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현 신부는 왜 유족들과 엉켜 울었나

내 가슴 속의 용산...이 코미디 받아들이라고?

등록 2009.12.31 13:19수정 2009.12.31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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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동안 사망한 남편의 영정사진을 껴안고 있는 용산참사 유가족들이 오열하고 있다. ⓒ 권우성


이 글을 내가 쓸 수 있을까? 내일(31일)은 다시 영하 13도로 한파가 몰려온다고 한다. 오후 3시. 한 통의 문자가 들어왔다. 문자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솟았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이 시절에 대한 분노와 비애가 물밀어 왔다.

"용산 타결…… 유족과 엉켜 울다. 속은 부글부글. 재개발은 유유히"

우리 모두의 신부님이자 이 얼어붙은 시대에 몇 남지 않은 어른이신 문정현 신부님께서 보낸 짧은 문자였다. 신부님은 단 한번도 어린 우리들에게 투쟁의 방향 등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는 다만 용산범대위와 유가족, 철거민들의 결정에 따르시겠다고 했다. 그리곤 그는 거리에 선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다만 몸으로 보여주셨을 따름이다.

낮다는 것이, 침묵하며 몸으로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높은 것인가를 더 이상 낮아질 곳 없는 비천한 삶의 바닥에 용역깡패들에 의해 내동댕이치며 가르쳐주셨다. 가장 먼저 싸우고 가장 늦게까지 싸우셨다. 그러면서 꿈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용기를 잃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절규하는 것으로 가르쳐주셨다. 후배 신부님들과 함께 하고는 뒷전으로 조용히 물러 서 있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오늘처럼 기쁜 날, 노신부는 왜 눈물을 흘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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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철거민참사가 발생한지 337일째를 맞이한 지난 12월 22일 저녁 서울 한강로 남일당 빌딩앞에서 열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생명평화미사에서 문정현 신부가 손모아 기도를 하고 있다. ⓒ 권우성


그 노 신부님께서 지난 5월 18일 아무도 없는 어느 등나무 그늘 아래에서 꺼억꺼억거리며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날은 문규현 신부님과 전종훈 신부님, 그리고 수경 스님께서 이끄는 오체투지 전국 행진단이 용산 현장을 거쳐 가기로 한 날이었다. 그 날을 만들기 위해 문정현 신부님과 이강서 신부님이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였는지를 아는지라 눈물을 그칠 때까지 단 한마디 말도 함부로 드릴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한 그날 신부님은 싸움의 대상인 저들보다 싸움의 주체인 우리 내부의 궁핍함과 진정성 결여, 불철저함에 절망하셨다. 하지만 부족한 우리 모두를 너무도 사랑하셨기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혼자 그렇게 꺼이꺼이하며 삼키고 계신 것이었다. 그 앞에서 난 처음으로 어른이라는 것이 어떤 생의 고독이며, 감내일까를 느꼈다.


그런 아픔 끝에 6월 9일 오체투지를 마친 문규현 신부님과 전종훈 신부님 등이 다시 오체투지의 마음으로 죽어가는 용산을 껴안아주셨다. 그렇게 한 명 두 명, 한 분 두 분이 결합해 가며 집중된 고립과 탄압의 위협 속에서 시들어가던 용산 현장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우린 다시 기운을 차려 음산한 죽음의 땅인 용산을 새로운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희망의 공간으로 탈바꿈 시켜 갔다.

그 신부님께서 다시 '오늘처럼 기쁜 날(?)' 유족들과 엉켜 우셨다고 한다. 이렇게 가난한 우리들끼리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 것을, 시대의 감옥인 저 순천향병원 냉동고에 갇혀 있는 주검들도 알고 있을까. 그들의 얼어붙은 가슴도 조금은 녹여지는 것일까. 그들의 몸에 아직도 남아 있을 뜨거운 화기는 조금은 가셔지는 것일까. 이제 냉동고 문이 열리면 그들도 한을 풀고 저 하늘로 평화롭게 돌아갈 수 있을까. 이 땅에 처음 와 세상 만물 모든 게 신기하고 새롭던 어린아이와 같은 평화로운 마음이 되어 저 먼 우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생은 누구에게나 진실된 것이어서 힘겹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아름답던 이 세상을 하루 아침에 버려야 했던, 무슨 구이처럼 태워져 죽어가야 했던 그 원한을 잊을 수 있을까.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오세훈 시장이 종교지도자라는 분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마치며 환히 웃고 있는 사진이 뜬다. 해결의 숨은 주역은 정운찬 총리였다는 기사가 뜬다. 송영길 민주당 의원이 네 번씩이나 원세훈 국정원장을 만나 용산 문제 해결을 논의하며 힘을 썼다는 협상 전모 소개 기사가 뜬다.

