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하나 가슴에 얹는 마음을.
최종규
<김용훈-사진의 예술(작가로 되는 길)>(서울신문학원,1959)이라는 책을 봅니다. 글쓴이 김용훈 님은 '리아리즘, 포토몬타쥬, 부루죠아, 리아리티, 구루배, 테레비, 알후렛트 슈데이그릿스, 우이루핼므 와이마, 모티부, 유제느 아드제, 뽀이, 포-트레이트, 보륨, 스타이갱, 루넷싼스' 같은 말을 쓰고 있습니다. 뭔가 좀 얄딱구리하다 싶습니다. 일본책을 고스란히 오려붙인 책이 아닌가 싶은데, 책끝을 보니 "아루스, 最新寫眞大講座, 寫眞의리아리즘, 눈으로보는寫眞史, 寫眞歷史, 寫眞百年史, 世界寫眞史, 빛과 그 諧調, 寫眞의 名作鑑想, 寫眞技術講座" 같은 책이름을 들고 있습니다. 이 책들이 <사진의 예술>을 펴내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고 적습니다.
아하, 그렇구나. 아무렴.
김용훈 님이 들고 있는 책들은 하나같이 일본에서 나온 책입니다. 글쓴이는 이 일본책에 실린 사진을 오려서 이 책에 붙이고, 이 일본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고스란히 우리 말로 옮겼구나 싶습니다.
1950년대 우리 사진밭에서는 어찌할 길 없는 노릇이라 할 터인데, 아무리 우리 사진밭이 가난하다 하더라도 우리 깜냥껏 우리 이야기를 북돋우면서 우리 눈길을 갈고닦을 수 없었나 싶어 안타깝습니다. 그렇지만 2010년대 오늘날 우리 사진밭을 돌아본다 하여도 아직까지 우리 깜냥껏 우리 이야기를 갈무리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거의 언제나 나라밖 사진 이론만 들먹이거나 들춥니다. 지난날에는 일본책을 고스란히 베꼈다면 오늘날에는 미국책이나 유럽책을 고스란히 흉내내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힘을 내지 않으니 우리 두 손에 굳은살이 박히기 어렵고, 우리 두 손에 굳은살이 박히지 않으니 우리 깜냥껏 우리 사진문화이든 책문화이든 발돋움하도록 이끌지 못합니다.
<the american sportsman>(A Ridge Press & Amerian Broadcasting Company Publication) 3권 4호(1970)를 봅니다. '아메리칸 스포트맨'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줄여 'as'라고도 하기에 무슨 사진책인가 하고 들여다보니 '사냥꾼 정보지'입니다. 새들이 무리지어 날아가는 사진을 겉에 쓰고 '스포츠맨'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사냥꾼한테 사냥 정보를 알려주는 잡지가 되는가 보군요.

▲ 일본 사진책.
최종규
책값을 셈하고 책방을 나설 무렵, <金丸重嶺-寫眞藝術>(朝日新聞社,1979)이라는 도톰한 책이 보입니다. 한글판이 아닌 책이지만 '사진예술'이라는 이름이 끌립니다. 무슨 책일까 하고 집어서 들여다보는데 글쓴이 이름이 낯익습니다. '누구였지? 설마?' 하면서 간기를 들춥니다. 카나마루 시게네. 그렇구나. <사진예술개론>을 써낸 한정식 교수가 일본에서 '사진예술'을 배웠다고 하는 그분이구나. 이분 책은 <예술로서의 사진>(해뜸,1988)이라는 이름으로 한 번 옮겨진 적이 있었지. 집으로 와서 <예술로서의 사진>을 들춥니다. <寫眞藝術>이 이 책이 맞습니다. 찬찬히 두 책을 견주어 보니, 적잖은 대목에서 일본 한자말을 그대로 옮겨 놓고 있습니다. <번역은 내 운명>이라는 책에서 여러 번역쟁이들이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이렇게 일본 한자말들은 사진이고 문학이고 예술이고 인문이고 제대로 걸러지지 않은 채 들어와서 우리 삶 깊숙하게 또아리를 트는구나 싶습니다. 우리 말로 우리 학문을 하지 못하고, 우리 글로 우리 사진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4) 세월을 담는 책책값을 다 셈했지만, 책방 사진을 찍으려고 한 번 더 골마루를 돌아봅니다. 슬슬 사진을 찍으며 책시렁을 곰곰이 살펴봅니다. <조갑제,정호승-김현희의 하느님>(고시계,1990)이라는 책 하나가 눈에 뜨입니다. 조갑제라는 이름하고 정호승이라는 이름이 안 어울린다고 여기는 분이 많겠지만, 1980년대에 전두환 씨와 노태우 씨가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 <월간 조선> 편집부장이 조갑제 님이었고 편집차장이 정호승 님이었습니다. <김현희의 하느님>이라는 책은 <월간 조선> 편집부장과 편집차장이 함께 일구어 낸 땀방울입니다.

