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서울? 눈 덮인 철길을 걷다

구로구 항동 철길, 오류동역에서 부천시 남부생태공원까지

등록 2010.02.18 11:18수정 2010.02.18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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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길을 걸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그것도 눈이 내리는 날, 눈으로 하얗게 덮인 철길을 걸어본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다. 눈 오는 날에 열차를 타고 여행을 떠난 기억조차 희미하다. 한 겨울 열차에 몸을 싣고 어디론가 먼 길을 가던 날의 기억은 있는데, 그날 그 철로에 하얗게 눈이 내렸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눈이 오는 날, 하고 싶었던 일들이 여러 가지다. 눈 덮인 들판,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뽀드득 뽀드득 걸어보기. 눈이 두텁게 쌓인 고궁 넓은 마당, 뒷짐 지고 서성이기. 눈이 소복이 쌓인 철길, 소실점 좇아 한없이 따라가 보기.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해볼 수 있는 일들이다. 하지만 그동안 직장 구하고 결혼하고 자식 키우고 하다 보니 그것도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물론 그 전에 먼저 눈이 내려야 한다는 조건이 있어 약간은 실행에 옮기기 까다로운 면도 있었다.


a  항동 철길 들어서는 길목. 오른쪽은 오류동역 방향, 왼쪽이 항동 방향.

항동 철길 들어서는 길목. 오른쪽은 오류동역 방향, 왼쪽이 항동 방향. ⓒ 성낙선


올 겨울, 이제는 더 이상 눈이 내리지 않으려니 생각했다. 날이 점점 더 포근해지는 게 설사 눈이 내린다 해도 길을 덮을 정도는 되지 않을 거라고 짐작했다. 이날(11일) 일기예보조차 불분명한 데가 있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올 거라는데, 무언가 자신감이 결여돼 있다. 그런데 이날 아침, 그 일기예보가 정확히 들어맞았다. 뜻밖의 눈이 내리고 있다.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눈 덮인 철길을 걸어보려면, 지금 길을 나서야 한다.

항동 철길(서울시 구로구)은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가까이 찾아가 천천히 거닐어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철길이다. 홍익대학교 근처를 지나가는 옛 용산선(용산역~가좌역)이 있기는 하지만, 이 철길은 2005년에 폐선이 돼, 지금은 그 형태만 철길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에 비해 항동 철길은 비록 하루 한 차례 화물 열차가 다닐 뿐이지만, 여전히 철로로 사용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논과 밭이 어우러져 있어 예전 시골 정취를 그대로 맛볼 수 있는 길이다. 그러니 남다른 가치를 지녔다 하겠다.

a  주택가를 빠져 나가는 철길. 기차가 다닌다는 주의 표지판이 서 있다.

주택가를 빠져 나가는 철길. 기차가 다닌다는 주의 표지판이 서 있다. ⓒ 성낙선


묘한 기대감에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철길

오류동역을 떠나 삼천리 아파트 단지 곁을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도로를 가로질러 철길이 지나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도로 양쪽에 철길 건널목 신호등이 서 있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철길 위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방금 지나온 오류동역쪽이고, 왼쪽이 항동쪽이다.

철길을 따라 아파트와 학교와 물류센터 등이 바짝 붙어 있다. 내려 쌓이는 눈으로 희뿌연 길, 철로가 사라진 곳이 시야에서 사라질 듯 말 듯 아스라하다. 이런 날 이런 길을 나 말고 또 누가 걸어갔을까 싶은데, 침목 위로 발자국 하나 선명하게 찍혀 있다. 자세히 내려다보니, 그 밑으로 눈이 더 내려 쌓이기 전에 찍힌 발자국이 하나 더 있다. 나를 앞서 간 사람이 적어도 둘이다.