당신이라면 이 코미디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는가

미안하게도 난 3류지만 거짓말을 잘 못하는 시인이어서 쓴 웃음을 지었다는 얘기를 쓰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무엇이 해결되었다는 거냐고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 곳은 이제 우리처럼 평범한 이들도 행복한 곳일 수 있느냐고 쓰지 않을 수 없다. 이 시대의 비참과 불의와 배제와 소외는 이제 다하고 진정 평화로운 사회로 우리는 가면 되는 것이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학살과 탄압의 주역들이 온정의 베품자들로 가공되는 이 코미디를 용인할 수 있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하루 전날인 29일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형 확정 넉달 만에 전례가 없는 1인 특별사면을 받는다는 발표가 있었다. 삼성은 서울 전역 재개발/재건축/뉴타운 사업 시공의 30%를 점유하고 있는 대표 기업이며 용산4가 재개발의 대표시공사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용산 참사의 진정한 배후 격이다. 용산 참사 초기부터 우리는 투기개발을 선도하는 삼성 자본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했으나 정부의 계속되는 탄압에 맞서느라 늘 역부족이었다. 전례가 없는 특별사면에 대한 사회적 공분은 용산참사 협상 타결 소식에 묻혀 제대로 조직될 수 없었다. 이것은 다만 우연일까? '법대로'의 원칙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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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성호


정운찬 총리가 나서 유감을 표명했지만 용산 참사의 또 다른 희생자들이자 생존자들로 사회적 위로의 대상이어야 할 철거민 구속자들에게는 어떤 온정도 베풀어지지 않았다. 10여개월 동안 사회적 연대를 실천했다는 까닭만으로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을 해야 했던 용산 수배자들에 대한 어떤 전향적 조치도 약속되지 않았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희생자들을 위한 특별법, 재개발-뉴타운법의 전면적인 개정 등 사과에 따라 이루어져야 할 본질적인 문제들은 무엇 하나 풀리지 않았다. 광주 학살 이후 최대의 국가공권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었지만 배상 역시 국가 배상이 아닌 재개발조합과 시공사들, 그리고 기독교계의 양보와 온정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곤, 문정현 신부님의 뼈아픈 문자 내용처럼 결국 토건자본들은 숙원이었던 용산 4구역의 평범한 세입자들을 몰아내고 4조원의 건설이익이 떨어지는 뉴타운-재개발 사업을 휘파람 불면서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서울 전역 500여군데에서 다시 쇠뭉치를 단 포클레인에 힘찬 시동이 걸리며 가난한 자들의 집들이, 상가들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용역깡패들이 다시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 이 집 저 집을 기웃거리며 부녀자를 희롱할 것이며, 경찰의 보호 속에 너무나도 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할 것이다. 죽지라도 않으면 이제 최소한의 보상이나 임시 상가-임대상가 요구조차도 언감생심이라며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접고 쫓겨나는 사람들이 늘어 날 수도 있다.

그렇게 사람들이 밀려난 곳에 마천루가 서고, 주변 땅값과 가게세가 올라가면 영문도 모른 채 사람들은 다시 자신의 노동의 대가를 지극히 합법적으로 털어내야 할 것이다. 자신이 더 많은 시간을 근면성실하지 못해 늘 생존에 허덕이는 걸 거라며, 사랑을 포기하고, 우정을 포기하고, 나눔의 시간을 포기하고, 연대의 시간을 포기하고 노동하는 기계로만 자신을 단련시켜 나갈 것이다. 그런 눈먼 시간들 속에서 제2의, 제3의 용산참사가 다시 준비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용산 코뮌을 일구다

ⓒ 권박효원


물론 오늘의 합의는 그나마 살아 있는 우리 시대 민주주의와 양심들의 소중한 승리다. 참사 2개월이 지나며 추도식에 나오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시나브로 줄어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 아직도 용산 문제 해결이 안되었나요'하는 반응이었다. 많은 사회운동들도 학살의 책임자 중 하나였던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의 경찰청장 임명을 철회시킨 이상으로 운동을 밀고 나가긴 힘들지 않겠냐며 적당한 정리가 필요하다고 직간접적으로 말하곤 했다. 그리곤 딱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곤 했다.

