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신각 가지 말고 용산으로 오세요"

[현장] 용산참사 희생자 추모등 600개 불 밝혀... 촛불예배와 문화제

등록 2009.12.31 16:46수정 2009.12.31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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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신 : 31일 저녁 8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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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마지막 예배가 열린 용산 '남일당 길거리 예배당'. 한 시민이 희생자들의 영정 앞에 촛불을 켜고 있다. ⓒ 허진무

2009년 마지막 예배가 열린 용산 '남일당 길거리 예배당'. 한 시민이 희생자들의 영정 앞에 촛불을 켜고 있다. ⓒ 허진무

2009년이 저무는 12월 31일 저녁, 용산 참사 현장은 한해를 떠나보내는 촛불과 등불이 켜졌다.

 

이윤엽씨 등 설치미술가들은 이날 현장에 600개의 등과 갖가지 조명으로 남일당과 레아호프에 불을 밝혔다. 600개의 등불은 참사의 희생자였던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다. 고인 한 명에 100개의 등불을 바친 것이다.

 

이날 현장에서는 저녁 7시 30분 송구영신 촛불예배와 9시 문화제가 이어진다. 문화제의 이름은 '용산! 2009년 12월 32일'. 협상이 타결되고 2009년도 끝나지만, 용산참사 해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이다.

 

현재 날씨는 영하 10℃. 남일당은 4차선 한강로에 위치하고 있어서 바람이 더 세다. 남일당 골목 여기저기 온풍기가 설치됐고, 한켠에서는 '용산참사 군고구마'가 노릇노릇 익고 있다. 이 군고구마는 3개 2000원인데, 전액 용산참사 유가족들을 위한 성금으로 들어간다.

 

강추위에도 용산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예배에 참석한 100여 명의 시민들은 추워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참여 이유는 다양하다. "해가 바뀌기 전에 와봐야 할 것 같아서", "용산이 늘 맘에 걸렸는데 그 빚을 갚으려고", "합의됐다고 해서 현장이 사라지기 전에 한 번 더 오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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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오후 6시 용산 남일당 현장에서 '용산참사의 진정한 해결을 촉구하는 1인시위 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 손일수

31일 오후 6시 용산 남일당 현장에서 '용산참사의 진정한 해결을 촉구하는 1인시위 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 손일수

이날 예배에 앞서 오후 6시 남일당 앞에서는 '1인시위 음악회'가 벌어졌다. 범대위 활동가들은 캐럴과 가요를 개사한 노래를 부르면서, 시민들에게 "오늘은 보신각으로 가지 말고 용산으로 오세요"라고 참여를 호소했다.

 

오후 7시 30분 '남일당 길거리 예배당'에서는 2009년 마지막 예배가 열렸다. 노래 '바위처럼'으로 시작한 이날 예배의 제목은 '우리의 싸움'이다. 이날 예배인도자인 김경호 들꽃향린교회 목사는 '고백의 기도'를 통해 "오늘도 이렇게 기도드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철거에 대한 소식 때문"이라며 "추운 거리로 내몰리는 철거민들의 호소가 우리의 신앙을 일깨우고 있다"고 호소했다.

 

방인성 함께여는교회 목사는 "2009년을 이틀 남기고 반쪽짜리 해결을 맞이했다"며 "이명박 대통령이 정직하게 사과할 수 있도록 그의 마음을 움직여 달라"고 기도했다.

 

유족 대표로 기도에 나선 고 이상림씨 부인 전재숙씨는 "고대하고 고대하던 장례식을 치를 수 있게 됐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무겁고, 힘들고, 착잡한지 모르겠다"며 "저희들이 갈 길은 앞으로도 멀고 먼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남일당 길거리 예배당 기도의 제목은 늘 변함없이 3천 쪽의 수사기록 공개"라며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여러분이 함께 해달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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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마지막날 용산 참사 현장인 남일당 주변에는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600개의 등에 불이 밝혀졌다. ⓒ 권지은

2009년 마지막날 용산 참사 현장인 남일당 주변에는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600개의 등에 불이 밝혀졌다. ⓒ 권지은

2009년 마지막날인 31일 용산참사 현장은 올해 마지막 추모 예배 준비로 분주했다. 레아 갤러리 밖에는 한지로 감싼 등 600개가 어둠을 밝힐 준비를 하고 있다. 레아 갤러리는 참사로 희생된 고 이상림씨가 운영하던 호프집 자리에 만들어졌다. 지금은 범대위 상황실이자 현장 미술가들의 활동 공간으로 사용된다.

 

'600개의 등'은 용산참사 희생자 6명을 의미한다. 등을 매달고 있던 이윤엽(43·판화가)씨는 "600개의 불을 밝히는 것은, 한 해를 함께 보내고 새해에도 (용산참사를) 잊지 않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전했다.

