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조 전 대변인 17일 오후에 만난 고영조 전대변인의 활짝 웃는 모습. 고씨는 "이날 정치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아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이야기 했다.
엄민
- 2004년 핵폐기장 백지화에 성공한 이후 대책위 사람들은 어떻게 지냈나."다들 본래 그들의 삶으로 돌아갔다. 나는 과일가게를 하고 있다. 김종성 집행위원장은 생업이었던 농사에 전념하다가 6월 지방선거 구의원 출마를 현재 준비 중에 있다. 다만 당시 대책위가 부안 핵폐기 백지화에 성공했지만 부안 지역민들 간에 찬성, 반대로 나뉘어 진통과정을 겪으면서 정작 부안을 위한 현실적 대안을 내놓는데 집중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그 점이 지금도 아쉽다."
- 문규현 신부님과 어떻게 인연이 닿아 함께 핵폐기장 백지화 운동을 하게 되었나. "2003년 여름 문 신부님께서 삼보일배를 하고 계실 당시 부안에는 핵폐기장이 설치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이미 돌고 있었다. 그 당시 부안군민들 주체로 대책위를 결성했고 문 신부님께 도움을 청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삼보일배로 평택에 계시던 문 신부님께 부탁을 드렸더니 '외지사람이 그런 일을 해서 되겠느냐'며 거절하셨다.
그 후에 문 신부님께서 허락하셔서 우리가 부안성당을 근거지로 활동할 수 있었다. 성당에서 매일 30여명의 사람들이 자고 밥 먹고 그랬다. 그 당시 문 신부님은 종교인으로 성직자로서 불편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내색을 한 번도 안 내비치셨다. 특히 모든 사람들의 개인적인 가정사와 대소사를 일일이 챙겨주셔서 그게 기억이 많이 남는다."
- 부안 사람들이 환경, 종교단체에 의해 이끌려서 핵폐기장 유치 반대를 했고 대다수 부안민이 후회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사실인가. "그 당시에 부안민들이 환경, 종교 단체에 이끌려 핵폐기장 유치를 반대했다는 주장은 부안민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놀아나는 꼭두각시 정도로 생각하는 논리다. 2004년 핵폐기장 유치 찬반 주민투표를 했을 때 부안군민 72%가 참여를 했고, 91.9%가 반대표를 던졌다. 지금도 부안핵폐기장 결정은 시민이 주체적으로 움직여 합의를 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 당시에 환경 단체나 서울의 시민 사회에 섭외를 한 것도 지역 주민들인 대책위원회가 먼저 시도한 것이다. 핵폐기장 반대운동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부안군민이었고 지금도 대다수 부안군민들은 그 일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다. 핵폐기장 백지화는 부안민에게 민주주의의 실현 그 자체였다.
- 부안군민들이 핵폐기장 유치는 반대한 반면 새만금 간척사업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었다. 지역이기주의라는 비판이 많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부안 핵폐기장 설치와 새만금 간척 사업은 환경이 파괴될 수 있다는 측면으로 보면 동일선상에 있어 일면 모순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역 주민 입장에서 보면 실질적으로 새만금 간척 사업은 근 20년간 부안 지역에서 논의되었던 문제였던 반면 핵폐기장의 경우는 부안군민의 의견수렴 과정이라는 민주적 절차를 생략한 것이었다. 그 당시 김종규 전 부안군수가 계속 핵폐기장 유치를 하지 않겠다고 하다가 하룻밤 사이에 입장을 바꿔버리자 주민들의 분노가 폭발했고 부안사태가 벌어졌다. 개발콤플렉스가 있었던 전라도민 사이에서 전라북도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암묵적 동의가 있었기에 '새만금 간척사업'은 당시에 호소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 2006년 방조제가 완공되었고 2010년 4월에 부안에서 첫 새만금 방조제 개공식이 열린다고 들었는데 새만금 간척사업에 대한 지역민의 여론은 어떤가."초창기 새만금 간척사업을 찬성했던 분위기와 달리 현재는 많이 회의적으로 바뀌었다. 새만금 개발 결정이 난 때는 80년대 후반이었고 그 당시에는 정부 정책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이거나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방조제가 완공된 이후로 새만금 간척사업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이 많아졌다.
