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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표 공정사회, 전두환표 정의사회와 어떻게 다를까?

[영화로 읽는 세상이야기 46] 자신과 똑같은 나를 내가 죽이다 <더 도어>

10.09.10 17:02최종업데이트11.05.2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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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는 대기의 순환을 예측하기 위해 그 움직임을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컴퓨터가 멈춰서고 그때까지 계산한 값은 0.375485.

다시 전기가 들어오고 로렌츠는 컴퓨터에 소수 6째 자리 5를 생략한 0.37548만 입력합니다. 그런데 컴퓨터는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냈습니다. 1/10000정도의 미세한 차이만 있었을 뿐인데 걷잡을 수 없이 변해버린 것입니다.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이른바 '나비효과'가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호기심어린 영화의 매력적인 소재인 나비효과를 우리네 삶의 알 수 없는 미래와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잇는 시간여행에 적용한 영화가 <나비효과>입니다.

헌데, 그 <나비효과>를 뛰어 넘는 한 편의 독일영화가 가을바람을 타고 방문했습니다. 다만 <나비효과>가 현대물리학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카오스(혼돈) 이론을 소재로 하고 있다면, <더 도어>는 두 개의 세상이 공존하는 평행한 세상이 있다는 다중(평행) 우주론을 소재로 관객들에게 삶에 임하는 태도를 자각하게 하는 너른 장(場)을 펼쳐 놓습니다.

자신과 똑같은 나를 내가 죽여야 산다

당신이 과거로 돌아가 지우고 싶은 가장 잔인한 기억이 있다면? 이처럼 <더 도어>는 기억의 한 조각을 수정해 과거를 새롭게 복원하고픈 인간의 욕망을 모티브로 삼습니다. 그리고 불륜과 딸의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대척점에서 그 욕망의 보따리를 풀어헤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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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가는 화가 다비드는 나비를 잡아달라는 딸 레오니의 손을 뿌리치고 옆집 여자와 간통을 합니다. 그 사이 레오니가 죽습니다. 딸의 죽음 이후 다비드의 삶은 그가 그린 그림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아내와 딸의 입을 쇠갈퀴로 연결한 그 그림은 과거의 다비드를 상징합니다.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방황하던 다비드가 자살을 시도하지만 나비가 나타나 '시간의 문'으로 안내합니다. 딸의 죽음과 죽은 딸을 되살리기 위해 5년 전의 집으로 되돌아가는 시간여행의 매개 고리는 모두 나비입니다. 그리고 그 나비는 '시간'을 변곡점으로 딸의 죽음(다비드의 과거)과 삶(다비드의 현재)이라는 두 개의 공간으로 다비드를 이동시킵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방식은 <나비효과>에 비해 단순합니다. 오래 전 "그래 선택했어!"라는 유행어를 만든 TV 프로그램 <인간극장>처럼 다중우주가 열어 논 시간의 문에서 현재와 과거 중 한 곳만 선택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 선택은 영화의 결말에서 또 다른 현실로 굴절됩니다.

<나비효과>를 비롯해 과거의 자신과 대면하는 판타지 스릴러와 <더 도어>의 결정적인 차이는 '내'가 '나'를 죽여야 한다는 설정입니다. 집으로 되돌아 간 다비드가 딸을 구하지만 5년 전의 다비드와 맞닥뜨리고 엎치락 뒤치락 끝에 죽이고 싶었던 자신의 과거를 죽이는 것처럼. 이 지점에서 영화는 다시 관객들에게 묻습니다.

"과거로 돌아가 잘못을 되돌리고 싶다고요? 한 번 뿐인 인생, 더 이상 후회하지 않으며 살고 싶으세요? 고치고 바로잡으면 지금보다 나을 수도 있을 테지요. 예, 좋습니다. 대신 과거의 당신을 부정하고 끝내는 당신을 죽여야 합니다. 그래도 좋습니까?"

돌아간 과거, 또 다른 불행은 시작된다

다비드가 대오각성을 했음에도 자신을 죽이는 장면은 관객들에게 불교의 윤회를 읽게 합니다. 불륜과 딸의 죽음이라는 '죄와 벌'을 되돌리기 위해 고통스러운 과거와 대면했지만 돌아 온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인과의 법칙입니다. 물이 증발해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어 비로 내렸다가 다시 물로 되고 또 수증기로 되듯이, 삶은 고정불변하지 않으며 인과의 끈은 질량보존의 법칙처럼 연계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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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재계에 이발과 염색으로 치장하고 5년 전의 다비드로 돌아가지만 레오니는 아빠가 가짜라는 것을 알아봅니다. 진짜 아빠는 전화도 편지도 할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났다며 가짜 아빠는 자신을 레오니의 수호천사라고 합니다. 웬일로 다정다감해진 아빠를 딸은 신기한 듯 받아들이고, 껍데기만 남았던 아내 마야와의 관계도 세심한 사랑의 결을 통해 점차 회복되어 갑니다. 

