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글거리지 않는 십대들의 죽음 이야기

[유경의 죽음준비학교] 책, 죽음을 말하다(1) : <우아한 거짓말>

등록 2009.12.31 09:27수정 2009.12.31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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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둘째 아이의 중3 기말고사가 다 끝나서 거의 모든 시간에 자습이라는 이름 아래 아이들끼리 떠들거나 누군가 다운 받아온 영화를 틀어 놓고 보는 때였다. 집을 나서던 아이는 한 번 읽어보라는 내 권유에 아무 말 없이 책을 받아들었다. 청소년 소설이라서 진작에 주문을 해두었던 책이었다.

집에 돌아온 아이는 앞뒤 설명 없이 성화를 부렸다.


"엄마, 얼른 읽어봐. 너무 잘 썼어. 슬퍼. 눈물나서 혼났어!"

다음 날 아침 식구들 다 내보내고 혼자 아침 커피를 마시며 읽기 시작한 책의 마지막 장을 오후 1시에 덮었는데, 세수도 안 한 얼굴은 이미 눈물을 여러 차례 닦아내 눈이 퉁퉁 부었고 코는 새빨갰다. "아, 내가 올해 읽은 최고의 소설이다!"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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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우아한 거짓말>의 표지 ⓒ 창비

책을 겨우 석 장 넘겼을 뿐인데 중학교 1학년 여학생 '천지'가 죽었다. 천지의 죽음을 한 가운데 놓고 엄마와 언니 '만지', 천지의 친구들과 언니 만지의 친구, 학교 선생님, 도서관에서 만나곤 하던 아저씨 등등의 이야기가 정교하게 얽혀든다.

천지는 각기 다른 사람들에게 털실 다섯 뭉치를 남겼다. 털실 안에는 각각의 사람에게 보내는 쪽지가 들어있다. 친구 사이의 말과 행동에서 진짜와 가짜, 진실과 거짓, 진실과 사실은 어떻게 서로 섞여 아이들의 관계를 한 올씩 짜나갔던 것일까.

하나씩 밝혀지는 진실, 누구도 알지 못하고 짐작하지 못했던 가슴 아프고도 막막한 삶의 이면을 보면서 천지가 홀로 겪었을 아픔과 슬픔과 어려움이 너무 커 과연 우리 인간이 참된 관계를 맺을 능력이 있는 존재인가 묻게 한다.

충격과 슬픔 속에서도 씩씩해 보이는 엄마와 언니는 그 강함으로 나를 울리면서, 섣부른 위로의 얄팍함을 깨우치게 해주었다. 그러면서도 두 모녀의 토닥거림에 자연스레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래, 슬프다고 스물 네 시간 내내 우는 건 아니니까.


'착한 아이는 곧 멍청한 아이'라고 생각해 교묘하게 따돌리고 괴롭히는 아이들, 방관자로 남아 끝까지 팔짱 끼고 구경하면서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어떤 잘못도 없다고 믿는 아이들, 그 아이들은 흔히 말하는 문제아나 날라리들이 아니었다. 내가 동네 어디서든 마주치곤 하는 평범한 아이들이었다.

도대체 남의 아픔이나 상처를 볼 줄도 모르고, 미루어 짐작할 줄도 모르는 이 아이들은 어디서 왔을까. 도무지 알 수 없는 이 아이들의 머릿속과 가슴 속을 채우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천지는 중학교 1학년, 언니 만지는 중학교 3학년으로 같은 학교에 다닌다. 두 살 터울인 두 딸이 고스란히 이입되어서였을까. 끝내 세상을 버려야 했던 천지와 뒤에 남아 혼란스러워 하며 천지의 발자취를 더듬어 가는 언니 만지가 이미 내게는 남이 아니었다.

그렇게 떠나간 딸, 미안하고 불쌍하고 원통해서 가슴에도 묻을 수 없는 엄마는 그래도 남은 딸 생각을 하며 일상을 이어간다. 이 엄마 역시 어떻게 내게 남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감정이입만을 이유로 이 책을 '2009년 유경이 뽑은 좋은 책'으로  정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이 가진 힘과 끌어당김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첫째, 천지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두고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 퍼즐 맞추기의 긴장감 속에서 추리소설처럼 진행된다. 지루할 새 없는 이야기의 전개는 앉은 자리에서 책을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을 가졌다.

둘째, 생생한 현실감이다. 소설 속 대화에서 아이들이 사용하는 은어에 지나치게 집착해 은어의 빈번한 사용이나 나열을 마치 청소년 소설의 상징인 양 쓰는 작가들과 달리 이 책은 은어가 아니라 대화 자체가 마치 아이들이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실적이다.

이것은 50대인 나만의 생각은 아니어서, 동생에 이어 이 소설을 읽은 고2 큰 아이는 이렇게 소감을 말했다.

"다른 청소년 소설에서 아이들이 대화하는 부분 읽으면 '오글거리는데', 이 책에서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건 그냥 소리 내서 읽으면 그대로 우리 이야기일 거 같아. 자연스럽고 정말 사실적이야!"

셋째, 어른들의 모습이 완벽하거나 저 높은 곳에 서있지 않다. 때론 보잘 것 없고, 생활에 치이고, 함부로 성질 내기도 하고, 나쁘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없을 만큼 폭력과 무책임에 뻔뻔함까지 지녔고, 어른스러운가 하면 한없이 허약하기도 하고, 아무튼 어른도 그냥 그렇고 그런 부족함이 있는 인간임을 보여준다.

넷째, 두루뭉술한 화해와 상투적인 교훈을 늘어놓지 않는다. 물론 마지막에 언니 만지는 천지의 친구 '화연'에게 손을 내민다. 그러나 그건 이도 저도 다 잊고 그냥 용서하고 사이좋게 살아보자는 게 아니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라며 서둘러 용서하는 게 아니다. 대충 얼버무리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다섯 째, 삶의 소중함과 끝까지 살아내야 함을 섣불리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죽음으로 시작해 계속 그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이야기의 끝은 물론 삶이고 생명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을 향해 어른의 말로 타이르고 당위를 소리 높여 외치지 않는다. 저절로 그 끝에 이르도록 도와준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솔직히 생명 존중을 강조하고 제대로 잘 죽는 일에 대해 설파한 내로라하는 전문가의 두껍고 비싼 책 몇 권보다 이 한 권이 삶과 죽음, 생명, 자살 예방 등에 대해 훨씬 쉽고도 구체적인 이해와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나 역시 '죽음준비교육 전문강사'에다가 '죽음준비'에 대한 책을 쓴 사람이기에 이 고백을 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을 구석에 몰아 넣고 겉으로는 우아하고 다정하게 웃지만, 뒤돌아서서 비웃고 고소한 웃음을 날리는 인간의 어두운 속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해주는 책. 아무 생각 없이 친구를 따돌리고 곤경에 몰아넣는 '왕따의 세상'이 결국 어디로 향하는지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주는 책. 비록 나와 다르다 해도 '왕따 시키지 않으면 세상에 왕따는 없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보게 해주는 책.

책 뒤표지에 큰 글씨로 적힌 문장이 눈을 찌른다. 나도 사실 아이들과 별로 다르지 않기에 '아니오!'라고 대답하지 못한다.

"오늘, 당신도 누군가에게 '우아한 거짓말'을 건네지는 않았습니까?"

덧붙이는 글 | <우아한 거짓말> (김려령 지음 / 창비, 2009)


덧붙이는 글 <우아한 거짓말> (김려령 지음 / 창비, 2009)

우아한 거짓말

김려령 지음,
창비, 2009


#우아한 거짓말 #김려령 #죽음 #자살 #청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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