▲ 겉그림.
최종규
.. 이들(귀순자)을 만나면서 가장 먼저 느낀 점은 이들도 남한 사회에 사는 다른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평범한 삶을 그대로 살고 있다는 점이었다. 북한에서의 삶이 어쨌건 간에 남한에서의 새로운 삶에 깊게 뿌리를 내리면서 결혼도 하고 자녀도 키우고 직장생활도 해 나가는 한 평범한 가장의 모습이었다. 음지적 삶을 살면서 남의 눈에 드러나기를 퍽 꺼릴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이들은 우리 사회에 누구를 만나도 꺼릴 것이 없다는 듯한 당당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김만철 씨와 전철우 씨를 제외하고는 말씨도 서울 말씨와 거의 비슷했으며, 일상어로는 잘 쓰지 않는 '대한민국'이라든가 '우리 대한민국 사회'라는 말을 가끔 쓰기도 했으나 … "어쨌든 당신은 당신의 조국을 배반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도 자신이 진정 조국을 배반했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아홉 명 중 단 한 사람도 없었다 … 안찬일 씨는 북한에서 귀순자란 곧 변절자를 뜻한다면서, 비무장지대에 근무할 때 남의 월북자를 보고 국군방송에서 "귀순하라, 귀순하라"고 방송하면, 그 말이 "변절하라, 변절하라"는 말로 들려 병사들끼리 서로 웃기조차 했다고 한다 …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애가 어릴 때인데, 하도 장난감 권총을 사 달라고 해서 사 줬더니 아이가 나를 향해 탕탕 하고 총을 쏘았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제 아내가 그 애한테 아빠를 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가 이러더군요. 아니야, 아빠를 쏘는 게 아니고 공산당을 쏘는 거야.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북에서 공산당이었는데 싶어, 제가 이 얼마나 비참한 시대에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안찬일 씨는 또 처가집 조카들이 다니는 국민학교에 반공강연 초청을 받고 교내 VTR방송을 통해 강연을 했다가 크게 후회한 적도 있다. "조카들 말이 이모부가 VTR에 나오는 것을 봤는데, 빨갱이더라는 거예요. 제 생각엔 똑같은 이모부인데, 왜 평소에는 존경을 받다가 북에서 온 이모부다 하니까 무슨 다른 인간처럼 달리 보느냐 싶더군요. 저는 북에서 남한 국군이 인민군을 빨갱이라고 하면 죽이고 싶도록 증오심이 일었는데, 정작 여기 와서 제가 그런 말을 들으니 정말 귀에 거슬렸습니다." 안찬일 씨는 "이제 우리만이라도 통일을 위해서 상대방을 자극하는 말을 안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얼마 전에 이북5도청에서 내건 플래카드에 '방심하면 붉은 이리 내려온다'고 써 놓았더군요. 이건 우리 국민에게도 안 좋고 그쪽도 자극하는 백해무익한 말입니다. 예전에 남한에서는 빨갱이들은 머리에 다 뿔이 났다고 했는데, 그러면 북한사람들 머리에 다 뿔이 났습니까. 예전에 북한에서는 배나온 사람이 지주다 하고 교육시켰는데, 그럼 지금 김일성이도 배가 나왔는데 지주입니까." .. (167∼168, 171쪽, 174∼175쪽/정호승 글)
<김현희의 하느님>이라는 책은 1990년에 나왔습니다. 오늘 <신일서점>에서 함께 만난 <살아나는 임진강>이라는 책은 1992년에 나왔고, 오현호 님이 <식민지의 아들에게>를 써낸 해는 1989년입니다. 비슷한 때에 같은 나라에 살면서도 세상을 바라보고 글을 써서 책을 내는 마음그릇은 사뭇 다릅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니 다 다르게 생각하고 다 다르게 생각한 대로 글을 쓰다가는 다 다른 모양새로 책을 냅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 할 이야기는 아닙니다. 누가 바르고 누가 틀리다 할 책 또한 아닙니다. 그저 이렇게 다른 삶이요 다른 사람이며 다른 넋이구나 하고 헤아릴 뿐입니다.
오연호 님으로서는 주한미군이 한국땅에서 저지른 범죄를 두 다리로 찾아나서면서 이야기를 적바림하고, 정호승 님으로서는 '귀순용사'를 찾아다니며 이들한테 들은 이야기를 적바림합니다. 두 갈래 이야기는 두 갈래 이야기대로 우리한테 여러 가지로 생각하도록 이끌고, 우리 나라를 이루는 여러 모습을 찬찬히 돌아보도록 도와줍니다.

▲ 책마다 세월 품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최종규
'도시 빈민선교 현장보고서'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기독교 대한감리회 선교국,1982)까지 더 고르고 나서 책방을 나섭니다. 집에서 아빠를 기다리는 옆지기가 너무 오래 기다리면 안 되니, 오늘 장만한 책은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길에서 읽고, 집에서 잠자리맡에 놓고 틈틈이 읽자고 생각합니다. 세월을 이기는 책이 아니라 세월을 담는 책들을 만난 느낌을 제 마음 한켠에 잘 갈무리하고 있다가, 이따 집에 돌아가면 옆지기한테도 이렁저렁 이야기꽃을 피워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마주하는 매무새는 바로 내가 삶을 마주하는 매무새임을 되새기고,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보듬는 매무새 그대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가만히 보면, 헌책방이든 새책방이든 도서관이든 오랜 세월 꾸준하게 읽힐 책을 간수하는 곳일 수 있으나 '책 하나 처음 세상에 태어날 무렵 이야기'를 소록소록 담아서 오랜 세월에 걸쳐 사람들한테 나누어 주도록 쉼터가 되는 곳일 수 있구나 싶습니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아름다운 목숨이듯 모든 책은 저마다 아름다운 넋입니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스스로한테 반갑고 좋고 알맞다 싶은 이야기를 찾아가듯,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른 책을 반기고 좋아하고 알맞다고 여깁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아름다움이고, 무엇이 우리를 저마다 즐겁게 하는 아름다움일까요. 무엇으로 우리 삶이 한결 넉넉해지고, 무엇이 있고 없고에 따라 우리 삶은 곱기도 했다가 짓궂기도 했다가 바뀌고 있을까요.
덧붙이는 글 | ― 서울 수유역(화계사) <신일서점> / 02) 908-9552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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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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