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가 더럽히는 우리 삶 (89) 펑크

[우리 말에 마음쓰기 827] '구멍나다'와 '바람빠지다'와

등록 2009.12.30 11:37수정 2009.12.30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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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펑크도 때워야

.. 그리고 보니, 가끔 타이어에 바람을 넣어 주고 펑크도 때워야 하는 물건이네요 ..  《이철수-당신이 있어 고맙습니다》(삼인,2009) 76쪽


"그리고 보니"는 "그러고 보니"로 고쳐써야 합니다. '타이어(tire)'는 '바퀴'로 다듬어 봅니다.

 ┌ 펑크(puncture)
 │  (1) 고무 튜브 따위에 구멍이 나서 터지는 일
 │   - 펑크를 때우다 / 타이어에 펑크가 나다
 │  (2) 의복이나 양말 따위가 해져서 구멍이 뚫리는 일
 │   - 양말에 펑크가 나다 / 신발 앞쪽에 펑크가 났다
 │  (3) 일이 중도에 틀어지거나 잘못되는 일
 │   - 일이 엉뚱한 데서 펑크가 났다 / 그가 오늘 모임에 펑크를 냈다
 │  (4) 낙제에 해당하는 학점을 받음을 이르는 말
 │   - 그 과목은 저번 학기에도 펑크를 냈던 과목이다
 │
 ├ 펑크도 때워야
 │→ 구멍도 때워야
 │→ 구멍난 데도 때워야
 │→ 구멍난 곳도 때워야
 │→ 구멍이 나면 때워야
 └ …

예나 이제나 일본말 '빵꾸'를 널리 쓰는 우리들입니다. 그나마 요사이에는 '펑크'로 바로잡으려고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다만, '빵꾸'가 아닌 '펑크'가 맞다고까지 이야기를 하기는 해도, '구멍'으로는 나아가지 못합니다. 펑크이든 빵꾸이든 하고 뇌까리기 앞서 우리는 누구나 으레 '구멍'이라고만 이야기했는데, 일제강점기 탓이라고만은 할 수 없이 우리 스스로 '구멍'이라는 우리 말을 내다 버렸습니다.

 ┌ 펑크를 때우다 → 구멍을 때우다
 ├ 타이어에 펑크가 나다 → 바퀴에 구멍이 나다
 ├ 양말에 펑크가 나다 → 양말에 구멍이 나다
 └ 신발 앞쪽에 펑크가 났다 → 신발 앞쪽에 구멍이 났다

우리 말 '구멍'은 그리 쓸 만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일까요. 우리 말로 읊는 '구멍'이라는 낱말은 썩 알맞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인가요. 우리 말 '구멍'으로는 뚫린 모습을 나타내기에 어울리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나요. 우리 말 '구멍'은 어쩐지 시골스럽거나 어리숙하거나 예스럽거나 낡아빠지거나 모자라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요.


이 나라 국어사전을 들추어 보니, '펑크'라는 미국말을 놓고 네 가지 뜻풀이를 달아 놓습니다. 아주 버젓이 달아 놓습니다. 그러면서 이 낱말을 쓰는 일이 옳은가 그른가를 따지지 않습니다. 하나같이 '구멍'을 가리킨다고 풀이를 해 놓으면서 '구멍'이라는 우리 낱말로 고쳐쓰도록 이끌지 않습니다.

'빵꾸'라는 낱말을 찾아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나라 국어사전은 "→ 펑크"라고만 달아 놓습니다. '구멍'을 일컬어 일본사람들이 영어 'puncture'를 일본 겨레 깜냥껏 나타내고 있음을 밝히지 않습니다.

 ┌ 일이 엉뚱한 데서 펑크가 났다
 │→ 일이 엉뚱한 데서 구멍이 났다
 │→ 일이 엉뚱한 데서 잘못되었다
 │→ 일이 엉뚱한 데서 틀려 버렸다
 │→ 일이 엉뚱한 데서 틀어지고 말았다
 ├ 그가 오늘 모임에 펑크를 냈다
 │→ 그가 오늘 모임에 구멍을 냈다
 │→ 그가 오늘 모임을 틀어지게 했다
 │→ 그가 오늘 모임에 나오지 않았다
 │→ 그가 오늘 모임을 틀어 놓았다
 └ …

우리 삶자리에 스며든 일본말을 떠올릴 때에 으레 '고구마'를 먼저 헤아립니다. 우리가 즐겨먹는 고구마는 바로 '일본말로 지은 이름'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 국어사전은 고구마가 일본말임을 따로 밝히지 않습니다. 일본사람이 붙인 이름을 우리가 받아들였으나 어느새 우리 말로 녹아들어서, 굳이 말밑이 어떠한가를 안 밝혀도 될 만큼 세월이 바뀐 까닭이기도 할 테지요.

모르기는 몰라도 사람들 입에 더 가까운 '짜장면' 같은 낱말도 나중에는 이리 굳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백 해나 이백 해쯤 뒤에는 '빵꾸'나 '엥꼬' 같은 낱말마저 우리 말로 굳을 수 있어요. 다만, '엥꼬'는 그럭저럭 걸러내려고 하는 매체가 있어 뿌리내리지는 않겠으나, 기름집에서 기름을 넣는 이들이 즐겨쓰는 '엥꼬-만땅'이 쉽사리 떨어질 리 없다고 느낍니다. 다들 앞에서는 "이처럼 잘못 쓰는 일본말 찌꺼기를 걷어냅시다!" 하고 외치지만, 정작 뒤에서는 자가용을 씽씽 빵빵 몰면서 "여기 만땅 채워 주세요!" 하고 소리칩니다.

