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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를 기억하지 않는 영화, 그 대신...

[리뷰] 잊을 수 없는 사건, 잊히지 않을 영화 <작은 연못>

10.04.18 17:54최종업데이트10.04.18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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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작은연못> 포스터. ⓒ (유)노근리 프로덕션

한 편의 영화에는 정말로 많은 사람들의 피땀 어린 노고가 들어간다. 우리는 언제나 주연배우들만 기억하지만, 그들을 빛내주는 숱한 조연배우와 단역배우가 있다. "단역 없이 조연 없고, 조연 없이 주역 없다!" 입에 달고 다니는 구절이지만, 영화를 볼 때마다 절실하게 떠오른다. 그뿐인가! 스턴트에서 조명, 의상과 분장, 미술과 편집, 음향에 이르기까지.

 

<작은 연못>은 영화장르의 속성을 명징하게 드러내 보인다. 제작과정 자체가 기록영화일 정도다. 제작 구상부터 상영까지 꼬박 10년이 걸렸다. 영화제작을 결정한 것이 2001년 일이고,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마무리하는데 3년(2003-2006)의 시간이 들어갔다. 영화 찍고 마무리 작업하는데 다시 3년(2006-2009)이 걸렸고, 그렇게 10년 세월이 지나갔다. 

 

<작은 연못> 블로그 곳곳에서 우리는 영화에 대한 배우와 스태프의 뜨거운 사랑을 본다.

 

"142명의 배우와 229명의 스태프가 노근리를 기억합니다!"

 

관객은 <작은 연못>에서 개별적인 배우를 기억하지 않는다. 주역과 조연, 단역을 구별하지 않는다. 더욱이 누구의 연기가 좋았는지 어땠는지, 촌평조차 하지 않는다. 다만 영화를 보면서 아파하거나, 눈물 흘리거나, 가슴 졸이거나 혹은 분노하거나 절망할 따름이다. 그렇게 <작은 연못>은 영화관을 침묵과 한숨, 아픔과 눈물의 현장으로 만들어버린다.

 

낡은 전축 혹은 오래된 연극 같은 영화

 

1950년 7월 하순, 충북 영동군 황간읍 노근리 대문바위골. 여름의 절정이 산야를 그야말로 초록으로 물들이고 있다. 녹음과 매미 울음소리와 아이들의 합창연습에 세월과 시간이 잠시 멈춰버린 듯하다.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어느새 한 달의 시간이 흘러갔다. 하지만 영동 읍내에서도 멀리 떨어진 채 깊디깊은 산과 산으로 둘러막힌 마을은 고요하다.

 

포성과 살육과 죽음의 공포도 없는, 또 다른 <동막골>이 펼쳐진 듯하다. <작은 연못>의 공간과 시간은 관객들 앞에서 낮과 밤의 풍경을 느릿느릿 열어젖힌다. 아주 오래 전에 잊힌 엘피판처럼, 혹은 오랜 흑백영화나 무성영화처럼 시간과 공간은 나지막하게 그리고 천천히 호흡한다. 따라서 영화는 연극무대가 되고, 인물들은 친숙한 이웃이 된다.

 

마을 어귀, 나무그늘 아래 동네노인 둘이 바둑을 둔다. 마을 사람이면 누구든 그곳을 지나야 마을에 들고 날 수 있다. 사람들은 천천히 걷거나 빨라도 종종걸음이다. 속도를 불러오는 문명의 이기는 아예 없다. 바둑 두는 노인들의 이야기에 묻어나오는 다채로운 사연에도 어떤 악의나 말 못할 슬픔이나 절망은 없다. 그저 삶의 편린만 조각나 있을 뿐.

 

군용지프와 트럭과 쌕쌕이(F86 전투폭격기)가 그곳에 속도를 몰고 온다. 대문바위골이 미군의 작전지역이기 때문에 피난을 가야한다는 것을 통지하는 지프방송. <작은 연못>은 6·25 당시의 낯선 역사를 들춰낸다. 미군지프를 타고 '소개명령'을 하달하는 자는 일본인이다. 한국인 가운데 영어를 아는 자가 하나도 없는 탓이다(영화 첫머리에서 '보도연맹'과 결부한 지식인 탄압과 숙청을 미리 보았기에 관객은 어렵지 않게 이해한다).

 

빨갱이가 아니라, 미군이라니!

 

1950년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나흘 동안 '노근리'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변변찮은 지식인 하나 없는 궁벽한 농촌마을 노근리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노근리 대책위원회 위원장' 정은용씨의 저작 <그대, 우리의 슬픔을 아는가>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작은 연못>의 시나리오도 여기에 의지하고 있다.

 

마을 민초들의 짧지만 비수 같은 이야기가 사태의 핵심을 관통한다.

 

"이 박사(이승만 대통령)도 부산으로 날랐다는데, 우리도 피난 가야제."

