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마디 한자말 털기 (95) -연然

[우리 말에 마음쓰기 911] '지식인연하다', '작가연하다' 다듬기

등록 2010.05.10 11:39수정 2010.05.10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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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지식인연하다

.. 책을 읽자는 캠페인을 벌이되, 기존의 교양관련 프로처럼 '지식인'연하지 않고, 인기개그맨 유재석 씨와 김용만 씨가 등장하여, 책과 관련한 만담을 펼치면서 책읽기를 유도한다 ..  <이명원-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새움,2004) 169쪽


'캠페인(campaign)'은 '운동'으로 다듬을 수 있는데, 앞말과 묶어 "책을 읽자고 외치되"나 "책을 읽자며 나서되"로 다듬으면 한결 낫습니다. "기존(旣存)의 교양관련(敎養關聯) 프로(program)처럼"은 "예전 교양 방송처럼"이나 "지난날 교양 방송처럼"으로 손보고, '등장(登場)하여'는 '나와'나 '나와서'로 손보며, "책과 관련(關聯)한"은 "책과 얽힌"으로 손봅니다. '만담(漫談)'은 '이야기'나 '온갖 이야기'나 '재미난 이야기'로 손질하고, "책읽기를 유도(誘導)한다"는 "책읽기로 이끈다"나 "책을 읽도록 이끈다"로 손질해 봅니다.

 ┌ -연(然) : '그것인 체함' 또는 '그것인 것처럼 뽐냄'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  - 학자연
 ├ 척 : 그러하지 않은데 그러하다고 꾸미는 모습.
 │      그럴듯하게 꾸미는 거짓스러운 모습
 │     <아닌 척해도 다 안다고 / 없는 척을 하는 거지?>
 ├ 체 : 그러면서 아니라 꾸미고, 아니면서 그러하다고 꾸며 보이는 모습
 │     <모르는 체를 한다고 우리가 모를 줄 알고? / 아는 체 하기는>
 │
 ├ 지식인연하지 않고
 │→ 지식인인 척하지 않고
 │→ 지식인인 체하지 않고
 │→ 지식인인 듯하지 않고
 │→ 지식인처럼 굴지 않고
 │→ 지식인 흉내를 안 내고
 └ …

우리 말 '체'와 '척'이 있습니다. 그러하지 않으면서 그러한 모습으로 내세우거나 그러하지 않으면서 그러한 모습으로 내세우는 자리에 쓰는 낱말입니다. 이와 같은 뜻과 쓰임으로 '-인 것처럼'과 '듯이'라는 말투가 있습니다.

한자 뒷가지 '-然'을 붙이면서도 '체'와 '척'과 '-인 것처럼'과 '듯이'를 붙일 때와 같거나 비슷한 뜻을 가리키곤 하는데, '-然'을 붙이는 말투는 우리 말투가 아닙니다. 이런 말투는 한문 말투입니다. 한문 말투는 한문 말투이지, 우리 말투일 수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지식인인 것처럼 하지 않고"라 손볼 수 있고, "지식인처럼 굴지 않고"나 "지식인처럼 내세우지 않고"나 "지식인처럼 뽐내지 않고"나 "지식인처럼 보이지 않고"로 손보아도 잘 어울립니다. "지식인 시늉을 하지 않고"나 "지식인 흉내를 안 내고"나 "지식인 티를 내지 않고"로 손질할 때에도 잘 어울리고요.


 ┌ 학자연
 │
 │→ 학자인 척
 │→ 학자인 체
 │→ 학자인 듯
 │→ 학자인 양
 │→ 학자라도 된 듯
 │→ 학자라도 된 양
 └ …

국어사전에서 '-然'을 찾아보면 '학자연'이라는 보기글 하나 실려 있습니다. 학자 티를 낸다는 '학자연'일 텐데, 곰곰이 돌아보면 '-然'이라는 뒷가지를 즐겨쓰는 사람들은 으레 학자입니다. 또는 지식인입니다. 때로는 기득권이나 권력을 움켜쥔 사람들입니다. 여느 자리 여느 사람들은 예부터 손쉽게 두루 써 오던 '체-척-듯-양-티-흉내-시늉' 같은 말마디를 주고받습니다.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양"이라 말하고, "훌륭한 사람이라도 된 듯"이라 말하며, "높은 사람인 척"이라 말해 왔습니다. 아닌데 아니지 않은 척을 하는 사람들은 겉치레를 하는 사람이고, 껍데기를 뒤집어쓰는 사람입니다. 겉말을 하고 껍데기말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겉은 번지르르한 듯 보이지만 속은 곪아터진 사람입니다. 앞에서는 우쭐거리나 뒤에서는 꾀죄죄한 사람입니다.

