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자살도시 (Suicide City) - 14

다섯고개 예열(豫熱) - 2

등록 2010.08.31 11:46수정 2010.08.31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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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을 잘 고치는 의사를 대가(大家)로 칭하지만 골병들기 전에 미리 진찰해서 예방하는 게 선착수(先着手)죠. 시간과 비용, 병자의 통증도 덜어주니까요. 의혹도 동종입니다. 조기에 예비하지 않으면 월계관을 쓴 신앙이 되어 흉폭한 순교자를 양산시키죠. 시장님은 종극(終極)의 날이 임박했다는 저 걸신들린 아비규환이 들리지 않습니까?"

 

"교조적인 믿음의 수명은 짧기 마련이오. 망령에 찬 염원을 응원하는 우둔한 자들까지 돌보는 터무니없는 선례는 사절하겠소."

 

"관건은 전염이죠. 지저분한 손으로 순진무구한 어린이를 자꾸 만지면 어떻게 될까요? 순백함이 야물야물 때를 타면서 점차 질환(疾患)에 걸립니다. 뉴스는 시청하고 있나요? 버젓한 시민들도 감염돼서 자살대열에 승선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편리하게 결판낼 수 있습니다. 셀프 존을 뒤져서 아기가 없는 걸 명시하면 사이비들의 허튼 농간은 퇴치됩니다. 수색! 단 한마디면 됩니다. 시장님만 지지하면 즉결인데 시종일관 독불장군이시군요."

 

"원칙이 무너지는 것은 예외사항을 관행으로 터주면서 움트게 되오. 관행을 기정사실로 못 박으면서 질서도 덩달아 유기(遺棄)되는 것이오.

 

"실용성에 따라 원칙도 바뀔 수 있죠. 이렇게 개죽음하는 것을 버려두란 말입니까? 이게 질서의 파괴 아닙니까?"

 

"자살을 방조하는 것과 자살을 빌미 삼는 일은 확연히 딴판이오. 나중에 누군가 자살도시에서 티라노사우루스를 봤다고 우기면 어쩔 것이오? 저들이 잡소리에 매달리는 건 자신을 엄폐(掩蔽)할 방패막이를 찾기 때문이오. 부시장은 네버폴리스의 강령을 유념하시오!"

 

수치화할 수 없다면 버려라. 네버폴리스 세기가 개통하고 만고불변으로 추앙하는 황금준칙. 시대는 추상적이고 불명확한 이론과 담론을 배격했으며 대인관계와 사회활동도 정밀하게 계수화 되었다. 숫자로 계량화되는 것만을 추진 사업으로 용인했고 시민들의 서열(序列)도 이에 맞춰 수량화되는 시대였다. 시장이 강령을 피력한 것도 토멘의 건의가 조악함을 환기하려는 훈계였다.

 

시장의 완고함은 매몰차며 강고(强固)했다. 철벽의 요지부동이 되어 된서리 날 논증이 생성될 사각지대를 허가하지 않겠다는 준엄한 선서였다. 토멘은 그의 신랄한 논박에 노기가 부글부글 차올랐지만 정연한 발언을 당해내지 못했다. 언쟁의 골자(骨子)는 생명의 귀함이나 치안 유지가 아니거늘. 셀프 존(Self zone)을 맹폭(盲爆)하거나 이를 저지할 방어논리의 노골적인 기선 잡기였다. 에누리 없는, 한쪽이 허해지면 다른 쪽이 폭싹 꺼져버리는 시소 게임. 시장은 난적(敵手) 중의 난적이라 심약한 틈새기도 보이지 않았다.

 

시장은 토멘의 속셈을 꿰찼지만 부시장은 셀프 존을 감싸려는 그의 의중을 계측하기 어려웠다. 미아라를 찾지 않겠다는 맹랑한 조치에 미적거리는 네버폴리스 연합도 석연찮았다. 천체(天體)에 자기 귀보다 명료한 게 어디 있다고. 그의 척도대로라면 산 채로 아기를 가져와야 하는데 셀프 존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실현불가였다. 정녕 작금의 심각성을 몰라서 이러나. 토멘은 자구책을 구비해서 비경(秘境)이 된 자살도시를 찬탈하겠다고 다시금 작심했다.

