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그까짓게 왜 중요하냐, 놀 때는 놀아라

연말이면 돌아보게 되는 내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고모님

등록 2009.12.14 14:02수정 2009.12.14 14:02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딱히 온고지신을 하자는 것도 아니면서, 망년회다 송년회다 하는 얘기가 들리는 계절이면 나도 모르게 어쩔 수 없이, 빚쟁이에게 독촉이라도 받듯이 지나온 길을 돌아보게 된다. 더불어 내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 또는 계기 같은 것들을 조심스레 하나씩 손가락을 꼽아가며 끄집어내보기도 한다.

 

손에 꼽을 만한 사건이나 계기는 대개 유·소년기에서 청년기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매년 그 순위가 바뀐다. 전에는 별 의미를 두지 못했던 것들이 새로 목록에 추가되면서 기존의 어떤 것이 목록의 끝으로 내려지기도 하고 아예 빠지기도 한다. 하나의 추억이, 그저 막연하게 달콤하거나 혹은 애달프기만 했던 서정이 갑자기 거대한 서사의 옷을 입고 나타나서 재평가를 요구하기도 한다.

 

한 여자가, 한 여인이 울고 있다. 아니다. 흐느끼고 있다. 울고 싶은 자신의 감정이 부끄러워서, 차마 울지도 못하고 끅, 끅 소리만 내고 있는 한 여인의 어깨를 다른 또 한 여인이 부둥켜안고, 부둥켜안은 채로 아무 말도 못하고 이빨을 지그시 깨문 채로 서까래가 듬성듬성 드러나 있는 천장을 본다.

 

천장에는 돌아가시기 전의 작은할아버지께서 만든 빗자루가 즐비즐비 걸려 있다. '서방 죽은 딸년 오면 준다'고, 달리 줄 것이 없으니 빗자루라도 준다고 해마다 몇 개씩 만들었지만, '딸년'은 오지 않았다. 올 수가 없었다. 올 수 없는 '딸년'을 말없이 기다리기만 하다가 작은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이제 그 '딸년'이 왔다. 해가 바뀌어 제삿날에도 왔다.

 

"언니, 언니, 자다가도 숨이 잘 안 쉬어져서, 가슴을 손톱으로 후벼 파고 쥐어뜯어야만 해."

 

작은 할아버지 제사를 모시러 오신 고모님이 뒷방에서 올케언니를 부둥켜안고 흐느끼며 속삭인다. 울음소리조차 크게 내서는 안 된다는 듯이, 몸부림조차 쳐서는 안 된다는 듯이 그저 부둥켜안은 채로 속삭이며 끅, 끅 소리만 내는 이러한 그림은 그 뒤로도 몇 년 동안 연례행사가 되었다.

 

그 무렵에 나는 아직 국민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다. 따라서 내가 그때 고모님의 속삭이는 소리를 제대로 들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다만 내 몸에 어떤 문신처럼 남아 있는 그때의 쓰라린 기억이 그런 말을 했었다고 주장할 뿐이다. 지금도 고모님의 그 울음소리와 속삭이는 소리를 생각하면 내 몸에서 무슨 날카로운 꼬챙이 같은 것들이 삐죽삐죽 솟아나는 듯하다.

 

 그 무렵에 고모님의 나이가 아마 이십대 후반이나 삼십대 초쯤 되었을 것이다. 같은 연배의 아들이 있었다. 일찍이 상처한, 아버지 연배의 남자와 결혼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난한 젊은 남자에게 시집가서 굶기를 밥 먹듯이 하기보다는, 늙었어도 부자인 남자에게 재취로나마 들어가서 원대로 먹기라도 하라는 작은할아버지의 애달픈 결정이 낳은 슬픈 결혼이었다.

 

나중에야 해서는 절대로 안 될 결혼이었다고 땅을 쳤지만, 그때는 이미 아버지 같은 남편과의 사이에 아들 둘 딸 둘 자식 넷을 두고 있었다. 그 자식들이 자라기도 전에 남편은 노환으로 세상을 떴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여자 혼자서 자식 넷을 키우기도 아득한데, 전실 자식이 제 아버지 죽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쫓아와서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논 문서를 내놓으라고, 밭 문서를 내놓으라고, 집을 내놓으라고 발길질을 하고 주먹질을 하다가 제풀에 지치면 키우는 소나 돼지를 끌어다가 팔아먹기를 밥 먹듯이 했다.