삶이나 넋이나 말이나 매한가지입니다. 겉을 드높이려 하면 겉을 틀림없이 부풀릴 수 있습니다. 이러면서 속은 오그라듭니다. 겉치레를 살피지 않으면서 속을 가꾸는 사람은 언제나 티없이 곱고 알찹니다. 속이 단단하거나 야무지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설픈 흐름을 좇거나 어줍잖은 뒤꽁무니를 잡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붙잡을 삶이라면 어설픈 삶이 아니라 알찬 삶일 테고, 어줍잖은 뒤꽁무니 삶이 아니라 싱그러우며 아름다운 삶일 테지요. 그렇다면 우리들은 알찬 넋을 가꾸고 알찬 말을 빛낼 노릇입니다. 좋은 얼을 일구며 야무진 글을 북돋울 일입니다.

ㄴ. 작가연

.. "분위기가 참 좋으시네요. 실례지만 교수십니까?" "아뇨, 저는 소설 쓰는 사람이에요." "네, 그렇군요. 어쩐지……." 작가연하지 않아도 그 존재감에서 하고 있는 일을, 남이 짐작하게 한다는 것은 흐뭇한 일이다 ..  <서영은-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문학동네,2010) 14쪽

'분위기(雰圍氣)'는 '느낌'으로 다듬고, '존재감(存在感)'은 '무게'로 다듬습니다. "한다는 것은"은 "하는 일은"이나 "하면"이나 "할 때에는"이나 "한다면"으로 손질해 줍니다.

 ┌ 작가연하지 않아도
 │
 │→ 작가인 척하지 않아도
 │→ 글쟁이 티를 내지 않아도
 │→ 글쟁이 시늉을 하지 않아도
 │→ 글쓰는 티를 내지 않아도
 │→ 글쓰는 냄새를 풍기지 않아도
 └ …

어느 한쪽에서 보자면 티를 낸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 보자면 티를 낸다기보다 '그와 같이 살고 있으'니 저절로 묻어나는 모습입니다. 티를 낸다고 할 때에는 아직 제대로 '그와 같이 살고 있'지 못한 셈입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농사꾼다운 모습이지 농사꾼 티를 내지 않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글쟁이다운 삶이지 글쟁이 티를 내지 않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는 애 아빠나 애 엄마이지 애 아빠나 애 엄마 티를 내지 않아요.

티를 낸다거나 척을 한다고 할 때에는 짐짓 뽐내거나 우쭐거릴 때입니다. 이를테면 "공무원 티를 낸다"고 하는데, 공무원이란 여느 사람들한테 몸을 바쳐 좋은 일을 해야 하는 자리인데, 여느 사람들을 밟고 올라서기라도 하는 듯 엉뚱한 정책을 내놓고 아주 마음을 써서 무언가 베풀어 준다는 듯 떠벌이기에 "티를 낸다"고 슬며시 비꼽니다. "학자 티를 낸다"고 할 때에는 쉽게 하면 될 말을 어렵게 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인 티를 낸다"는 말마디도 어슷비슷합니다. 잘난 척을 하거나 지식을 자랑을 할 때에 이런 말을 씁니다. 어줍잖은 지식조각으로 우쭐거리니까 "거참 지식인이라도 된 듯 떠벌이네" 하고 말합니다.

 ┌ 소설을 쓴다 말하지 않아도 내 무게에서
 ├ 글쓰는 사람이라 밝히지 않아도 내 무게에서
 ├ 글쓰며 살아간다 하지 않아도 내 무게에서
 └ …

사진을 찍는 사람은 늘 사진기를 갖고 다닙니다. 따로 작가란 이름이 붙든 안 붙든 사진기를 내 몸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이들 사진을 깊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늘 갖고 다니는 사진기는 잘 드러나 보이지 않습니다. 티가 나지 않습니다. 삶으로 녹아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법 값비싼 장비임을 뽐내고 싶은 이들한테서는 금세 티가 납니다. 작가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할지라도 값비싼 장비임이 티가 납니다. 옷차림이나 매무새에 '나 사진 찍는 사람이오' 하는 콧대가 서려 있습니다.

예부터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 했습니다. 솜씨있게 잘하거나 훌륭히 잘하는 이들은 스스로 티를 내지 않고 척을 하지 않으며 얌전히 고개를 숙인다 했습니다. 알차고 아름다운 사람은 알은 체를 하지 않습니다. 싱그럽고 따뜻한 사람은 있는 체를 하지 않습니다. 수수하게 살아가며 수수한 멋을 즐깁니다. 조촐하게 부대끼면서 조촐한 맛을 나눕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외마디 한자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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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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