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와 여인

등록 2009.11.15 12:07수정 2009.11.15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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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락에 피어 있는 노오란 국화가 유난히 아름답다. 아마도 제 철을 만난 때문일 것이다. 꽃의 여왕이라고 뽐내는 장미꽃도 가을 국화 앞에서는 왠지 초라해 보인다.

 

가을국화 전시회에 다녀왔다. 국화전시회를 관람하는 것은 해마다 가을이 되면 나의 연례행사처럼 찾아오는 축제이다. 넓은 전시장을 가득 메운 꽃들은 각양각색이었다. 탐스럽고 화려한 꽃들이 시샘하듯 다투어 피어 있었다. 그런데 어인 일일까? 공들인 흔적이 역력한 꽃일수록 아름답게 보이기보다는 부자연스러워 보였던 것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바친 정성에 비하여 감동이 작은 이유를 굳이 인위적인 노력의 한계성이라 해야 할까? 사람의 얼굴만큼이나 크고 탐스럽게 피워낸 꽃 역시 억지 춘향이만 같았다. 지도 모형 등 갖가지 모양으로 애써 꾸며놓은 것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은 걸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 최상의 모양 아닐까 싶다.

 

그 화려하게 꾸며놓은 뒤켠에는 사람의 손길을 전혀 받지 못한 들국화가 버린 자식처럼 놓여 있었다. 아무 데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들국화가 두 눈에 가득 들어왔다. 낡은 고목을 타고 오른 모습이 정감을 물씬 자아냈는데 웬일인지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화려한 장식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수수함이 이렇게 가슴 뭉클하도록 감동적이니, 조물주의 배려가 그래서 위대한가 보다. 최소한의 장식은 그 대상을 찰나적으로 돋보이게 할 수는 있지만 지나치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이 전시회에서 새삼 확인한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꽃집이었다. 8남매 중 맏이인 언니가 원예를 전공한 덕택으로 우리 집 넓은 마당에는 갖가지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났었다. 봄의 전령인 개나리가 피기 시작하면서 늦가을 찬서리가 내리도록까지 꽃이 끊이질 않았다. 피처럼 붉은 칸나며, 다알리아, 천일홍, 작약, 맨드라미, 목련 등... 특히 가을이면 여러 종류의 국화가 지천으로 피어났었다. 긴 울타리까지 온통 희고 붉고 노란 국화로 가득했다. 어머니께서는 베개속도 국화를 말려서 채워주셨다. 그렇게 하면 머리가 맑아진다고 달랬지만 나는 그 사각거리는 소리가 싫어서 짜증을 부리곤 했었다. 실국화를 따다가 남동생과 재기차기를 하던 일은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동생보다는 내가 뒤져서 참 많이도 울었었다.

 

많은 추억들 중에서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노오란 국화로 만든 국화차였다.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붓고 잘 말린 국화를 띄우면 찻잔 속에서 노오란 국화가 피어났었다. 그때의 감동은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다. 그 맛이 상큼하면서도 환한 맛은 어머니의 정성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우러나지 않았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서 해보려고 하지만 지금은 그런 국화를 구하기조차 쉽지 않아 번번이 꿈으로 남아 있다.

 

어릴 적의 국화는 그렇게 송이가 크지 않았다. 그런데도 몇 송이만 방 안에 꽂아놓으면 방안에 향기가 가득했었다. 국화 전시장에는 그토록 많은 국화가 피어 있음에도 이상하게 향기를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은 꽃의 화려함에 비해 그 향기가 너무 약한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현대의 농업기술로 화려하게 꽃은 피워낼 수 있을지언정 향기는 만들어낼 수 없는 문명의 한계 때문이었을까?

 

사람은 저마다 다른 모습과 향기를 지니고 산다. 겉모습은 아름다워도 내면의 모습은 향기 없이 건조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겉모습은 비록 아름답지 않아도 그윽한 향기를 지닌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한 번 만나도 오래도록 인상깊게 남는다. 아름답고 향기를 지닐 수 있으면 금상첨화겠으나 그 중 하나만 택하라고 하면 나는 향기를 택하고 싶다. 꾸밈없는 수수함으로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들국화 같은 여인이 되고 싶다.

 

내 가족에게 그리고 내 주변의 이웃들에게 화려한 분위기는 아니 주더라도 따뜻하고 인정 많은 여인이고 싶다. 밤마다 베개 속에서 사각이던 국화꽃잎처럼 긴 밤 벗할 정인(情人)으로 살고 싶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오상고절 지조 높은 여인이고도 싶다. 그래서 설움 많고 고통 많은 내 고향에 한 그루 촛불처럼 불 밝히는 여인이고 싶다.

2009.11.15 12:07ⓒ 2009 OhmyNews
#국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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