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간 얼굴로 세상 줄에서 펄럭이길 빈다

빨래를 하며

등록 2010.08.16 17:18수정 2010.08.16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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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베란다의 빨래 세상 때를 다 벗은 말간 얼굴의 빨래

베란다의 빨래 세상 때를 다 벗은 말간 얼굴의 빨래 ⓒ 염정금

▲ 베란다의 빨래 세상 때를 다 벗은 말간 얼굴의 빨래 ⓒ 염정금

오전 8시, 어김없이 출근한 남편과 등교한 아이들이 흩어 놓고 간 집을 정리하기에 여념이 없다. 먼저 아침 밥상을 치우고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책과 자잘한 물건들을 제자리에 정리해 둔 뒤 허물처럼 벗어 논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애벌빨래를 한다.

 

변함없는 나의 일상이지만 유독 생각이 많은 시간은 빨래 시간이다. 말간 물에 옷을 적셔 비누질을 하노라면 오만가지 상념들이 나를 옭아맨다. 참 힘든 빨래지만 한편으로 나에겐 수많은 상념을 안겨주는 귀한 시간이다.

 

남편의 와이셔츠를 빨며 아침에 보았던 실직자 남편을 둔 젊은 아낙이 생활고를 참지 못해 마트에서 우유를 비롯해 여러 식품을 훔치다 붙잡혔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떠올린다. 와이셔츠 가득 배여 난 하얀 비누 거품 사이로 투영되는 그녀의 힘겨운 삶이 너무나 안타까워 나도 모르게 눈물까지 비추며 가족 부양을 위해 세상으로 나가 열심히 일한 남편 와이셔츠 깃의 세상 때를 여늬 날과 달리 세차게 문질러댄다. 세상의 어둠이 깃든 때 다 사라지고 신설보다 더 하얀 희망 깃들기 바라는 마음으로...

 

하루 종일 힘든 줄 모르고 뛰어놀던 아이들의 흔적이 깃든 양말은 여간 시간을 요하는 빨래. 그래서 덩달아 나의 상념도 길어진다. 간밤 학기말 시험 대비 문제를 풀 때 집중하지 않은 딸을 혼냈던 일이 마음 한자락에 자리 잡는다. 공부 좀 못하면 어떠냐 싶다가도 아니지 지금 떨어지면 안 되지 하는 두 마음의 갈등이 두 손 바닥에서 비비적거리는 양말만큼이나 갈피를 못 잡는다. 꼭 비벼도 비벼도 희미하게 남는 양말 때자국 같아 피식 웃기까지 한다. 하기 사 수능에서도 복수 정답을 인정하는 세상이니 교육에 정답이 어디 있겠으며 세상살이 정답이 어디 있겠냐 싶어 거품 난 양말을 말간 물에 휘휘 헹궈낸다.

 

아침저녁으로 우리 식구 얼굴을 어루만져 주듯 세안 후 물기를 제거해주는 반가운 수건, 늘 빨래할 때면 두 서너 장이 반갑게 인사한다. 이 수건을 빨 때는 유독 기분이 좋다. 비누 거품도 풍성할 뿐 아니라 파란. 분홍, 노란색이 선명해 왠지 마음까지 고와지려해 내 상념까지 고와진다. 자신도 어려운 가운데 이웃의 어려움을 돌보는 우유배달 아주머니의 광고가 뇌리 속을 스친다. 정말 이런 사람이 많으면 햇살에 마른 수건처럼 포근한 세상이 될 텐데...

 

애벌빨래를 한 뒤 세탁기에 넣고 한 스푼의 세제를 넣어 말간 물을 가득 채우노라면 윙 소리와 함께 잘도 돌아간다. 양말, 셔츠, 바지, 잠바, 조끼, 수건....

 

모두 모양도 색도 용도도 다른데 세탁기 안에서는 잘도 어우러져 빙빙 맴돈다. 누가 더 세상 때를 더 내는지도 모를 정도로 휘휘 돌고 돌아 거품 속에 세상 흔적들을 쏟고 또 쏟는다.

 

수억대를 운운하는 사이 하루 세끼를 먹는 것은 고사하고 세 식구 중 두 사람만이 배고픔을 달래야 하는 모순된 세상, 우리네 세상도 저 세탁기 안의 빨래처럼 모양도, 색도 , 지위도 무시한 채 세상살이의 온갖 오욕, 탐욕, 시기 등 자잘못이 다 씻기고 말간 물 닮은 얼굴로 세상 줄에 널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덧붙이는 글 | 아침에 눈 뜨면 빨래 바구니에 든 빨래처럼 여러 사건으로 얼룩진 세상 빨래를 본다. 평소 빨래를 하며 상념에 젖는 사람으로 세상도 빨래를 하는 세탁기 속의  말간 물 같은 사랑, 인정, 배려로 온갖 오욕, 탐욕,시기, 모순이 다 씻겨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되었으면...

2010.08.16 17:18ⓒ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아침에 눈 뜨면 빨래 바구니에 든 빨래처럼 여러 사건으로 얼룩진 세상 빨래를 본다. 평소 빨래를 하며 상념에 젖는 사람으로 세상도 빨래를 하는 세탁기 속의  말간 물 같은 사랑, 인정, 배려로 온갖 오욕, 탐욕,시기, 모순이 다 씻겨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되었으면...
#빨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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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두 자녀를 둔 주부로 지방 신문 객원기자로 활동하다 남편 퇴임 후 땅끝 해남으로 귀촌해 살고 있습니다. 그동안 주로 교육, 의료, 맛집 탐방' 여행기사를 쓰고 있었는데월간 '시' 로 등단이후 첫 시집 '밥은 묵었냐 몸은 괜찮냐'를 내고 대밭 바람 소리와 그 속에 둥지를 둔 새 소리를 들으며 텃밭을 일구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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