그런 엄혹함 속에서 진실규명의 뜻을 접지 않고, 최소한의 정부 사과라도 있기 전까지는 물러설 수 없다고 무려 11개월을 싸우며 버텨온 그 시간만큼, 우리는 이겼다. 정부는 끊임없이 학살의 흔적을 지우려 했지만 우리 모두는 너나할 것 없는 연대의 힘으로 더 또렷이 학살의 기억들을 전 사회인들의 가슴에 새겨나갔다.

더불어 음산한 죽음의 공간을 새로운 연대와 희망이 싹트는 작은 '코뮌'으로 변화시켜 나갔다. 아직 오지 않은, 하지만 우리가 살고 싶어 하는 공동체의 문화가 무엇인지를 확인해 갔다. 어느 틈에 용산4가 참사 현장 작은 골목은 우애과 나눔과 서로에 대한 환대가 넘치는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아름다운 민중-시민들의 해방구로 나아가고 있었다.

용산이 실현한 진정한 전투성은 바로 이런 무수한 인간다움을 향한 반성과 회복에 있었다. 정부가 초기 강경한 탄압과 공안정국 조성을 통해서 용산 범대위와 유가족, 전철연, 그리고 소수의 시민들 모두를 제압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파상적인 공격을 퍼붓다가 이내 저강도 탄압을 통한 고사책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것도 돌아보면 모두 이 힘 때문이었다. 결국 정부는 '사인간의 분쟁이므로 정부가 나설 까닭이 없다'는 기고만장한 태도를 바꾸고 벼랑 끝에 몰려 오늘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충분치 않은 승리지만, 그것이 진실이다.

생각하면 참 아름다웠고 눈물겨웠던 1년. 참사 첫날, 오늘은 정당한 분노가 필요한 날이라고 광화문 촛불항쟁 이후 처음으로 경찰 병력을 뚫고 늦은 밤거리를 달려 청와대를 향했던 기억.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부서지던 보도블럭들. 제2의 촛불항쟁에 대한 꿈은 접어들고, 100명도 채 안되는 평일 추모문화제를 막기 위해 3000여명의 전투경찰들이 알박기로 서 있던 청계광장. 평상복 속에 검은 상복과 영정을 숨기곤 청계광장 어느 귀퉁이에 숨었다가 7시 정각이 되면 "철거민을 살려내라"고 외치며 경찰들 속으로 뛰어들던 유가족들.

언제나 빼앗길 것을 대비해 2-3개의 비상 예비 엠프를 준비해두고 전투처럼 치러야 했던 주말 추모문화제들. 미행과 감시의 위협으로 수없이 뒤를 돌아보며 걸어야 했던 밤길들. 밤마다 누구랄 것 없이 모두가 주체가 되어 비밀스런 문자를 주고받으며 2차, 3차 가두시위에 나서던 사람들. 3월 7일의 충돌과 연행, 5월 6일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이루어지는 하이서울 페스티벌 개막식을 멈추게 했던 밤의 기억, 수십만의 조문객들이 끝없이 줄을 잇는 대한문 앞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 앞에서 한없이 쓸쓸하던 기억. 용산철거민 열사들도 장례 지낼 수 있게 해달라고 버티다 끌려나오던 서울시청 광장. 때론 영정그림이거나, 때론 비를 피하는 비닐 하나를 치기 위해 모두가 연행을 각오하며 싸워야 하기도 했다. 농성 텐트를 빼앗기곤 모두를 연행하라며 새벽 2시까지 도로에 주저앉아 싸우던 때도 있었다.

날마다 수십 명씩의 가난한 철거민들이 계단에 널부러져 자며 지켜주던 순천향병원 4층 분향소. 잔혹한 시대 앞에서 아파하던 동료들. 그런 사이 사이에도 하나 둘씩 늘어가던 꽃 화분들과 예쁜 분향초들. 교통사고 후 황폐해진 마음을 안고 누웠던 병원과 쫓기듯 내려간 충북 영동 산간에서 급기야는 관을 메고 시청 광장으로 나가겠다며 여전히 끌려가고 싸우는 용산을 보며 끓어오르는 분노와 더불어 돌아보는 기억마다 부끄러워 참회로 울던 기억들. 그런 나들이 모여 조금씩의 힘을 안간힘으로 모아가던 기억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렇게 1년을 꼬박 보내고 1월 9일. 비로소 순천향병원 냉동고가 열리고 어떤 죽음이었는지도 채 밝혀지지 않은 의문의 주검들을 그나마 저 하늘로 보내드릴 수 있게 되었다. 유가족들과 철거민들의 한도 조금은 덜어지겠지.