그러나 5년이라는 시간의 공백은 현재의 나를 과거의 나로 치환시켜내지 못합니다. 오히려 시간의 여백을 채우기 위해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낳고, 한 번의 살인은 또 다른 살인을 불러 옵니다.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가 신들을 기만한 죄로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계속 밀어 올려야하듯, 거짓과 살인은 반복됩니다.

그 점에서 영화는 <나비효과>와 궤를 같이 합니다. 끔찍했던 과거 기억과의 대면에 고통스러워하던 주인공 에반이 불행한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면 낼수록 그를 기다리는 것은 더욱 충격적인 불행인 것처럼, 다비드와 에반의 복원된 시간과 기억은 또 다른 불행의 전주곡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누가 진짜 '나' 일까?

영화는 다비드와 이혼한 마야도 시간의 문을 통해 과거로 돌아오면서 긴박하게 가속 페달을 밟습니다. 그런데, 마야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기 위한 사람들이 속속 신비의 문을 지나 과거로 몰려옵니다. 하지만 똑같은 사람과 두 개의 삶이 공존할 수는 없는 법. 살인이 잇따르고 과거의 사람들은 떼로 묻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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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효과> 등 이전의 영화들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하나로 교류시켰습니다. 반면 <더 도어>는 '나'와 '나' 사이의 경계를 단절시킵니다.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는 양립도 공존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현재의 '나'도 과거의 '나'도 똑같은 '나'임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 영국의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는 우주탄생의 기원에 관해 설명하면서 다중우주에 대해 "현대 우주론의 수많은 이론을 적용했을 때 실제로 도출되는 결과"라고 견해를 밝혔습니다. 호킹 박사의 말처럼 서로 다른 일이 일어나는 우주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동시에 진행된다고 전제할 때, 내가 나를 죽이는 것은 살인이고 나는 죽은 것일까요? 그리고 내 인생은 과연 누구 것이며,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 중 진짜 '나'는 누굴까요?

이렇게 영화는 다중우주이라는 현대물리학의 주요한 개념에 착근한 채 묵직한 철학적 메시지를 던지며 둔중한 여운을 남깁니다. 자신과 똑같은 나를 내가 심판한다는 극적인 설정을 통해 영화는 인간적인 냄새와 고뇌를 잃지 않으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밤하늘의 우주보다 새카만 깊디 깊은 우물에서 삶과 관계에 대한 성찰을 길어 올리게 합니다.

성찰과 자각이 깊어질수록 영화의 결말은 굴절된 현실만큼 충격적이고 스산하게 가슴에 와 닿습니다. 설사 두 개의 세상이 있다 해도 순간의 실수만으로도 영원할 것만 같았던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한 번 틀어진 관계는 회복되지 못하며, 과거는 과거로만 존재한다는 단절의 시간이 예리한 면도날이 되어 가슴을 그어 내립니다. 

이명박표 공정사회와 전두환표 정의사회의 차이점은?

멀리서는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라지는 헛것을 우리는 신기루라고 일컫습니다. 과거로 되돌아간 다비드가 모든 것을 복원할 수 있다고 믿은 것처럼 말이지요. 헌데, 이명박 정부도 추락한 '실정(失政)'을 복원할 수 있다며 칼춤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 유명환 전 장관 딸 특채사건에 고위관리 자식들의 특채설이 맞물리면서 공정사회가 빛을 발하는 착시현상으로 그 기세가 더 등등해졌습니다.

그러나 저잣거리의 민심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습니다. 지난 80년대 초 총칼을 휘두르며 광주항쟁을 짓밟고 정권을 강탈한 전두환 군사정권의 구호가 '정의사회' 구현이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문을 열고 30년 전 과거로 돌아가 본 정의사회와 작금의 공정사회가 어디서, 어떻게 다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섭니다.

더욱이 전두환 정권 못지않게 이명박 정부 역시 부자감세에 위장전입에 세금탈루에 병역기피로 점철된 지극히 공정치 못한 정권임에도 공정사회를 부르짖는 희한한 사태가 연일 벌어지고 있으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의심은 의심을 낳고 신기루만 자욱합니다. 위기 때면 어김없이 등장한다는 권부의 제 살 도려내기 트릭이 아니냐는.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아무리 공정사회 품안으로 뛰어든다 해도 실정 복원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걸레는 걸레일 뿐 삶아도 행주가 될 수는 없다는 격언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명박 정부는 공정사회가 조중동을 위시한 기득권세력에게 얼마나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꿈에서조차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공정사회 운운하는 것은 결국 레임덕 차단용 칼춤에 불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헌데, 문제는, 그 칼이, 누구의 목을 겨누게 될지, 모른다는 점입니다.

더 도어 정의사회 나비효과 공정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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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열의 영화로 읽는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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