 

잘잘못을 변론하는 기 싸움이 가파를 때 시민들이 지나치며 공손하게 경례했다. 날마다 보는 인사치레였지만 시장과 토멘을 대하는 품은 모나게 편파적이었다. 숙연한 탄복과 혐오스런 적대감. 토멘이 자살도시의 부시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겪은 푸대접의 앙금은 여태껏 청산되지 않았다. 시민들이 자살도시 체류 중에는 등급시험이 면제되기에 시장에게 굽실거리거나 아부할 압력도 없건만 사육당하는 금수(禽獸)마냥 시장에게 아양 떠는 불문율은 유달리 살팍하기만 했다. 토멘은 앵돌았고 흉골에서 적의가 넝쿨 채 융성했다. 방대한 증오감을 자살도시로 발산했고 이곳과 연동되는 것은 통틀어 아작 내겠다는 가학증으로 약진했다. 고루한 말다툼에 철심을 꽂으리라. 토멘은 과격한 언사(言辭)를 삼가며 자제하곤 했지만 이번에는 전면적인 월경(越境)을 단행키로 했다.

 

"네버폴리스 연합도 미아라를 개의치 않는군요. 아기 재림자 소문이나 미아라의 종적을 모르는 연고(緣故)가 불투명하기는 피장파장 아닙니까? 결과적으로 계몽이 필요한 머저리들과 건실한 시민의 안위를 동등하게 보는 거죠. 모순, 그것도 무진장 야비한 모순이죠. 미아라가 고의로 셀프 존에 남았다는 것은 억측입니다. 유능한 시민이 자살 유혹에 가담했다고 모욕하는 것이죠. 힐러가 일탈했다는 건 금시초문입니다. 누군가 그녀를 저곳에 억류한 것이니 당장 저 안으로 쳐들어가서 미아라를 구해야죠!"

 

"억류라. 누가 그녀를 가둬놓고 있다는 거요? 증인이라도 있소?"

 

"눈에 명기해야만 반증이 됩니까? 시장님의 해명은 겉으로 볼 때 위장이 안보이니 소화 효소도 없다고 싸잡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기강을 다지는데 절실한 건 법조문이나 조약이 아닙니다. 저들은 형이상학적인 거에 일절 눈독 들이지 않기 때문이죠. 떨거지들한테는 찍소리 못하게 할 강력한 공권력이면 만사형통입니다. 한 번 길들이면 냅다 조아리고 찌꺼기나 주우려고 설레발치겠죠. 이것이야말로 저들이 숭상해야 될 생활수칙입니다!"

 

"흐음. 망신살 뻗치는 비유군. 부시장 말대로라면 우리는 셀프 존에 불가(不可)의 실물(實物)이 있음을 선포해야 되오. 그건 아기 재림자가 있다는 증언이 옳다며 동조하는 셈이오.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지 마시오."

 

"현학적인 말놀음은 집어치우시죠. 상식적으로 모색하면 해법이 나오는데 원인이나 결과가 그리 중대합니까? 먹은 게 있으니까 배설하는 거 아닙니까. 알량한 학문적인 의역(意譯)은 학자들이 걸머지면 됩니다. 우리가 책을 품에 안고 암송이라도 해야 합니까!"

 

"내 일처리가 부당하다면 네버폴리스 연합에 제소하시오. 하지만 내 처우가 맘에 들지 않다면 나와 입씨름해서 뭐하겠소? 부시장의 거취에 대해서는 본인이 자유롭게 정하시오."

 

시장은 일언지하에 토멘의 요청을 일축했다. 유순하고 온후한 신색에 은은한 독침이 매복된 일갈이었다. 수더분하게 상급자에 따르던지 불복종할거면 자살도시에서 내치겠다는 선전포고였고 부시장이 집적거리는 걸 좌시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선언이었다. 토멘은 이를 악물었다. 싫으면 나가라, 자유로운 거취는 호언(好言)이 아닌 권력상쟁에서 숙청된 자들이 하사받는 비굴한 윤회이다. 나는 패잔병이 아니야. 실의(失意)한 황혼마냥 저물며 시장이 뒤에서 콧방귀 뀔 향락을 기증하지는 않을 테니까.

2010.08.31 11:46ⓒ 2010 OhmyNews
#자살 #집단지성 #재림자 #폴리스 #현존(現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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