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10.01.30 17:37수정 2010.01.30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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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심각하지 않았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내가 임신하고 6개월 정도 되었을 무렵, 난소 부근에 혹 같은 게 보인다는 아내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주위에서 심심찮게 회자되는 말이라 나는 간단한 물혹 정도 되겠지, 조금 심하면 근종 정도 되겠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물론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의사도 예사롭게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출산 일이 다가오면서, 초음파에 보이는 혹의 크기가 점점 커져가고 있다는 산부인과 의사의 말에 아내는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혹이 커지면 태아에 위험하다는 것은 차치하고, 그 혹의 모양이 심상치 않으니 수술을 해야 할 것 같노라는 다소 우유부단한 투의 의사의 말에 아내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당장 수술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출산하면서 혹을 제거하든지 양자택일이 아니라 긴기민가 확실한 언급을 하지 않는 의사의 애매모호함에 아내는 짜증까지 내었다. 물론 조기에 수술을 하면 태아가 위험할 수 있는 것은 당연했다.
나란 인간이 태생이 무심한 데가 있는지라 애타게 상황을 직시하지 않고 있던 터에, 아내는 동네 아는 아줌마의 주선으로 자기 딸이 과장으로 있다는, 일산의 어느 산부인과로 상도동에서 왕복해야 하는 발품을 감수하면서까지 과감히 병원을 옮겼다. 상도동에 있는 그 산부인과에서 둘째까지 낳았는데도 아내는 그 병원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내의 과단성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평상시의 아내 모습이 아니었다. 그만큼 예민해져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어째든, 동네 아줌마의 딸인 산부인과 과장은 아내에게 자상하게 대해 주었고, 무엇보다도 출산하면서 혹 제거 수술을 하여도 별 이상이 없노라고 진단해 주어 우리를 안심시켜 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게 순탄했다.
11월 말경이었다. 아내은 드디어 일산 모병원에 입원을 했다.
나는 초조했다. 그 물혹이라는 것이 제발 악성이 아니기를 바랬다. 아니 악성이라는 것 자체를 나는 애써 완강히 부정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간단한 물혹이야. 그래 그리고 일주일 후 가뿐히 퇴원하는 거야. 어제와 다를 게 없을 거야. 우리 앞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아내는 입원 다음 날 수술실로 들어갔다. 나는 아내의 손을 꼬옥 쥐어 주었다. 아내는 말없이 괜찮을 거야라고 눈빛을 주었다. 나는 무언가 한마디라도 말을 건네야 했지만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입은 결국 열리지 않았다. 단지 눈빛만이 마주쳤을 뿐이었다. 짧은 순간이었다.
아내를 수술실로 보낸 나는 병원 휴게실로 나와 줄창 담배를 피워댔다. 그리고 수술실 입구에 갔다가 수술 현황판을 보고 다시 휴게실로 나와 담배를 피워 물고하면서, 혹시 악성이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악성이라면 몇 기일까? 2기 3기... 그 후의 치료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심각하다면... 태어날 애가 아들인지 딸인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를 찾는 방송이 들렸다.
"한은희씨 보호자분은 수술실 앞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의사에게로 가면서 아내와 함께 지나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조직 검사를 해 봐야겠어요. 육안으로 보았을 땐 악성인 것 같습니다."
앳되게 보이는 노처녀 의사가 절개한 난소와 종양덩어리를 내게 보여주며 심각하게 말했다. 각오하라는 듯이 말이다. 나는 의사의 말을 계속 들었다.
"산모와 애는 좋아요. 자세한 얘기는 조금 있다 하겠습니다."
겨울이었다. 딸아이는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늦둥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우여곡절 끝에 자궁 속에서 암세포와 함께 자란, 그리고 엄마의 암세포를 조기에 발견하게 한 아이여서인지 나는 유독 막내를 귀여워 해주었다. 사실 둘째까지는 무신경한 기질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회사이라는 긴장된 공간의 중심에 있다 보니 집안 일에 신경을 쓰지 못했었다. 하지만 막내에게는 충실했다. 가능한 일찍 퇴근하여 목욕도 시켜주고, 귀저기도 갈아주고, 잘 때까지 업어주고 안아주고 했으니까 말이다. "이제 사람 다 됐네"라고 아내가 농을 걸기도 했다. 물론 아내가 처한 특수한 상황이 있기는 했다.
아내는 낙천적인 성격을 저버리지 않았다. 모든 게 잘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실감이 안 나는 이유도 있겠지만, 굳건히 현실을 받아주며 앞으로의 조처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주위에서 해주는 얘기도 있고, 여기저기 알아 본 암 치료의 그 고통스런 시간을 그녀는 숙연히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숙명처럼. 그런 아내가 나는 대견스러웠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방법은 그녀의 손을 꼬옥 잡아주는 것이었다.
항암치료를 위해 이름 꽤나 있다는, 퇴계로에 있는 모병원에 아내는 입원했다. 1월 초였다. 2인실을 쓰자는 아내의 의견을 물리치고 나는 독실을 택했다. 금전적으로 많은 부담이 되었지만 나는 꼭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항암 주사를 맞기 전에 며칠 동안 여러 가지 체크를 했다. 그리고 나는 병원에서 출퇴근했다. 아내는 내심 긴장을 했지만 불안한 표정을 내게 보이지 않았다. 나 또한 근심어린 언행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저 일상적인 대화만이 오고갔다.