 

'600개의 등'을 총괄 기획한 신유아(39·문화기획자)씨는 "사람들은 철거 현장이라고 하면 허름하고, 지저분하고, 쓸쓸한 천막만이 존재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며 "하지만 '레아 갤러리'는 이 골목의 분위기를 발랄하고 즐겁게 바꾸었다. 그래서 시민들이 더 부드러운 시선으로 용산참사를 바라볼 수 있게 만든 매개의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다음은 신유아씨와의 일문일답 요지이다.

 

- '레아 갤러리'에 어떻게 해서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모이게 되었나?

"올해 3월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문화예술인들이 이곳에서 작품을 전시하면서 유가족과 연대하고, 시민들과 소통해왔다. 우리가 하나의 조직인 것은 아니다. 수백명 정도의 예술인들이 자발적으로 갤러리에 작품을 걸고, 전시회도 하면서 현장을 지켜왔다. 하지만 협상 전까지는 경찰들이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하게 강하게 막아서 자유롭게 그림을 내다 걸거나 할 수는 없었다."

 

- 협상이 타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심정이었나?

"기분이 안 좋았다. 진상규명이 전혀 안됐지 않나. 그런데 1년 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으니까 유가족들이 많이 힘들어했다. 그래서 이번 협상은 일단 장례를 치르자는 의미에서 이루어진 거라 보면 된다. 진작에 이루어졌어야 할 일이 이제 겨우 진행된 거니까 '기쁘다'는 표현을 쓸 수는 없다. 협상을 정운찬 총리와 서울시가 나서서 했지만 우리가 요구했던 건 이명박 대통령의 사과였다. 언론에서 '타협'을 했다고 말하는데 듣기 좋지 않다. 우리 입장에서는 '타협'이 아니라, 최소한의 단계를 거친 것이다. 승리라고도 할 수 없다. 진짜 시작은 이제부터라고 생각한다."

 

- 그러면 오늘 12시에 열리는 점등식은 어떠한 의미가 있나?

"협상이 이루어져서 점등식을 하는 것은 아니다. 원래부터 올해 마지막 날에 600개의 점등으로 고인, 유가족과 함께 하겠다는 의미로 점등식을 할 계획이었다. 정부가 1년 동안 계속 우리의 요구를 무시해왔다. 그래서 우리는 도저히 온전한 2010년을 맞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2010년 1월 1일이 아니라, 2009년의 12월 32일로 한 해를 정리하고자 했었다."

 

- 시민들은 현장을 많이 찾아주었나?

"생각보다 많은 시민들이 관심을 가져주었다. 언론에서는 '잊혀진 용산'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꼭 우리가 우리만의 싸움을 하는 것처럼 이야기 하곤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시민들이 찾아오기도 했고, 그렇지 못한 시민들은 마음속으로나마 용산에 대한 부채감을 가지고 있다고 느껴졌다. 시민들에게 전화도 많이 받았다. 그동안 정부만 사람들의 눈을 가리려고 억지를 부렸지, 사람들은 사실 다 느끼고 알고 있다."

 

- 현장에 있는 문화예술인들에게 이곳 용산참사 현장은 어떤 의미가 있나?

"대추리나 다른 사회적 문제가 있는 곳에도 문화예술인들이 종종 연대해왔지만, 그때와 지금은 그 수만 보아도 차이가 크다. 대추리 때는 10명 정도의 문화예술인들이 참여했었지만, 용산은 셀 수 없이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참여한다. 새로운 연대문화가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철거 현장이라고 하면 허름하고, 지저분하고, 쓸쓸한 천막만이 존재하는 곳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레아 갤러리'는 이 골목의 분위기를 발랄하고 즐겁게 바꾸었다. 그래서 시민들이 더 부드러운 시선으로 용산참사를 바라볼 수 있게 만든 매개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 예술과 사회참여의 관계는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하는 것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사람들과 함께할 때만 비로소 예술이 된다. 사람들과 함께하고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 없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 '기술'이다. 서울시 프로젝트 '디자인 서울'에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참여하고 있지만, 시민의 생활과 동떨어진 예술은 별로 가치가 없는 듯하다. 예술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안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앞으로 용산참사와 관련한 계획은 어떻게 되나?

"어제 정부와의 협상이 이루어졌다. 협상이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우리의 거처와 관련해서는 정확히 계획된 바는 없다. 내년 1월 25일이면 이곳은 완전히 철거된다. 협상 이후의 문제, 진실 규명, 구속자 문제 해결을 위해서 계속 유가족·범대위와 연대할 것이다." / 손일수·권지은 인턴기자

 

 

[1신 : 31일 오후 6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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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이 31일 '남일당 길거리 예배당'에서 열린 2009년 마지막 예배에 참석, 기도를 하고 있다. ⓒ 허진무

용산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이 31일 '남일당 길거리 예배당'에서 열린 2009년 마지막 예배에 참석, 기도를 하고 있다. ⓒ 허진무

협상 타결 다음날인 31일 오전, 용산참사 희생자의 분향소가 차려진 남일당은 조용했다. 전날까지 현장 부근을 지키던 경찰들도 모습을 감췄다. 전날 현장을 가득 메웠던 취재진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오후 들어 레아 촛불미디어센터에 젊은 활동가들이 하나둘씩 모여들면서 현장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1층에서는 이날 오후 6시에 있을 '1인시위 음악회'를 준비하는 노래연습이, 2층에서는 인터넷 대안방송 '언론재개발'의 라디오 드라마 리허설이 한창이다.