물류센터를 다 지나서 도로를 하나 더 넘어서자 주택가가 나타난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라고 부를 만한 집도 있고, 최근에 들어선 듯 아직 공사가 채 끝나지 않은 다가구 주택도 있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아파트 이름은 금강수목원이다. 철길이 그 아파트 곁을 스치듯 지나간다. 낯선 풍경이다.

a  숲을 가로지르는 철길. 언덕 위를 넘어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숲을 가로지르는 철길. 언덕 위를 넘어가 끝이 보이지 않는다. ⓒ 성낙선


a  인적이 드문 철길 위를 우산을 쓰고 홀연히 나타난 사람.

인적이 드문 철길 위를 우산을 쓰고 홀연히 나타난 사람. ⓒ 성낙선


숲 사이 좁게 난 철길에서 고개를 들어보니, 멀리서 우산을 들고 걸어오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 철길은 이 지역 주민들의 산책로이자 놀이터다. 날씨가 맑고 따뜻한 날에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나온 사람들이 천천히 철길을 걸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이 철길을 걷는 사람들은 무언가 볼 일이 있어 집을 나선 사람들이다. 걸음에 어딘가 서두르는 기색이 있다.


그렇게 주택가를 비집고 나간 철길은 숲을 가로질러 논과 밭 사이 들길로 이어진다. 이때부터는 철길 주변으로 이전과 완연히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아직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아서일까? 서울이라는 테두리 안에 갇혀 있으면서, 전혀 서울이라고 말할 수 없는 풍경이다. 새하얀 들판에 그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는 한 줄기 검은 철길이 있을 뿐이다.

철길이 휘어지는 곳에서 쉽게 발을 떼지 못하고 오랫동안 서 있었다. 이 끝은 어디일까, 이 끝에선 또 어떤 풍경을 마주할까? 세상에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곡선도 드물다. 내 삶의 굴곡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 선로 위를 떠돌이 개 세 마리가 어슬렁거린다. 선로 위에 가지런히 발을 얹고서 느닷없이 나타난 침입자를 경계하는 작은 개들. 저 어린 것들은 또 어떤 굴곡 많은 사연을 가졌을까?

a  철길 오른쪽이 푸른 수목원이 들어설 자리. 멀리 항동 저수지가 보인다.

철길 오른쪽이 푸른 수목원이 들어설 자리. 멀리 항동 저수지가 보인다. ⓒ 성낙선


지금도 충분히 아름답다, 개발이 최선은 아니다

이 길에도 조만간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구로구에서 철길이 지나가는 항동 저수지 주변 논과 들을 '수목원'(서울 푸른 수목원)으로 조성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서울을 벗어나 부천시 쪽으로 들어선 철길 주변으로도 천(역곡천)을 따라 산책로가 새로 단장되고 있다. 이 모든 사업이 마무리되고 나면, 지금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들어설 게 분명하다.

이 철길 위로 레일바이크를 운영하려는 계획도 있다. 재미있는 발상이다. 철로 위에서 '바이크'를 타는 것도 색다른 경험, 즐거운 체험이 될 수 있다. 그때가 되면 철길 옆으로 갖가지 나무들이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잡은 수목원이 들어서고, 철마다 유채꽃이다 코스모스다 하는 꽃들이 사람들을 향해 손짓이라도 하듯 바람에 한들거릴 것이다. 즐겁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오늘처럼 한가롭게 철길을 거니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질 수도 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 길은 가능하다면 아직 개발이 덜 진행 되었을 때, 그나마 지나간 세월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더 남아 있을 때 다녀오는 것이 좋을 듯싶다. 풍경이 변하면 길도 변하기 때문이다.

a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철길 주변 풍경. 조만간 사라질 모습이다.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철길 주변 풍경. 조만간 사라질 모습이다. ⓒ 성낙선


a  비닐하우스 곁을 굽어도는 철길. 선로 위에 발을 얹고 서 있는 강아지.