하지만 우리는 잊을 수 있을까. 아직 끝나지 않은 용산을. 아직 들춰지지 않은 3000쪽을, 여전히 반복되는 용산을. 명백한 국가공권력 학살이 이렇게 예쁘게 포장되어 묻혀져 가는 것을.

우리는 잊을 수 있을까. 나처럼 쓸데없이 드러났던 이들 빼고, 용산 투쟁 전 과정에서 이름도 명예도 없이 헌신했던 촛불시민들을. 분향소를 지키던 삼돌이를, 고구마 수레를 끌던 아저씨를, 아직 쿵쾅거리는 가슴을 잃지 않아 난데없이 도로를 점거하고 달려오다 마흔여 명이 끌려가던 학생들을, <끝나지 않은 미술전>을 하던 가난한 화가들을, <끝나지 않은 연극제>를 하던 연극인들을, 릴레이 시위에 나선 문학인들을, 가수들을, 촛불미디어센터와 언론재개발 운동을 펼치던 미디어 활동가들을, 어떤 대가도 없이 꼬박 1년동안 24시간 현장을 지켜냈던 용산범대위 상황실 동지들을. 그러면서 새로운 사회를 그려가는 진정한 변혁적 사회운동 조직들을.

우리는 잊을 수 있을까. 무엇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이 참혹한 시대의 냉동고를 열기 위해 이 연대의 그물망을 풀지 않고 더 많은 이들과 함께 다시 어디론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잃을 것은 과거의 굴레요. 얻을 것은 무한한 사적이윤 추구를 위해 사람을 사고 팔고 내쫒는 짐승들의 세계가 아니라 새롭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것을. 우리는 잊을 수 있을까. 오늘의 이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좀더 깊게 연대하고 강건해져야 한다는 것을.

무엇을 찾으려던 거지? 난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겠어

눈을 감으면 나는 저 먼 과거에도 살았고, 저 먼 미래에도 살고 있다. 오늘 그 과거 중 한 장면이 떠오른다. 1937년 스페인 내전이 한창이던 마드리드 시내다. 아직은 젊은 시인 네루다가 거기 서 있다. '꽃들의 집'이었다. 내전이 터지고 왕당파에 저항한 공화파들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쫓겨나야 했던 네루다가 200여명의 작가들과 함께 다시 마드리드를 찾은 길이었다.

'꽃들의 집'은 그와 그의 친구들이 새로운 사회에 대한 꿈을 꾸던 곳이었다. 창은 모두 깨져 있었고, 벽에는 총탄자국들이 나 있었다. 책장은 무너져 있었지만 쓰다만 원고 뭉치들은 그대로였다. 여기저기를 들춰보는 네루다. 하지만 네루다는 그가 찾으려는 게 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시민군 복장을 한 그의 친구 미겔 에르난데스가 네루다의 원고 뭉치들을 주섬주섬 주워 주려 하자 네루다가 만류했다. 왠지 모르지만 그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느껴졌다.

"미겔, 난 아무것도 안 가져가겠어."
"아무것도 안 가져가겠다고? 책도 말이야?"
"그래. 필요 없어."

네루다는 깨진 창 너머로 보이는 건물들을 뚫어지게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토록 생기발랄하고 왁자지껄하던 스페인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연극이 끝난 후처럼.

"전쟁은 꿈처럼 묘한 건가봐. 미겔."

2009년 겨울 대한민국. 나는 다시 혼자 중얼거려본다.

"투쟁은 꿈처럼 묘한 건가봐. 우리는 무엇을 찾으려던 것이었지? 난 아무것도 안 가져가겠어."

하지만 우리 모두는 잊을 수 있을까. 가슴 속의 용산을. 그 꽃들의 집을. 가슴 속이 텅비어버리는 것 같은 오늘의 협상 타결 소식을. 저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의 위정자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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