 

하지만 그들 같은 농투성이, 무지렁이들이 가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어느 곳에서 누가 그들을 먹여주고 재워준단 말인가. 그들은 길지 않은 마을회의 끝에 피난을 결정한다. 그때 들리는 노인의 넋두리 비슷한 탄식소리.

 

"대문바위가 우리 마을을 지켜주는디, 어디로 간단 말이여, 시방."

 

그들은 대문바위 대신 미군을 믿고 마을을 떠난다. 거기서부터 영화는 점차 관객의 호흡을 가쁘게 인도한다. 우리는 <작은 연못>에서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한국인 민간인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군데군데 확인한다. 미군 부상병들을 싣고 질주하는 트럭을 위해 민간인을 짐승 다루듯 하며, 피난민임을 알면서도 그들을 적군병사 대하듯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땅의 선량하고 소박한 민간인들은 미군을 하늘처럼 믿고 의지한다. 미군 전투기와 기관총의 포탄과 총탄세례를 받으면서도 그들은 그것이 '빨갱이의 짓'이라고 굳게 믿는다. 미군이 '도라쿠(트럭)'으로 자기네를 피난시켜 줄 것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것은 여기서 말하지 않기로 하자.

 

망각과 기억 사이

 

쌍굴 안에서 나흘째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몇 사람이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그때 갓난아이가 울음을 터뜨린다.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고 줄기차게 울어댄다. 미군의 기관총이 다시 불을 뿜는다. 아낙네 하나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고함친다.

 

"아이를 울게 하지 말아요! 애가 우니까 총을 쏘잖아요!"

 

아버지가 아이를 안고 물가로 다가간다. 잠시 후 아이 울음소리가 사라지고, 큰 눈을 가진 소녀의 겁 질린 얼굴이 화면 가득 들어온다. 아이 아버지는 온몸으로 흐느낀다. 이것은 <작은 연못>에서 소름끼치도록 연출된 장면이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아니 영원히 망각할 수 없는 끔찍한 사건을 웅변하는 장면이 만들어진 것이다. 피해자가 다른 피해자를 낳는 전쟁의 악순환을 처절하게 재현하는 장면. 차라리 눈감을 일이다.

 

잔인하고 또 잔인한 7월의 나흘이 흘러갔다. 모두 218명의 민간인 학살되었다. 일흔 살 넘은 노인도, 갓 태어난 어린것도,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이도, 20-30대 청춘 남녀도, 여자도 남자도, 아저씨도 아줌마도 그렇게 같은 곳, 같은 날 몰살당했다. 하지만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고, 반딧불이는 하늘로 날아올랐으며, 별은 밤마다 총총했다. 노근리 사람들은 그날의 처절을 극한 살육과 학살의 현장을 단 하루도 잊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무엇을 할 것인가

 

'노근리 민간인학살'은 사건발생 50년이 지나가도록 망각된 사건이었다. 1999년 에이피 통신 최상훈 기자 등이 세상에 알림으로써 '퓰리처상'과 <노근리 다리 The Bridge at No Gun Ri>라는 책으로 사건은 빛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정부와 미국은 끝까지 이런 사실을 외면하다가 200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공식적으로 사과하기에 이르렀다.

 

미국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예하부대 병사들이 자행한 천인공노할 '민간인 학살사건'. 218명의 사망자와 2170명의 유가족을 잉태한 학살사건. 사건발생 55년이 되어서야 사건의 실체를 인정한 한미양국의 정치가들과 군당국자들의 뻔뻔스러운 후안무치. 이것이 약소국 민초들의 비극적인 운명이다. 하지만 역사는 다시 아이러니를 재연한다.

 

한국군이 미군의 용병이 되어 '베트남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전하여 5만여 명에 이르는 베트남인들을 죽인 것이다. 베트남 사람들을 죽이고, 그 대가로 피 묻은 달러를 벌어들여, 피 묻은 돈으로 아내와 자식들을 먹여 살린 대한민국의 벌거벗은 모순! 피해 당사국에서 가해자로 전환한 우리의 자세는 과연 얼마나 당당한 것이었는지 반드시 물어야 한다.

 

우리는 아직도 6·25 한국전쟁의 총체적인 진실을 알지 못한다. 얼마나 많은 민간인학살이 자행되었는지 어떤 완벽한 정보도 우리에겐 없다.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 활동은 미진한 채 종결되었고, 방방곡곡의 유해 발굴시한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이하는 2010년 시점에서 우리의 과제를 깊이 생각해 볼 일이 아닌가 한다.    

 

'인류는 과연 전쟁을 그만둘 것인가! 전쟁과 민간인학살은 언제 청산될 것인가!?'

2010.04.18 17:54 ⓒ 2010 OhmyNews
노근리 민간인학살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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