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여당의 커밍아웃을 기대한다

[주장] 탐미주의 정권의 성공을 위한 조건

등록 2010.01.01 17:53수정 2010.01.01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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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운찬 국무총리가 31일 밤 국회 본회의에서 2010년 예산안이 처리되는 것을 지켜본 뒤 본회의장을 나서며 의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정운찬 국무총리가 31일 밤 국회 본회의에서 2010년 예산안이 처리되는 것을 지켜본 뒤 본회의장을 나서며 의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권우성
정운찬 국무총리가 31일 밤 국회 본회의에서 2010년 예산안이 처리되는 것을 지켜본 뒤 본회의장을 나서며 의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 권우성

지독했던 한 해가 끝나는 날 정운찬 총리의 '말씀'을 참 감명 깊게 들었다. 새해 예산을 처리해준 국회의원들에게 드리는 말씀 중에 한 대목이 내 가슴을 사정없이 찔렀다. 근자에 이처럼 훌륭하게 치명적인 수사를 접한 적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어보니 비슷한 경우는 더러 있었던 것 같지만 이번처럼 주변 상황과 '말씀'이 절묘하게 조응하는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서민들의 삶이 따뜻할 수 있도록…."

 

무슨 말이 더 필요할 것인가. 이 한 말씀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추위와 배고픔으로 벌벌 떠는 서민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서 정부는 불철주야 연구를 했고 그 성과를 내년부터 시행하고자 했다. 그런데 서민을 위한 그 예산안을 야당에서 반대한다. 보라. 지금도 야당 의원들은 신성한 국회를, 그것도 의장석 앞을 점거하고 소란을 피우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정의는 승리했다. 소인배들의 주장이 물 밑으로 가라앉는 것은 필연이다. 이제부터 정부는 총리 이하 모든 부처가 소신을 갖고 서민을 위한 정책을 착실히 수행해 나갈 것이다.

 

그리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 정운찬 총리는 참으로 깊은 인상을 '서민'들에 심어 주었다. 그 어떤 재기발랄한 연출가가 있어 이런 근사한 무대를 만들어낼 것인가. 그 어떤 기획자가 이렇게도 신속하게 상황을 장악하고 아예 뒤집어놓을 수 있을 것인가. '악마구리'처럼 떠들어대는 야당 의원들 속에서 차분하게 '소신껏' 감사 인사를 하고 있는 총리의 모습을 본 서민들 중 상당수가 아마 반신반의에서 찬성으로 혹은 반대에서 반신반의로 돌아섰을 것이다. 

 

이쯤 되면 총리는 이제 대통령의 가장 믿음직한 충복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어쩌면 그렇게도 단시일 내에 대통령의 어록을 숙지하고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지 그저 놀랍기만 하다. 의장석 앞에 진을 친 야당 의원들은 아주 절묘한 방식으로 이명박 정부의 주요 정책을 측면 지원해준 셈이 되었다.

 

모든 정책이 서민위주인데... 행복하지 않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의 주요 정책이 뭐였던가? 그래, 서민이다. 서민이 따뜻해지는 그날까지, 그 어떤 반대도 도전도 물리치고 꿋꿋하게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외로운 노인들을 찾아다니고, 누추한 재래시장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어묵이나 떡볶이 같은 것을 팔아주고, 아이들을 만나면 사랑해요, 사랑해요, 열심히 하트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다만 서민들 자신이 그것을 피부로 느끼지 못할 뿐이고,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이 나라의 서민들 참 못 됐다. 하나에서 열까지,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모두가 하나처럼 서민을 위한 것들인데도 정작 서민들은 그것을 알아주지 않고 환호성을 질러주지도 않는다. 강바닥을 파헤치는 것도 서민을 위한 것이고, 수도권에 집중된 인구를 분산시키지 않겠다는 것도 서민들의 생계문제 때문이고, 법인세 인하 같은 부자감세 정책 또한 서민들의 안정적인 취업환경을 조성하자는 고육지책일 뿐이다. 결코 부자를 더 큰 부자로 만들어주자는 정책이 아닌 것이다.

 

서민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명박 정부의 이런 주장은 아주 낯선 경험이다. 이것인가 하면 저것이고 저것인가 하면 어느새 이것이 되어 있는 꼴이다. 무엇인가 아주 깊은 철학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전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예전에는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왜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느냐고 꾸중을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서 달은 별 의미가 없다고, 달 같은 것은 보지도 말고 손가락만 봐야 한다고 야단을 맞는 형국이다.

 

어지럽다. 혼란스럽다. 이런 상황에서는 행복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느낄 틈이 없다. 거짓말도 예술적으로 하면 아름다운 법이다. 아니 예술 자체가 사실은 거짓말이다. 그 거짓말에서 행복을 느끼는 까닭은 거짓을 참이라 주장하는 어거지 생떼를 쓰지 않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거짓말로 알고 적절하게 속아주며 씽긋씽긋 웃어주는 센스를 발휘할 때 얻어지는 행복감은 그 얼마나 큰 것이었던가.

