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참사범대위는 30일 낮 용산구 남일당 빌딩앞에서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용산 참사 유가족이 정부와 협상을 사실상 타결했다' '철거민 희생자들의 장례식은 1월 9일 치르고, 정운찬 총리가 책임을 인정하고 유가족에게 유감을 표명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고 이성수씨 부인 권명숙씨가 남편 영정사진을 꼭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권우성
- 용산참사를 모르쇠 하던 정부의 태도가 왜 바뀌었다고 보나? "참사 6개월이 지날 때까지는 완강했다. 유가족이나 용산 범대위가 지치길 기다린 것 같다. 그러나 지금까지 오면서 대중 동력을 동원한 집회 등은 줄었을지 몰라도, 갈수록 특히 종교계에서 여론이 확산됐다. '용산참사 해결 없는 친서민 행보는 기만'이라는 비판도 계속 나오고, 특히 서울시 같은 경우 내년 지방선거에서 안 좋다. 대정부 투쟁으로 정부를 압박했다기보다, 용산이 자꾸 걸림돌이 되니까 가급적 빨리 풀고 가려는 의도로 생각한다."
- 장례는 치르지만, 진상규명이나 제도 개선은 이루지 못했다. 숙제가 많다. "지금은 1단계만 정리된 것이고, 재개발정책에 대한 과제는 계속 가야 한다. 1주기까지야 범대위라는 틀을 유지하지만 그 뒤에는 현실에 맞는 변화가 필요하다. 준비기간을 갖고 장기적 계획을 세워야 한다.
범대위 안에서는 '지방선거와 연계해서 움직이자'는 입장도 있는데, 그에 대한 구체적 고민은 못하고 있다. 재개발정책 토론회를 열고 후보들에게 입장을 내게 할 수도 있고 방식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다.
나는 지방선거와 무관하게 운동하자는 생각이다. 한쪽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판 대응을 맡고, 다른 쪽은 재개발 문제에 대해서 사회적 이슈로 제기하면서 만들어가는 두 축으로 가야 한다고 본다. 철거민 당사자 운동을 보편적으로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 지난 1년 가까이의 투쟁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무엇인가. "이렇게 오래갈 줄 몰랐다. 과거 정권들은 사람들이 죽으면 빨리 해결하려 했으니까. 1년 투쟁으로 생각했으면 전략적으로 접근하면서 사업을 배치했을 것이다. 제일 아쉬운 것은 개발 정책의 문제점을 공론화하지 못한 것이다. 예를 들어, '한강 르네상스니 디자인 서울 사업의 결과가 어떻게 될 거냐, 명품도시 된다고 내가 행복해지냐' 하는 쪽으로 사고가 이어져야 한다.
올해 김수환 추기경,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대중적 추모 열기가 놀라울 정도였는데, 반면 용산 철거민은 광장에서 추모받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용산은 '불편한 진실'을 마주 대하도록 요구한다. 사람이 죽은 것은 안타깝고 이명박 정부에 규탄하는 마음도 생긴다. 그러나 세입자들이 권리를 주장하면서 재개발에 문제 제기하는 것은 흔쾌히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다.
경제위기가 심해질수록 땅에서 이득을 취하게 되고, 중산층들에겐 재개발이 남의 문제 같다. 실제로는 중산층이 재개발로 쪽박 차는데도 말이다. 철거 지역 안에서도 '옆집은 부서지지만 설마 내 집은 괜찮겠지' 하는데, 떨어져 사는 사람은 오죽하겠나. 이대로 가면 '울타리치기(신 앤클루저)' 현상으로 10년이나 20년 뒤에는 서울에서 서민들이 밀려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공동체도 사라진다. 주로 재개발되는 지역이 그나마 공동체적 요소가 남아있는 동네다. 사람과의 관계도 파괴된다."
"문규현 신부님 쓰러지시고,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용산참사 해결을 촉구하며 단식농성을 벌이다 쓰러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문규현 신부가 퇴원해 지난 1일 오전 서울 한강로 용산참사 현장인 남일당 건물을 찾아 전종훈 신부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유성호
- 긴 투쟁인데 그동안 포기하고 싶었던 적 없었나. "외부에는 말하기 어려운 갈등이 있다. 유가족끼리 용산4구역 철거민끼리…. 사람들 설득하고 다독여서 끌고 오면서 편한 날이 없었다. 정신적인 에너지 소모가 굉장히 많다. 어떤 때는 유가족들이 장례 치르자고 해주길 기다리기도 했다. 그래도 그분들이 날 믿어주고, 그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진짜 힘들었던 때는 용산 재판 변호인단이 바뀔 때였다. 1차 변호인단이 검찰 수사기록 3000쪽 공개를 요구한 당위성은 존중하지만, 현실적으로 재판을 거부하면 잃는 게 너무 많았다. 입장이 팽팽하게 좁혀지지 않았고 오해도 있었다. 지금 와서 보면 1차 변호인단도 나름대로 역할을 했고, 2차 변호인단도 내용상으로 재판에서 이겼다고 본다. 2심에서 정치적 판단 없이 형사사건으로 판결하면 이긴다고 본다. "
- 심장마비로 쓰러진 문규현 신부 일도 충격적이었다. "그때도 진짜 고통스러웠지. 내가 아는 문 신부님은 워낙 건강하신 분이다. 전날이 마침 재판 선고 날인데 일부러 분위기 더 밝게 하려고 '재롱'도 떨면서 노력하셨다고 한다. 그러다 쓰러져서 3일 만에 (의식을 회복해) '부활'하신 건데, 초조하고 불안해서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대로 가시면 용산 투쟁하다가 돌아가신 거잖아. 종교가 없는데도 기도하고 싶어져서 성당에 앉아있기도 했다."
- 참 길게도 갇혀 지냈다. 언제까지 수배자 생활을 할 것인가. "(철거민들) 보내드리고 곧바로 자진출두할 생각이다. 당장은 어떻게 장례 치를지 논의하느라 바쁘다. 그동안 후회한 게 사전구속영장 나왔을 때 잡혀갔으면 이미 나오지 않았을까하는 점이다. 김태현 상황실장은 체포영장 나온 거 모르고 나가다가 지난 3월 20일에 구속됐는데 100일 있다가 나왔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