 

호적상으로는 아들이고, 실제로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팔뚝 근육이 펄떡펄떡 뛰는 맹금류 같은 사내로부터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고모님은 논 문서를, 밭 문서를 하나씩 둘씩 내주었지만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호적상으로 아들인 그가 요구하는 것은 재산 전부였다. 그리고 호적에서마저 사라지라 하는 것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트집과 행패가 십 년을 하루같이 반복되었다. 그 지독한 폭력은 마침내 고모님의 큰아들이 이팔청춘 팔뚝 근육이 펄떡펄떡 뛰는 나이가 되었을 때에야 겨우 끝이 났다.

 

고모님의 큰아들과 내가 갑이었다. 생일은 그가 한 달 빨랐다. 그 시기에 우리는 "그 상놈의 새끼 눈에 보이기만 하면 갈갈이 찢어 죽인다"고 작대기니 낫 같은 것을 들고 벼르곤 했었다. 그러나 '그 상놈의 새끼'는 자기 아버지의 제삿날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자신의 힘만 믿고 날뛰는 자들은 더 큰 힘을 만났을 때 형편없이 추레해지고 만다는 생의 이치 같은 것을 우리는 그렇게 터득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기에 나는 고모님으로부터 아주 중요한 것을 배우고 있었다. 강철이 단련되는 이치와 같다고나 할까.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어야 했던 세월을 거친 뒤의 고모님은 여느 어른들과는 완연히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그 시기에도 지금처럼 어른들은 아이들만 보면 공부해라, 공부해라 노래를 하고 있었지만 고모님은 달랐다.

 

"너 이놈, 공부하기 싫어졌구나. 놀고 싶지? 놀아라. 나랑 같이 놀자 잉? 술 먹을래? 담배도 피고 싶지?"

 

이제 중학교 2학년인 아들에게 술을 권하고 담배마저 권하는 어머니. 그 바람에 그 아들은 인문계 고등학교는 꿈만 꾸어보고 그 즈음에 신설된 종합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고모님은 아무 이상할 이유가 없다는 듯 거침이 없었다. 종합학교에는 인문계 학교에 없는 여러 가지 신나는 저마다의 특성을 발휘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있었다. 고모님은 저마다 다른 특기를 갖고 있는 아이들이 집에 놀러오면 하나씩 둘씩 단골로 찾아오게 만들어 나갔다.

 

학교를 나오면 딱히 가서 놀 만한 곳이 없는 아이들에게 고모님 댁은 차츰 하나의 해방구로 인식되어 갔다. 다방은 미성년자라고 받아주지 않고, 빵집은 시시해서 들어가기 싫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미팅 장소로 고모님 댁을 활용하기도 했다. 이 소문은 급속하게 퍼져서 이삼십 리 떨어진 곳에 사는 아이들도 끼리끼리 모여 뭔가 작당할 일이 있으면 고모님 댁을 찾았고, 나중에는 인문계 학교 아이들은 물론 여학생들까지 떼로 몰려오기에까지 이르렀다.

 

농사가 다 끝난 겨울 특히 12월 중순에서 말일까지는 고모님 자신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박수 치고 노래하며 술을 마시고 춤을 추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남자애들만 찾아올 때는 같은 동네는 물론이고 인근 동네로까지 사람을 보내 여학생들을 불러들이는가 하면, 여학생들만 찾아올 때는 또 같은 방식으로 남학생들을 소집해서 분위기를 띄워주는 등 파티매니저 역할까지 자임하고 나섰다.

 

파티는 대개 수건돌리기로 시작해서 광란의 고고춤을 거쳐 서정적인 통기타 연주 같은 것으로 끝을 보았다. 특히 수건돌리기에서 고모님의 역할은 빛을 발하곤 했다. 야외에서와는 달리 방 안에서의 수건돌리기는 자잘한 분쟁이 끊이지 않고 발생한다. 크지도 않은 방에 사람이 이십여 명씩이나 앉아 있고 보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야말로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다.