비닐하우스 곁을 굽어도는 철길. 선로 위에 발을 얹고 서 있는 강아지. ⓒ 성낙선


사실, 풍경이 변하는 데 걷는 게 문제가 아니다. 이 철길 주변이 개발이 되고 난 뒤에는 누군가에겐 더 아름다운 풍경, 더 걷기 좋은 길로 되살아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라진 풍경 뒤로 함께 사라진 추억들은 영원히 되살리기 힘들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이 소박한 풍경은 '개발의 가치'로 따질 수 없는 것이다. 소박한 풍경이 지니는 가치라니? 하긴 자연에 인간의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이해하기 힘든 일일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움을 실제 이상으로 과장하기 위해 필요 이상의 돈을 지불하는 것도 큰 문제다. 우리가 낸 비싼 세금으로 나라에서 기껏 열심히 지키고 보존하려고 하는 것들이 자연미를 훼손한 인공미라는 걸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거기에 그 돈이 먼저 쓰였어야 할 대상을 떠올리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개발에 앞서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다.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아이들이 상당수다. 돈이 없어 교육 과정에서부터 차별을 받아야 하는 청소년과 대학생들이 부지기수다. 일자리를 찾아서 가족을 떠나 고시원이나 찜질방을 전전하는 가장들이 나날이 늘고 있다. 그들에게 개발은 그림의 떡이다. 애초 개발의 덕을 보기 힘든 그들에게는 그 모든 게 그저 남의 일처럼 한가한 얘기일 뿐이다. 먹고 살만한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것이,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것에 우선할 수 없다.

a  부천시 남부수자원생태공원 가기 직전. 역곡천 위를 건너는 철길.

부천시 남부수자원생태공원 가기 직전. 역곡천 위를 건너는 철길. ⓒ 성낙선



저녁 뉴스를 보니, 이날 하루 눈이 내린 탓에 시내 곳곳에서 사고가 발생했다고 한다. 눈 덮인 언덕에서 미끄러진 차가 전봇대를 들이박고 멈춰서 있는 장면이 나온다. 비가 오다가 갑자기 눈이 온 탓에 도로 사정에 더 대처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오늘, 누군가에겐 악몽으로 남을 하루가 되었을 법하다.

내게도 군데 군데 반은 녹아 질척이는 눈이 그렇게 반갑지는 않았다. 하천을 가로지르는 철길 위 눈 덮인 침목에 발을 올려놓을 때는 실수로 미끄러져 떨어지지는 않을까 다리에 힘을 주어야 했다. 눈은 하루 종일 내렸다. 한 손에는 우산을 다른 한 손에는 카메라를 든 채 4시간을 고정된 자세를 취했더니, 나중에는 손과 팔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눈 오는 날 철길을 걷는다는 생각에 그 모든 걸 기꺼이 감수했다.

항동 철길은 서울에서 찾아가 볼 수 있는 흔치 않을 길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여태 시골 철길을 걸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찾아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예전에 시골 철길을 걸어본 추억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어느 날 갑자기 그리로 자연스럽게 발길이 향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a  부천시 남부수자원생태공원 정문. 아이들 놀이터와 산책로 등이 있다.

부천시 남부수자원생태공원 정문. 아이들 놀이터와 산책로 등이 있다. ⓒ 성낙선


어떻게 갔다 왔나?

항동 철길은 오류동역에서 시작한다. 이날 나는 오류동역에서 내려 2번 출구로 내려온 다음, 오른쪽 길을 따라 쭉 올라갔다. 도중에 막힌 길에서 되돌아 나오기도 하다가, 삼천리 아파트 단지를 오른쪽으로 돌아서면서 어렵지 않게 철로를 발견했다. 거기에서부터 부천시 남부수자원생태공원까지는 약 5km. 더 걸어갈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길이 너무 멀다. 돌아올 때는 공원 앞 길 건너 버스정류장(정문 앞에서 봤을 때 왼쪽)에서 오류동역을 지나가는 녹색버스(6614)를 집어탔다. 철길에서 벗어나 공원까지 가는 길 일부 구간에 갓길이 없다.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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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낙선

#항동 철길 #오류동역 #항동 저수지 #남부수자원생태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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