항암 치료 전날인가, 퇴근 후 심심풀이 잡지책을 사러 책방에 갔다 오는 길이었다. 제과점 앞을 지나다가 거기에 진열되어 있는 케익을 본 순간 문득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란 사실이 떠올랐다. 1월 10일, 그래 그날은 결혼기념일이었다. 아내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전 같았으면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알어?"라고 예고를 했을 텐데...
겉으로야 담대하게 평상심을 잃지 않고 있었지만, 내면에선 긴장과 불안 등이 뒤엉키고 있었으리라. 어찌 그녀의 가슴속에 들어가 보겠는가.
나는 작은 케익을 하나 사들고 병실로 갔다. 케익을 몸 뒤로 숨긴 채 장난끼 있게 히죽거리며 나는 이렇게 말했다.
" 뭐 사왔는지 맞춰봐라?"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뭔데?"
라고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몸 뒤에 숨겼던 케익을 "이거이 뭐냐하면"이라고 이죽거리며 앞으로 넌즈시 내밀었다.
"어머! 이게 뭐야? 케익이잖아."
그녀는 오랜만에 환하게 웃었다.
"당신 솔직히 얘기해, 결혼 기념일인거 오늘 알았지."
"아냐 며칠 전부터 알고 있었어, 진짜야"
"아닌 거 같은데"
"아니라니깐..."
그녀와 나는 보호자 간이침대로 자리 옮겼다. 나는 케익에 아홉 개 촛불을 꼽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전등불을 껐다. 빨간 촛불이 조용히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그 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해맑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잘 될 거야"라고 속삭였다. 그녀는 "걱정마"라고 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후하고 촛불을 껐다.
그녀는 항암제를 잘 이겨냈다. 퇴원 후, 뼈를 녹인다는 그 지독한 항암제에 그녀는 잘 버텨주고 있었다. 물론 예전 같은 몸 상태는 아니었지만 여느 사람처럼 흐물흐물 기력이 쇠잔해져 있지는 않았다. 항암제를 이겨내지 못하여 몸과 마음이 쇠약해지고 그래서 항암치료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생머리카락이 빠질 정도이니 약이 얼마나 독한지 설명을 안 해도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퇴원 후 십 여일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2차 항암치료가 얼마 안 남겨놓은 어느 날이었다.
"머리카락이 안 빠지네?."
항암제 맞으면 머리카락이 빠진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그러면서 '우리 마누라'는 빠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나는 물었다.
"글쎄, 안 빠지는 사람도 있나봐. 다 빠지는 건 아니래"
그녀는 예의 낙관적인 투로 대답했다.
"넌 워낙 머리카락이 굵어서 빠지지 않을 거야."
라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다음 날, 퇴근하여 욕실에서 세수를 할 때 세면기에 긴 머리카락이 여러 개 보였을 때만 해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 다음 날은 그 머리카락 양이 더 많이 보였다. 나는 아내에게 약간 흥분한 상태로 세면기에 있는 머리카락이 당신 거냐고 물었다.
"응, 그래. 빡빡으로 밀어버릴까 봐. 어짜피 빠질 건데..."
나는 왠지 노한 기분에 사로 잡혔다. 그것은 무언가에 대한 노여움이었다. 그래 나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내심 알면서도 " 머리카락은 다시 날 수 있는 거야?"라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대답은 필요 없었다.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다음 날 아내는 그녀답게 행동에 옮겼다. 현관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설 때, 일곱 살 먹은 둘째 놈이 "엄마 빡빡 깍았다"라고 천연덕스럽게 고자질을 했고, 방에 들어서자 허옇게 변한 대머리가 나를 맞았다. 대머리는 "나 어때"라고 말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그래, 대머리 여가수다"라고 되받은 후 재빨리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빌어먹을! 나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며 욕을 내뱉었다. 두 눈에는 조금 전에 핑 돌았던 눈물이 계속 고여 있었다.
어느 덧 1년이 지났다. 1차 항암 치료 후 정상적으로 2차 항암 치료가 있었다. 하지만 3차 항암 치료는 간기능 칫수가 올라가지 않아 세 번째 입원을 해서야 겨우 성공할 수 있었다. 그 2개월여 사이에 머리카락이 다시 돋아 군인 머리 정도까지 자랐는데 항암 치료 후 다시 예전의 대머리가 되었다. 그리고 자궁과 난소를 들어내는 수술을 했다. 아내는 잘 참아주었다.
2002년 월드컵 때 폴란드와 첫 경기가 있은 다음 날, 막내는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 있는 처고모에게 1년 정도 기약으로 맡겨놓았던 것이다. 주위에 있는 친인척은 있었지만 서로 피치 못 할 사정들이 있어 미국까지 보내야 하는 이별의 아픔을 감내해야만 했다.
막내를 보낸 그 날 나는 폭음을 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아내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자신의 무능함에 나는 연민을 느꼈다. 내 자신이 싫었다.
아내 말로는 내년 정도에 데려 오겠노라고 했지만 그것은 장담할 수 없었다. 완치 판정을 받으려면 아직 4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벌써 1년 사이에 서너 번 가슴을 쓸어내리는 검사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 후, 아내는 4년 이상을 암과 혹독하게 싸웠다. 그리고 2006년 6월 22일, 내 생일 이틀 후 나의 '마눌님'은 나와 애들 1,2,3을 두고 하느님 곁으로 갔다. 아내는 마흔한 해의 '소풍'은 그렇게 끝냈다. 이승에서의 고통을 버리고 지금쯤 아내는 행복하게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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