 

때문에 수건을 정확하게 어떤 사람의 엉덩이에 밀착시켜놓지 않으면 소유권 분쟁(?)이 발생하기 마련인데, 끊임없이 발생하는 이 사소한 분쟁을 고모님이 앉을 틈도 없이 선 채로 일일이 쫓아다니며 놀이가 중단되지 않도록 사전예방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혹시 누군가 숙제를 들먹이며 돌아갈 걱정이라도 할라치면 이렇게 일갈을 하는 것이었다.

 

"에라이 못난 바보천치 같은 써글놈아, 숙제 그까짓 것 좀 안 했다고 퇴학이야 시키겠냐. 퇴학 그까짓 것 좀 당하면 또 어떠냐. 오늘은 놀자. 놀아야 할 때 놀아야 하는 것이다. 네가 지금 안 놀고 집에 가서 공부한다고 자빠진들 공부는 또 되겠냐. 안 되겠지? 거봐 이놈아. 얼른 수건 들고 뛰어."

 

어찌 생각하면 대단히 무책임하고 방종을 조장하는 혐의마저 있어 보이는 고모님의 이런 발언은,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조건이 무엇인가를 어렴풋이나마 언뜻언뜻 생각하게 하는 커다란 울림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한다거나 집에 가서 자기 부모에게 일러바치는 못난 짓을 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우리는 놀면서도 당당할 수 있었고, 무슨 짓을 해도 남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몰래 하는 비굴함 따위와는 애당초 친해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큰아들이 고3이 되었을 때, 고모님은 아들을 불러 앉혀놓고 간단한 연설을 했다. 사람이 세상을 사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다. 가난하면서 이웃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명예로운 길이 있고, 명예는 별로 없지만 잘 먹고 잘 입는 부자로 사는 길이 있다는 요지의 연설이었다. 연설이 끝난 뒤에 고모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가난하게 살래, 부자로 살래?"

 

그때 고모님의 지론에 따르면, 가난하게 살고자 하면 대학 입학을 해야 하고, 부자로 살고자 하면 대학을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대학은 학문을 하는 곳이고, 학자는 돈과는 담을 쌓은 채 명예만을 추구하는 법이니 절대로 부자는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대학이란 오로지 학문만을 하는 곳이고 잘사는 일과는 무관하다는 것이었는데, 고모님의 이런 논리는 사실 약간의 오해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평생을 서당 훈장으로 변변한 재산도 없이 돌아가신 친정 어르신을 너무도 가까이에서 보아온 고모님은 사서든 삼경이든 직접 읽지는 않았다 해도 최소한 그 내용이 무엇인가 정도는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사서 가운데 첫 번째로 꼽히는 대학은 본격적인 학문으로 들어가는 출발점이라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고모님은 '대학'과 '대학교'를 혼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고모님은 학자가 학자로서의 명예에 만족하지 않고 돈과 권력을 손에 쥐는 교두보로써 자신의 학문적 명예를 이용할 수도 있다는 미래사회를 예견하지 못한 오류도 범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고모님은 큰아들을 대학에 보내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말단이나마 공무원 시험을 쳐서 오늘까지 그 직을 유지하고 있으니, 고모님의 생각과는 달리 부자는 되지 못했지만, 고모님을 그토록 공포에 떨게 했던 먹고 사는 걱정으로부터는 완전히 해방된 셈이다.

 

그러나 오늘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밤낮으로 이것저것 눈치나 보는 비굴하고 '찌질한' 공무원 노릇으로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티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사표를 던질 각오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할 말은 하고 산다는 점을 들어야 할 것이다. 어른다운 어른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즈음, 우리의 청소년기를 그토록 당당하게 아름다운 색깔로 장식해준 고모님에게 나는 오늘도 감사드린다.

2009.12.14 14:02 ⓒ 2009 OhmyNews
#송년 #인간의삶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2. 2 천연영양제 벌꿀, 이렇게 먹으면 아무 소용 없어요
  3. 3 버스 앞자리 할머니가 뒤돌아 나에게 건넨 말
  4. 4 "김건희 여사 라인, '박영선·양정철' 검토"...특정 비서관은 누구?
  5. 5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