 ┌ 그 과목은 저번 학기에도 펑크를 냈던 과목이다
 │
 │→ 그 과목은 저번 학기에도 구멍이 났던 과목이다
 │→ 그 과목은 저번 학기에도 떨어졌던 과목이다
 │→ 그 과목은 저번 학기에도 학점을 못 채운 과목이다
 └ …

대학교에서는 학점을 'A, B, C, D, F'로 매깁니다. 알파벳 성적입니다. 한글 성적이 아닙니다. '가, 나, 다, 라, 마'나 'ㄱ, ㄴ, ㄷ, ㄹ, ㅁ'처럼 매기지 않습니다. 그나마 '수, 우, 미, 양, 가'처럼 매기는 일은 고등학교로 끝입니다. 우리한테는 우리 글이 있어도 우리 글로 우리 삶을 다루지 못한다고 하겠습니다.

이리하여 이 흐름은 우리 삶자락 곳곳으로 퍼집니다. 우리한테 우리 글이 있어도 우리 글이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우리한테 우리 말이 있어도 알맞게 쓰이지 않습니다.

이 보기글에서뿐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다니는 사람 가운데 바퀴에 구멍이 난 일을 놓고 '구멍'이 났다고 말하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자전거 몸체나 부품을 가리키는 낱말이 하나같이 영어로만 자리잡는 오늘날 흐름 그대로 '펑크'라고만 합니다. '저지(jersey)'라고 하는 이름을 붙인 자전거옷을 입는 자전거꾼은 누구나 '펑크'에다가 '빵꾸'만 뇌까립니다.

ㄴ. 타이어 펑크

.. 언젠가 시골 마을에 있는 작은 성당에 갈 때였어요. 달이도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가는데 그만 길에서 타이어 펑크가 나 버렸어요. 아저씨 신부님은 빵빵한 타이어로 갈아 끼우고 나서 잠시 길가에 앉아 쉬었어요..  《권정생-비나리 달이네 집》(낮은산,2001)

지난 2001년에 나온 권정생 님 그림책에 적힌 '펑크'라는 대목을 놓고 출판사로 전화를 걸어, 아이들이 보는 책에 이 낱말을 그대로 두는 일이 어떠한지 여쭌 적이 있습니다. 출판사에서는 당신들 나름대로 손을 본다고 했지만 이 대목은 미처 살피지 못했다며 다음에 새로 찍을 때에는 고치겠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2쇄를 들여다보지 못해서 '펑크'를 '구멍'으로 고쳐 적었는지, 또는 "바람이 빠져"로 손질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어린이문학을 하는 권정생 님한테까지도 '구멍'보다는 '펑크'가 익숙할 만큼 이 낱말이 우리 삶터 구석구석에 퍼지고 뿌리내리고 번지고 뿌리박혀 있구나 하고 새삼 깨달았습니다.

 ┌ 길에서 타이어 펑크가 나 버렸어요
 │
 │→ 길에서 바퀴에 구멍이 나 버렸어요
 │→ 길에서 바퀴에 바람이 빠져 버렸어요
 └ …

곰곰이 생각해 보면 '펑크'는 '타이어(tire, tyre)'하고 한동아리가 되어 쓰입니다. "타이어 펑크"라고 씁니다. 우리 말로 '바퀴'를 쓰면 으레 '구멍'이 따라붙으나, 영어로 '타이어'라 하면 저절로 '펑크' 또는 '빵꾸'가 뒤따릅니다.

잘 쓰는 낱말 하나는 잘 쓰는 다른 낱말 하나를 부르고, 잘못 쓰는 낱말 하나는 잘못 쓰는 다른 낱말 하나를 불러들인다고 할까요. 차근차근 가다듬으려고 애쓰면 낱말 하나에서 그치지 않고 내 모든 낱말이 알차고 싱그러울 수 있으나, 제대로 마음쓰지 않으면 낱말 하나를 비롯해 내 모든 낱말이 얄궂고 뒤틀릴 수 있다고 할까요.

 ┌ 구멍나다
 └ 바람빠지다

우리 낱말책에는 '구멍나다' 같은 낱말은 안 실려 있습니다. '바람빠지다' 또한 안 실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낱말을 한 낱말로 삼아서 즐겁게 올려놓으면서 '펑크'와 '빵꾸'를 털어낼 좋은 길을 마련해야 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남을 해코지하려고 하는 짓이라면 '구멍내다'와 '바람빼다'가 될 테지요. 이 낱말은 바퀴에 구멍이 나도록 하는 일뿐 아니라 어떠한 일이 틀어지도록 하는 자리에도 쓸 수 있습니다. '김새다'라는 낱말이 있는데 '바람빼는' 일이란 내 둘레 사람들한테 김새게 하는 일이 되겠지요.

살려서 쓰려고 생각을 하면 늘 새롭게 살려서 쓸 수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쓰려고 하면서 생각을 멈추면 우리는 노상 아무렇게나 뇌까리는 말투에 길들며 엉터리 말마디만 쏟아냅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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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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