 

한구석에서는 장례 일정에 대한 실무 논의가 진행 중이다. 일단 장지는 마석 모란공원으로 결정했고, 장례는 매장으로 할 방침이다. 불타 죽은 고인들의 몸을 다시 태우는 게 마음에 걸려서 화장은 않기로 했다.

 

합의가 끝났지만, 유가족들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고 윤용헌씨 부인 유영숙씨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고 이상림씨 부인 전재숙씨는 새벽 2시에 잠이 들었지만 2시간 뒤에 다시 깼다. 막상 장례가 현실로 다가오자 다시 남편의 죽음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취임 전에 일어난 용산참사를 왜 정 총리가 책임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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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 서울시장이 30일 낮 12시쯤 서울시청 서소문별관에서 용산참사 협상 타결을 발표하고 있다. ⓒ 김시연

오세훈 서울시장이 30일 낮 12시쯤 서울시청 서소문별관에서 용산참사 협상 타결을 발표하고 있다. ⓒ 김시연

고 양회성씨 부인 김영덕씨는 "시신을 확인하는데 우리 신랑은 형체도 못 알아봤다, 어금니에 금을 박은 걸 보고서야 신원을 확인했다"면서 "아직도 내 남편이 죽었다고 믿기 어렵다"고 말했다.

 

전날에도 가족들은 협상 타결 소식을 듣고 여러 차례 "어떻게 (고인들을) 보내냐"는 말을 반복하면서 통곡했다.

 

정운찬 총리의 입장글은 이들의 마음을 달래지 못했다. 유가족들은 끝까지 "정부 차원의 사과"가 들어가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수용되지 않았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용산참사를 조속히 매듭지으려 했던 서울시의 전략에 당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전재숙씨는 "하나도 만족할 수 없다, 용산참사는 정 총리 취임 전에 일어난 일인데 왜 자기가 책임을 지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영덕씨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협상 타결을 자신의 성과인 것처럼 자화자찬한다"면서 "웃기지 말아라, 제대로 된 협상은 손에 꼽을 정도인데, 우리를 갖고 노는거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의를 수용한 이유는? 김영덕씨는 "우리 때문에 고생하시는 분들이 너무 많은데 우리 욕심만 차릴 수 있냐, 이제 (고인들을) 보내드려야지"라고 말했다.

 

정작 용산 범국민대책위원회 쪽에서 가장 걱정한 것은 유가족들의 상황이었다. 협상 타결 전 범대위 쪽에서는 "협상이 결렬되면 참사 1주기에 자체로 장례를 치를 고민도 한다"면서 "장례 없이 버티는 게 투쟁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이대로는 유가족들이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장례를 치르고 나면 유가족들은 일단 뿔뿔히 흩어져 자신의 삶터로 돌아가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를 예정이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는 발길이 가벼울 수는 없다.

 

지난 11개월 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사소한 생활습관과 성격의 차이로 갈등도 있었지만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온 유가족이다. 앞으로는 뭘 하면서 살아야 하나, 남편도 없는 집에서 혼자 있으면 얼마나 마음이 허전할까 하는 걱정이 크다.

 

전재숙씨는 "우린 친동기간보다 더 가까운 사이다, 헤어질 수 없다"면서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함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레아 호프 건물에 살림집까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돌아갈 집도 없다. 앞으로의 거처는 장례 이후 정할 생각이지만 어쨌든 용산을 떠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다.

 

11개월 동안 한 살림... 어떻게 흩어지나

 

유가족들은 협상 타결 뒤의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우리가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랑과 축복을 받았다, 이제 그걸 갚으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철거지역은 물론 정권의 탄압이 있는 곳마다 몸을 사리지 않고 찾아간다는 결심이다.

 

가장 큰 보은은 이번 합의에서 쏙 빠진 용산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뉴타운·재개발정책 전환을 이뤄내는 일이다. 유가족들은 "처참한 시신을 생각하고 '도심 테러리스트'의 자식이 되어버린 아이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지칠 수가 없다"고 입을 모았다.

 

서울시는 지방선거 국면에 앞서 부랴부랴 협상을 타결했지만, 유가족들은 오는 지방선거에서도 활동을 이어갈 생각이다. 유영숙씨는 "선거 때도 뛰면서 재개발정책을 막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래도 이후 선거에서는 지난 2008년 총선처럼 후보마다 뉴타운 공약을 남발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는 내다봤다.

 

그때만 해도 '재개발' 하면 '집값 인상', '시세차익' 같은 말이 떠올랐지만 이제는 '용산참사'가 떠오른다. 후보들이 쉽게 재개발을 약속해 표를 얻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유씨는 "이제 사람들이 재개발정책의 문제점을 알고 있다, 이것도 용산 투쟁의 성과다"고 말했다.

#용산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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