묻는 기자에게 "방한 직후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을 만났다"며 "3주 후 북한을 방문할 예정인데 그 이전에 사르코지 대통령이 관련국, 즉 한국과 일본, 미국, 중국의 대표자들과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부산국제영화제를 계기로 한국 영화인들을 만나게 돼 매우 기쁘다"는 말로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한 랑 특사는 "과거 오랫동안 관심 있게 지켜봐온" 한국 영화인들의 자국영화 보호운동을 격려하기도 했다.

"여러분은 참으로 용기 있는 투쟁을 이끌어왔다. 현재까지도 여러분의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처음 여러분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매우 영광스럽다고 생각했다. '보라. 여기 예술과 창작을 위해 싸우는 영화인들이 있다'고 혼잣말을 할 정도로. 더욱이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는 한국영화의 놀라운 성장은 이제 한국이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영화의 나라'라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한 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오늘날, 여러분 스스로가 자랑으로 여기던 스크린쿼터제도를 온전히 지켜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의 압력이 어마어마했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여러분이 기억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미국영화협회(MPAA)의 잭 발렌티 회장에게 서한을 보내 미국의 압력을 중지해줄 것을 요청한 바 있다.

내가 존경해 마지 않는 당시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그러나 영화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김 대통령이 프랑스를 공식 방문했을 때 파리에서 만난 일이 있는데 불행히도 김 대통령이 충분히 투쟁적이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기실, 랑 특사는 앞서 언급한 서신을 통해 "스크린쿼터 축소는 한국 영화산업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것"이라며 "스크린쿼터제도는 활력 있고 독창적인 한국 영화산업 발전에 기여한 바 크기 때문에 반드시 유지돼야 한다"고 주장한 '전력'이 있다.

이와 관련해 정지영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지난 1999년 3월 내한한 발렌티 회장과 윌리엄 데일리 미 상무장관이 "스크린쿼터를 폐지하는 것이 한국영화산업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 발언하자, 김 전 대통령은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 뽑아준 대통령이다. 대한민국 국민이 원하지 않는 일을 내가 행하는 것은 대통령으로서의 직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한다"며 난색을 표했다는 것.

"당시에는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분위기가 국민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임권택 감독을 포함해 영화인 130여 명이 삭발투쟁 하던 시기다. 그러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정부의 홍보 작전에 영화인들의 투쟁이 밀렸다. 스크린쿼터 수호 투쟁을 영화인들의 집단이기주의로 매도하는 등 우리가 여론싸움에서 진 것이다."

"한국영화 상영일수 더 줄일 수도 있다는데"... "금시초문"

정지영 감독. ⓒ 박영신

정 감독은 무엇보다 "한국의 스크린쿼터 수호투쟁에 보내준 랑 특사의 지지와 성원에 감사를 전하고자 '오늘' 만남을 요청한 것"이라 했다. 동시에 정 감독은 "우리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유네스코(UNESCO) 문화다양성협약이 국회 비준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우리의 투쟁"이라 설명한 뒤, 랑 특사가 한국의 정치 관료들을 만나게 되면 문화다양성협약의 중요성을 강조해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한미FTA(자유무역협정)의 선결조건으로 스크린쿼터가 반 토막 나긴 했지만 문화다양성협약이 국회 비준을 통과하면 우리는 스크린쿼터 회복투쟁에 돌입할 계획이다."

스크린쿼터 회복투쟁이라는 말이 나오자 랑 특사는 회의적인 표정으로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 예상하느냐"고 되물었고 정 감독은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스크린쿼터 수호 투쟁을 할 때 우리는 가능성 여부를 계산하지 않았다. (투쟁을)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싸웠다."

잠시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어보인 랑 특사의 조심스러운 질문이 뒤를 이었다.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서 묻는다. 이번에 새로 당선된 한국 대통령이 '정권을 잡으면 스크린쿼터, 즉 한국영화 상영일수를 더 줄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말을 '오늘' 들었는데 사실인가?"

정 감독은 '금시초문'이라고 대답했지만 "만약 소문이 사실이라면 이명박 정부를 상대로 또 투쟁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고 랑 특사는 "그렇다면(금시초문이라면) 안심"이라고 했다.

국내 일부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그러나 스크린쿼터 추가 축소를 주장하는 논문들이 속속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스크린쿼터 축소가 한국 영화산업에 도움이 된다는 게 골자. 한미FTA 협상 당시 미국 측의 요구는 애당초 국내 한국영화 의무상영일을 146일에서 32일로 축소시키는 것이었으나 결국 73일 선에서 마무리됐다.

이런 연유 때문에 한미FTA 추가협상이나 기타 대미 외교문제가 불거지면 '한국 정부가 스크린쿼터 추가 축소라는 선물을 미국에 얼마든지 바칠 수 있는 것이 현재의 분위기'라고 한 영화관계자는 기자에게 귀띔한 바 있다. '시기'가 문제일 뿐이라며.

대화를 경청하던 코스타 가브라스는 "한국의 스크린쿼터가 처한 상황에 대해 조금은 안다"며 다음과 같이 조언하기도 했다.

"여러분이 감독이나 예술가의 입장에서 다가설 때 정부와의 대화는 불가능하다. 자본과 산업의 논리로 접근한다면 정부는 영화인 여러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다. 이런 경우, 영화인협회는 개개인의 문제를 언급해서는 안 된다. 영화인 모두가 함께 영화 전체의 문제를 말해야 한다.

한국의 스크린쿼터 투쟁은 프랑스에서 68혁명 직후에 만들어진 프랑스 영화감독협회(SRF)라는 조직을 연상시킨다. 나 또한 이 조직과 함께 싸웠으나 곧 여러 가지 문제들이 불거졌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영화인 개개인의 문제들이 터져 나온 것이다.

우리가 프랑스 영화감독협회를 창설한 이유는 영화와 창작 전체의 문제를 말하기 위한 것이지 영화인 개개인의 수입이나 작업 조건을 불평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정부는 자국영화를 보호하고 발전시킬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부의 협력 없는 자국영화는 존재할 수 없다. 이 주장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한국영화에 도움 된다면 이 대통령 만나 설득할 용의 있어"

프랑스 국립영화센터 베로니크 캘라 위원장은 이에 덧붙여 "한국영화가 세계에서 빛을 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스크린쿼터라는 막강한 자국영화 보호제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캘라 위원장의 생각에 동의한다며 말을 받은 랑 특사는 '한국 영화인들을 대신해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40여 분 동안의 대화를 마무리했다.

"현재 한국 영화계의 사정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나를 비롯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프랑스 영화계의 대모 캘라 위원장, 유럽영화를 대표하는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이 현 한국 대통령을 만나 설득할 용의가 있다."

1958년 시작돼 오늘에 이르는 프랑스 제 5공화국 역사상 장관으로서 최장수 임기를 기록한 랑 특사는 총 12년(1981년~1993년)에 걸쳐 문화장관과 교육장관을 지냈다. 랑 특사는 특히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1981년부터 10년 동안 일명 '문화 대통령'으로서 프랑스 문화의 새 지평을 연 주역으로 평가되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 자크 랑 코스타 가브라스 PI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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