현재 새만금 간척 주변 땅은 대다수가 외지인들 소유다. 대다수 어민들은 간척사업 때문에 외려 본업을 그만두고 식당 종업원, 일용직, 청소부로 살아가고 있다. 외지인들은 부안지역에 투자는 할 지 모르지만 소비를 하지는 않는다. 그 탓에 정작 부안지역 내의 소비 주체였던 어민은 빈민으로 전락하고 부안 지역민들의 삶은 더 곤궁해지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인해 지역 순환 경제구조가 깨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종성 전 위원장] "보따리 들고 출근하듯 집회 오신 어르신들에 감동"

▲김종성 김종성 전집행위원장의 모습. 그는 이날 '핵폐기 보따리'이야기를 하며 과거를 회상했다.
엄민
- 핵폐기장 백지화 운동할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2003년 여름 부안 사태가 벌어지고 부안민들이 고속도로 점거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 뙤약볕이 심해서 굉장히 뜨거웠는데 나이가 지긋하신 할머니까지 지팡이를 들고 오셨다. 그때 수 천명이 모였는데 핵폐기장을 막아야겠다는 군민들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촛불집회를 할 당시에도 할머니, 할아버지 사이에서는 '핵폐기 보따리'라는 게 유행했다. 보따리 안에 깔개, 무릎덮개, 따뜻한 보온병, 머리띠 등 시위용품이 있었고 매일 보따리를 들고 오가는 시민이 하루에 3천여명 됐다. 250여회의 촛불집회에 개근한 시민도 있었고. 그 보따리를 들고 출근하듯이 오는 어르신들을 뵈면서 감동을 많이 받았다."
- 오늘 새만금 간척지인 계화도에 다녀왔다고 들었는데 왜 다녀온 것인가? "계화도 주민들의 상태가 매우 심각해서다. 2006년 물막이 공사 이후에 특산품이었던 '생합'이 사라졌고 상대적으로 바지락이 많아졌다. 특히 바지락은 작년에 많이 나왔는데 멸종 위협을 느끼면 번식을 위해 그런 현상이 벌어진다고 한다. 실제로 방조제 때문에 갯벌에 물이 항상 차 있으니까 한 달에 한두 번 물 빠질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물 있는 상태에서 선주들이 흡입기계로 바지락을 빨아들여 싹쓸이를 해간다. 그 탓에 흡입기계를 살 수 없는 맨손 어업자들은 한 달에 한두 번 갯벌에 나서는데 그마저도 어폐류를 찾기가 어렵다. 메마르지 않은 갯벌조차도 자생력을 잃었을 뿐 아니라 공동체가 분열되어 약자인 맨손어업자들의 생계가 더욱 어려워지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계화도 지역 주민이 적은 포스트잇 계화도 지역 주민이 적은 포스트잇. 수산업 불가능, 수산자원 고갈, 바다가 미쳐서 모기가 많다 등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인한 지역주민의 고민이 적혀있다.
엄민
- 부안이 현재 군민 간의 분열이 심하다고 들었는데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그리고 나름의 해결방안이 있다면 함께 이야기해달라."핵폐기장 반대 운동을 할 당시에도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반발이 심했고 그 대립구도가 사실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지역 주민간 자치, 연대의 흐름을 만들어보려고 노력했는데 1년간의 다툼 과정에서 서로의 연대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바로 이어진 2006년 지방선거에서 당시 핵폐기장을 찬성, 반대했던 이들이 나뉘면서 주민들끼리의 내부분열이 더 가속화되었다. 이번 지방선거에도 핵폐기장 유치를 하고자 했던 김종규 전 부안군수가 군수 후보로 출마를 하기 때문에 예전처럼 찬반 대립 구도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부안사태가 보여준 민주주의의 가능성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앞으로 자치역량을 높이고 연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엄민 기자는 11기 인턴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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