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마지막 날, 어른들은 가수 이용이 부른 <잊혀진 계절>을 들으며 스산한 늦가을을 보내지만, 그 가슴 찡한 피아노 선율을 알 리 없는 요즘 아이들에게는 자기 생일만큼이나 가슴 설레어 하는 날이다. 양력 10월 31일은 '할로윈 데이(Halloween Day)'이다.
유치원생 아이를 둔 가정에는 가장(假裝) 행사를 위한 준비물을 챙겨오라는 등의 안내문이 발송되고, 아이들은 원 없이 초콜릿과 과자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마냥 신나 한다. 언제부턴가 웬만한 유치원은 물론, 몇몇 교회, 심지어 초등학교에서조차 거르지 않고 아이들에게 챙겨줄 만큼 할로윈 데이는 보편화되었다.
할로윈 축제는 고대 켈트족의 겨울과 새해맞이 의식으로, 크리스트교 전통과 섞이면서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인 11월 1일의 전야제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할로우(hallow)란 앵글로색슨족의 고어로 '신자'라는 뜻으로, 여기에다 전야제를 뜻하는 '이브(eve)'라는 의미가 더해져 할로윈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기실 할로윈 데이가 아이들에게 보편화된 건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중장년층은 말할 것도 없고, 20~30대 젊은이들조차 할로윈이라는 단어를 낯설어 한다. 모두에게 낯설기만 했던 이 날이 웬만한 달력에도 실릴 만큼 유명해진 것은 최근의 영어 조기교육 열풍 때문으로 보인다.
교육방송(EBS)의 태반이 외국어 교육 프로그램이고, 그중 대부분이 영어와 관련된 꼭지인 건 다 아는 사실이다. 아니나 다를까 영어 교육 프로그램이 시작될 때마다 오프닝 멘트에 빠짐없이 등장한 게 바로 오늘이 할로윈 데이라는 얘기였다. 우리나라의 유별난 영어 붐을 타고 유행처럼 번지다 보니, 서양 문화를 이해하는 수단을 넘어 시나브로 아이들을 현혹하는 상품이 돼 버렸다.
우리글과 말도 서툰 아이들에게 이날만큼은 영어를 사용하도록 하고, 가면과 복장은 물론 점심도 피자와 스파게티 등 서양식으로 바꿔, 제대로 된 할로윈 데이 체험을 홍보하는 유치원도 있다고 한다. '서양 문화를 알아야 영어를 잘 할 수 있다'는 취지란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중얼대는 아이들의 "트리코트리(Trick or Treat)!"가 알아야 할 서양 문화라는 것도 우습지만, 영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한다는 식의 인식은 씁쓸할 따름이다.
가면 놀이도 재밌고, 초콜릿과 피자를 마음껏 먹을 수 있어 그저 즐거운 날이라지만, 자칫 반드시 기념하고 기억해야 할 국경일과 명절이 아이들의 기억 속에 되레 뒷전으로 밀리지 않을까 우려된다. 마치 20대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웬만한 명절보다도 더 큰 의미를 주는 '발렌타인 데이'와 '화이트 데이'가 그런 것처럼.
해마다 2월과 3월의 14일, 전국의 가게를 형형색색의 초콜릿과 사탕이 뒤덮듯, 언제부턴가 10월 하순 즈음에도 할로윈 축제와 관련된 상품들이 진열대 가득 놓이게 됐다. 할로윈의 상징물인 '호박 가면'은 초등학교 앞 문방구 등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고, 도깨비와 유령 모양으로 꾸민 초콜릿과 사탕 등이 아이들의 눈길을 잡아끌고 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 아이들에게 물어봤다. 할로윈 데이, 발렌타인 데이, 화이트 데이는 물론, 심지어 정체불명의 로즈 데이(5월 14일), 빼빼로 데이(11월 11일) 등은 모두 알고 있을뿐더러 잊지 않고 챙긴다고 답했다. 그러나 24절기는커녕 '도무지 모를 것 같지 않은' 한식과 단오, 동지가 언제인지 정확히 답하는 아이는 아예 없었고, 중학생인데 절기와 한식이 뭐냐고 되묻는 경우도 있었다.
아이들의 입맛에 떡이 피자와 햄버거에게 밀리고, 식혜와 수정과가 콜라에 자리를 내준 지 이미 오래다. 학교에서도 국어보다 영어가 훨씬 더 중요한 과목으로 대접받고 있고, 우리 옷 한복은 생활에 편리하도록 수없이 개량됐지만 아이들은 1년에 한두 번 특별한 날에만 입는 거추장스러운 옷으로 여기고 있다.
우리 것이 최고라며 고집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가정이든 학교든 지금 아이들이 생활하고 있는 환경을 보노라면 서양으로부터 전래된 것들이 우리 고유의 것들보다 세련되고, 흥미로우며, 우월하다는 인식을 조장하는 것 같다. 우리의 것들이 관심에서 점점 밀려나면서 아이들은 주변에 온통 외래의 것들로만 포위된 환경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게 됐다.
어른들이야 아련하게 가슴 적시는 <잊혀진 계절>의 피아노 선율을 들으며, 온 산을 울긋불긋하게 물들인 단풍을 구경하며 하루를 보내겠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10월의 마지막 날은 단지 할로윈 데이일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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