 

'가상' 서민만 존재하는 이명박 정부의 나라

 

 지난 2008년 2월3일, 서울 관악구 봉천11동 원당시장을 방문한 이명박 당선인이 시장에서 어묵을 먹으며 시장상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지난 2008년 2월3일, 서울 관악구 봉천11동 원당시장을 방문한 이명박 당선인이 시장에서 어묵을 먹으며 시장상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지난 2008년 2월3일, 서울 관악구 봉천11동 원당시장을 방문한 이명박 당선인이 시장에서 어묵을 먹으며 시장상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이명박 정부에서 서민은 이미 예전의 소박한 그런 서민이 아니다. 이 정부의 서민은 이 정부의 책상 서랍 속에서만, 머릿속에서만 존재한다. 얼핏 가상의 서민과 실재의 서민이 대립하는 형국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이 정부의 눈에는 이미 실재의 서민은 보이지도 않고 오직 가상의 서민들만이 우글우글 크게 확대되어 비치고 있을 뿐이다. 현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그런 이상한 서민들을 위한 정책을 입안하는 재미에 푹 빠진 이들의 눈에 실존하는 서민이 보일 까닭이 없는 것이다.

 

피가 흥건하게 흐르고, 뼈가 부러지고, 뜯겨진 살점이 도처에 뒹구는데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 하거나, 발견했다 해도 거기에서 측은지심이나 애린 같은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사실 탐미주의자들의 속성이다. 탐미주의자들은 현실 세계에서 자기만의 독특한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즐기는 한편 추종자들을 규합하는 재미를 부가적으로 누린다.

 

이명박 정부는 가상의 서민을 설정해놓고 정책을 입안하다는 점에서 탐미주의에 근접해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이것을 하면서도 한사코 저것이라고 우긴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탐미주의와도 거리가 있다. 그렇다고 무엇인가 획기적인 것을 기획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다만 '이것'을 하고 싶은데 안 된다는 목소리가 너무 높아서 '이것'은 결코 '이것'이 아니라 '저것'이라고 주장하는 궁색을 면치 못하고 있을 뿐이다.

 

가까운 나라 일본에서 이와 유사한 사상적 궁핍의 시대가 있었다. 패전 이후 격렬한 학생운동의 시기를 거치면서 일본 지배계층은 바람 앞에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거짓말을 연구하고 생산하는 일에 매달렸다. 입으로는 '이것'을 하겠다고 하면서 행동으로는 '저것'을 하고 있는, 말로는 열심히 평화헌법을 사랑한다고 해대지만 생각으로는 이미 입안에 가시처럼 여기고 있어서 언제 어떤 명분으로 다시금 대동아공영을 외치며 전쟁에 나설 것인가 하는 창백한 욕망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때 한 남자가 나서서 이렇게 외쳤다. 어정쩡하게 이것을 하면서도 저것을 한다는 식의 얄팍한 속임수에 기대지 말고 당당하게 나는 너를 먹고 싶다, 너를 능욕하고 싶다, 이렇게 말하라고, 이렇게 말해도 괜찮다는 것을 보장하는 헌법을 만들라고 외치며 제 손으로 제 배를 가르고 죽어간 미시마 유키오. 당대 최고의 소설가요 지식인으로 수많은 독자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던 그의 돌연한 할복자살은 그 시기 허약한 거짓말쟁이에 불과했던 일본 지배계층의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주었다.

 

당당하고 떳떳한, 솔직한 인물 나오길

 

어느 시기 어느 나라에서나 지배계급은 당당하고 떳떳해야 한다. 언행의 완전한 일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며 저것은 달이 아니다 손가락이 달이다, 라고 우기는 식의 졸렬한 거짓으로 웃음거리가 되기 시작하면 그 나라의 미래는 암울하다. 존경하고 싶어도 존경할 수 없는 어른을 모신다는 것은 그 얼마나 불행하고, 그 얼마나 삶이 허무해져 버리는가.

 

한나라당에서, 뉴라이트 그룹에서, 혹은 친박연대에서 나는 나다 하고 외치는, 우리는 바로 이것이다 하고 솔직하게 말하고 나서는, 그리하여 서민들로 하여금 그나마 철학과 소신이 뚜렷한 정부의 국민 노릇을 하고 있다는 최소한의 자긍심이나마 갖게 해줄 수 있는 그런 미시마 유키오 같은 걸출한 인물이 나오기를 새해에는 기대해본다.

2010.01.01 17:53ⓒ 2010 OhmyNews
#탐미주의 #가상의 서민 #거짓의 일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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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톡톡 6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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